6월 24일. 프랑스 여행 4일째.
보르도 시내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할 장소를 찾던 우리 일행은 서둘러 가까이에 있는 “벨칸토 Belcanto”라는 이태리 식당으로 비를 피했다.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비를 감상하면서 레스토랑 안쪽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맛있는 소스 냄새의 향긋함을 즐기는데, 비에 흠뻑 젖은 여성 몇 명이 뛰어 들어왔다.
입구에서 젖은 옷과 머리를 말리는 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여행 중에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과 전혀 다른 쾌감을 느꼈다. 우리도 한 순간만 늦었더라면 저들과 같이 될 수 있었겠지만, 먼저 왔기에 전혀 다른 편안함 속에 즐길 수 있다는 느낌. 저들처럼 급하게 옷을 말리고 나가야 한다는 조급함 보다는 여유 속에 무언가를 더 즐길 수 있다는 특권 의식.
이 느낌은 나아가 비단 이 사건에서 뿐만 아니라 최근 다녀온 빈엑스포와 프랑스의 와인 문화 전반에서 느꼈던 점을 묘사한다고 하겠다.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것. 하나도 서두를 것이 없다는 것. 오히려 시간을 두고 기다린다는 것. 이는 아마 마음의 평화를 가진 이들의 특별한 소유물인 듯 하다. 이와 같은 감정과 마음의 상태가 ‘특별한’ 것일 수 있는 것은 작금의 초고속 사회가 그와 같은 여유를 만들면서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세에 역행하면서 기다림의 문화를 유지, 확대해 온 것이 있으니 이것은 다름 아닌 와인이다.
프랑스 보르도의 중앙에 흐르고 있는 가론느 강의 유유함처럼 와인 문화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정신은 기다려서 즐길 줄 아는 여유라고 하겠다. 이 정신은 프랑스 와인 산업의 가장 ‘상업적인’ 전술이라고 할 수 있는 빈엑스포에서도 느낄 수 있었으며, 여러 사또의 테이스팅 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6월 22일부터 프랑스 보르도에서 개최된 빈엑스포는 와인 전문가 5만여명, 이중 30% 정도를 차지하는 1만 3천여명의 외국 방문객, 그리고 40여개 국가의 2500여 업체가 참여하는 초대형 와인 박람회다. 전시장의 길이만도 1km가 되는 어마어마한 곳으로 와인 산업 관련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다.
이 곳에서는 와인 시음 이외에도 와인 업계에 관련된 현안들에 대한 토론도 이루어지고 어떤 부스에서는 각 국가에서 어떻게 와인 판매를 촉진하고 있는지에 대한 전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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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와인 시장의 구성원들이 만나는 곳으로 가격, 판매 마진, 소비자 공략법 등 가장 상업적인 이야기들이 오간다고 할 수 있는 이 곳 빈엑스포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동시에 흐름을 알 수 있다.
방문할 부스가 너무도 많아 행사 5일 전부 행사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유가 있고 느긋하다고 할 수 있다. 와인을 따라주는 이도 그렇고 시음하는 이들도 그렇다. 자신들이 공들여 준비한 와인들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음미해 줄 사람들을 찾고 빠른 평가를 내려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관람객들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빈엑스포에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에게 빈엑스포는 더 많은 거리를 가야하는 경진대회가 아니다. 이들은 전시된 와인을 되도록 많이 시음해 봐야지 하는 목적의식보다 전시장 밖에 마련되어 있는 레스토랑들에 앉아 음식과 와인을 즐기고 음미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이들에게 와인은 특별한 행사에서 시음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즐거움에 특별함을 더하는 요소다. 바쁜 일정 중에 (전시장 안에 시음해야 할 와인들이 즐비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여유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와인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의 특권이며, 이를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감이라 하겠다.
내가 출입증을 새로 발부 받아야 되는 일이 있어서 불가피하게 오랜 시간 여러 사람들을 길게 줄을 세워둬야 했을 때도 이들은 이와 같은 여유를 보여주었다. 우리 일행이 Perrier-Jouet社에서 마련한 샴페인과 식사를 할 때에도 그 누구도 음식을 서둘러서 달라고 하는 이가 없었다. 이날의 온도 38도. 찌는 듯한 더위의 야외 레스토랑. 그곳에 우리와 함께 했던 이들은 더위를 느끼기 보다는 그들의 잔에서 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뿜어져 올라오는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기포와 향기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여행 삼일째 방문한 Jean Pierre Moueix의 와인 테이스팅 룸. 이곳에서 각 국에서 모인 와인 전문가들과 함께 2002년 빈티지의 최고급 와인 24개를 시음할 수 있었다. 아직 병에 담지 않은 와인들을 마신다는 것, 그리고 향후 수 십년간 더 숙성되면서 더한 매력을 풍기게 될 이들을 이렇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입안에서 느끼는 와인의 맛보다 완전히 숙성되었을 때에 다시 만나자는 달콤한 약속과 기다림의 시작이기에 더욱 가슴 떨리는 일이라 하겠다.
▲페트뤼스 포도밭 |
무엑스社와의 시음회가 있은 후 , 우리는 뽀므롤의 다른 지역과 달리 철분이 없는 푸른빛 점토질과 잔 자갈 층을 자랑하는 페트뤼스(Petrus)에서 2002년 빈티지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이때도 우리는 아주 많이 기다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기다림의 끝에는 페트뤼스의 와인과 이를 빛내줄 오찬이 있었기 때문이다.
▲Christian Moueix |
이 와인들을 시음하고자 하는 우리의 호기심이 와이너리를 돌아보는 시간이 길다고 느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또 페트뤼스의 시멘트 발효 통(vat)과 셀라의 오크 통만을 본다면 여느 평범한 시골 양조장과 다를 바 없었기에 우리의 호기심이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으로 착각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발효를 마치고 건조에 들어간 시멘트 통의 노후한 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시멘트 통이 오크 통보다 더 먼저 도입되었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으니 말이다.
샤또 페트뤼스로 불리건 그냥 페트뤼스라고 불리건, 자신만의 품질을 나타낼 수 있는 페트뤼스는 오찬장에서 그 매력을 한껏 드러내었고, 양조장의 시설 하나하나가 오랜 세월을 견뎌냈기에 더욱 특별한 기능을 수행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날 오찬에는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와인 잔 생산자인 리델 씨와 그의 아들 맥스도 참석했으며, 미국의 유명한 와인 전문 잡지의 전문 기고가인 서클링(Suckling)씨도 있었다. Moueix씨 부부를 비롯하여 다양한 전문가들은 와인과 오찬을 즐기면서 약속했다. 2002년 페트뤼스 와인이 그 맛의 절정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그리고 그 시간을 즐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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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방문한 샤또 마고와 샤또 라투르에서도 우리는 색다른 기다림을 약속 받았다.
샤또 마고는 프랑스인의 자존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곳에서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 품질을 보증받았다. 최상의 맛을 선보인 2002년 빈티지 샤또 마고 와인 이외에도 샤또의 외관이나 양조실의 웅장한 26개 붉은 색 오크 발효통(Vat) 그리고 저장실을 가득 매운 1년차와 2년차 와인 오크 바랠통은 사또 마고들이 가진 잠재력에 대한 충분한 약속이 되었으며, 또 하나의 설레임의 여유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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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 전경 |
▲라투르 상공 |
Pauillac 2002는 기대 이상으로 우수한 품질을 보여 과학과 기술의 절묘한 만남이 일궈낸 성과를 맛볼 수 있었다. 나머지 4개 와인들은 “Outstanding”과 그 이상의 품질을 보여주었으며,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더 많은 것을 음미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와인들이 숙성되기까지, 그리고 샤또 라투르의 공사가 마무리되어 보다 안정적인 설비에서 더 많은 좋은 와인이 나오기까지.
이와 같은 기다림의 정신, 느림의 문화는 와인 애호가라면 가장 먼저 체득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일행이 프랑스 여행 마지막 날에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인 아르페쥐(Arpege)에서 식사를 했을 때, 15분 일찍 도착했음에도 오픈 시간까지 기다렸고, 세트 메뉴가 있었음에도 오랜 시간 상상력과 기억을 더듬어 가장 맛있는 메뉴를 선택했던 것처럼. 그리고 같이 마실 와인을 선정함에 있어 주문한 비둘기 요리 “Pigeonneau hydromel”과 어울리는 가장 간편한 선택을 하기 보다는 국내에서 전혀 구할 수 없는 와인이어서 더욱 특별한 선택이었던 그랑끄뤼 와인 “Clos de la Roche 1997 Dujac”를 고르기 위해 시간을 투자했던 것처럼. 와인을 진정 즐기기 위해서는 급속도로 확산 되고 있는 와인 문화 중심에 이와 상반 되는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_이석기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