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풍악의 고장 영동, 홍시의 고장 영동.
영동은 박연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다.
박연 선생은 고려 말기인 1378년에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영동의 "모짜르트" 이다. 피리를 기막히게 잘 불었다 한다.
문예를 진흥시킨 세종대왕 시절에 우리 음악을 집대성한 분으로, 왕산악, 우륵과 더불어 우리 나라의 3대 악성으로 불린다.
"풍악을 울려라, 삘리리~삘리리~"
왜 글의 초반부터 방정맞게 피리소리냐구요? 잠시후면 알게 될 것을…
영동은 또한 스테판의 고향이다. 60년대 초반 찢어지게 가난할 때, 이곳에서 태어났다. 공부 좀 한답시고, 대전으로, 서울로 그리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물론 그 때까지 이 지역에는 포도가 별로 없었다.
대신, 영동은 감으로 유명했다. 여기는 가로수가 감나무다. 전국에서 가로수가 아름다운 곳으로 영동이 뽑혔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11월쯤에 무주구천동이나 무주리조트 가는 길에 영동 읍내를 거친 사람이라면 그 붉게 물든 홍시의 가로를 잊지 못한다.
"그 상서로운 홍시의 붉은 빛을…"
왜 글의 초반부터 홍시 타령이냐구요? 잠시후면 알게 될 것을…
II. 포도의 고장 영동 : Terroir
"영동(永同)" 하면 어딘가 하고 갸우뚱 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저 태백산맥 동쪽을 "영동(嶺東)" 이라 하고, 또 서울 안에서도 강남에 "영동(永東)" 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기 때문이다.
충북 영동은 충청, 전라, 경상 3지역의 접경지에 있는 곳이고, 소백산맥의 험한 준령이 추풍령으로 넘는 구릉지대이다. 대부분의 포도밭은 해발 고도 100~200m부근에 위치해 있다.
토양은 대부분이 석회점토질이며 밤낮의 온도차가 크다. 연 평균 강수량 1,100 mm 정도, 연 평균 기온 12도 정도로 포도 재배에 그리 나쁘지 만은 않다. 늦서리가 내리는 4월말을 조심해야 하고, 첫서리가 내리는 10월전에 수확해야 한다.
1990년에서 1996년 사이에 영동의 포도밭 면적은 거의 4배 정도 증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학 중에 종종 들린 고향에서 포도밭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스테판이 놀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2년에 한번씩 들를 때마다 논밭이 포도밭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이런 영동의 변천은 스테판의 변천과 무관하지 않다. 스테판도 처음엔 역사를 공부하러 프랑스에 갔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곳에서 포도주 라는 놈에 흠뻑 빠져 인생의 길을 바꾼 것처럼, 그의 고향인 영동도 이제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만들게 된 것이다.
스테판은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변화를 가진 두 개체의 운명을 곰씹어 본다.
"그 땅과 그 사람이 함께 변하지 않았는가…"
III. 샤또 마니 납시오~
이렇게 갑자기 확장된 포도밭은 필연적인 공급과잉으로 수급의 불균형을 초래했고, 안정적인 수요처를 찾던 이 지역 농민은 포도주 생산에서 그 대안을 찾았다. 농민들이 함께 십시일반 추렴을 하여 아예 포도주 공장을 차린 것이다.
그리고 생산기술을 배우기 위해 종주국인 프랑스, 이탈리아로 연수단을 파견하였다. 불어, 이태리어가 될리가 없었지만 포도주를 만들겠다는 열정 하나로 눈썰미를 익혀 왔다.
동시에 영동대학교 식품공학과 포도주연구팀의 도움을 얻어 드디어 "순 국산 포도주"를 개발 생산하게 되었다.
이런 스토리속에 탄생한 것이 "샤또 마니" !
정말 기가 막힌 이름이다.
언젠가 영동수도요리학원의 이종임 원장이 인터넷 사이트를 오픈하면서 그 이름을 "요리조리 닷 컴" 이라고 명명했을 때, 난 정말 그 이름에 반했다.
백만불짜리 이름이 아닌가. 그 의미하며, 그 발음하며…
그런데 그 세련된 "영동"이 아닌, 충청도 시골 영동에서 이렇게 멋진 이름이 또 하나 탄생했으니 말이다.
샤또 마니.
가히 천만불짜리 이름이다. 그 의미하며… 그 발음하며…
내가 비록 작명가는 아니지만, 훈수에는 자신있지 않는가.
와인애호가들한데 쉽게 떠오르는 그랑크뤼 이름 한번 들어보라고 하면, 열이면 아홉은 "샤또 딸보요~" 할 것이다. 왜냐?
일단 단어가 짧다. "도멘느 꽁뜨 죠르쥬 드 보귀에", 뭐~ 이런 이름이 아니다.
발음이 쉽다. 우리말에는 "뚱보… 먹보… 잠보…" 이런 말이 많다. 그 소리의 울림도 좋다.
"샤또 마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더 발음하기 쉽다. 아예 받침이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발음해 본 단어 중에 하나일 것이다. "마니 주세요~", "복 마니 받으세요" 등등.
또한 이 단어엔 포도주가 "많이" 팔리기를 원하는 주술적 의미도 담겨있다.
" 캬~ 해몽좋고~!! "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내가 장황히 열거한 이런 단어적 의미 때문에 이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니" 라는 이름은 영동군 양산면 죽산리의 '마니산' 이라는 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얼마나 의미있는가. 그 산 자락에 동굴이 있고, 그 동굴안에서 익어간 "샤또 마니"가 자기가 자란 땅과 자연을 잊지말라고 붙여준 이름이 아닌가. 마니산의 정기를 잊지 말라고…
자, 그럼 동굴을 열고 샤또 마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자… 열려라 참깨!
IV. 테이스팅 :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1. Campbell Early.
연한 벽돌색 칼라, 고동색 톤이 살짝 묻어 있다. 전체적으로 탁하고 흐릿한 느낌.1
11월 서리를 맞아 검은기 띄어가는 홍시의 색깔이라 할까...
일부러 약하게 정제했을 수도 있고… 깨끗함 느낌은 아니다. 약간의 기포도 보이고…
잔 벽을 타고 내리는 눈물의 비연속성 또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한 덩어리의 액체가 하나로 온전히 융합되지 못한 듯한 인상이다. 무엇 때문일까…
이러한 느낌은 원반의 디스크의 이중성에도 나타난다. 얇은 또 다른 무엇이 살포시 덮어씌여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역시 밝혀야 할 부분이고…
첫 코의 향은 강한 편. 그러나 깔끔하지는 않다. 아직은 세련되지 않은 내음… 포도껍질향이 단연 강하게 튀어나오고, 허브와 호프를 연상시키는 식물성 향이 후각을 마비시킨다.
잔을 저어 좀 더 공기를 쬐어보자. 역시, 짙은 포도쥬스향, 곶감, 송진향과 유칼립투스… 이런 류의 스파이시한 느낌과 알싸한 알코올향도 빠지지 않는다.
새큼한 산도가 혀를 자극하며 신선미를 돋구워 준다. 그리고 감싸주는 부드러운 미감, 완전한 드라이 와인은 아닌 듯하다. 적은 듯한 탄닌은 부드럽게 느껴지고,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황급히 사라진다.
나무의 느낌은 나지만, 그리 세련되지는 않다. 어떤 종류의 "나무통"일까?2
2. Cabernet-Sauvignon.
우리 기후에 Cabernet-Sauvignon 을 심다니…
처음 품종 이름을 듣고는 반신 반의했다. 물론 튼튼하고 어디서든 잘 자라는 고급 품종이긴 하지만, 일조량과 배수여건이 따라주어야 하는 것은 매 한가지…
그러나 이것이 기우였음은 테이스팅 후에 밝혀졌다.
연한 루비색에 약간의 깊이있는 색조, 핑크톤을 띄어가는 연보랏빛 뉘앙스… 보졸레 누보의 그색상이 아닌가. 맑고 산뜻한 느낌이 캠벨과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향은 역시 아직은 부족한 편. 약간의 미네랄 터치가 미소를 띄게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희미한 베리향에 머물러 있다.
미각의 느낌도 많이 개선되었다. 탄닌은 거의 없고 매끈해서 부드럽고 말쑥한 와인의 이미지이다. 굳이 풀바디 와인을 만들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보졸레 누보의 스타일을 견지하는 것도 현실적이리라.
……
샤또 마니의 모든 와인은 음악을 듣고 숙성했다고 한다.
박연 선생의 그 피리소리를 들었을까 ? 60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촌놈 박연선생이 한양의 궁중악당에서 겪은 수모는, 그를 3대악성으로 키워 주었듯이, 지금의 이 "쁘띠 와인"이(미안합니다!), "그랑크뤼"의 큰 걸음으로 달음질 할 때를 기다린다.
- 중앙대 소믈리에과정 교수 손진호 -
1. 샤또 마니의 주품종은 캠벨 혹은 캠벨얼리 라고 하는 적포도이다. 마스카트 벨리, 꺄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도 심었다.
2. 새 오크통에서 3개월 배양하고, 나머지는 스테인레스조에서 숙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