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하더라도 와인하면 호텔의 레스토랑이나 특별한 날에 마시는 특별한 술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나 최근에는 각종 신문, 잡지, TV를 통하여 와인에 대한 기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며 이제는 어디 가서 와인을 모르면 '촌놈' 신세를 면할 수 없는 환경이니 우리나라도 와인의 대중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는 느낌이다.
작년(2002년) 가을에는 유난히 '보졸레누보(Beaujolais Nouveau)' 출시에 앞서 많은 언론이나 방송사에서 이 와인을 다루어서 그런지 판매가 급속도로 늘었다고 하고 주요 호텔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보졸레 누보 파티는 규모면에서 국내 와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행사가 끝나고 일부에서는 너무 과열된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실제 모습보다 과장되고 포장되어 해마다 11월 세 번째 목요일이면 파티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고 있는 보졸레 누보! 꼭 그렇게 법석을 떨면서 마셔야 하는 술일까?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의 보졸레 지방에서 그 해 첫 수확한 '가메(Gamay)'라는 과일향이 풍부한 포도로 만들어진 햇 와인이다.
9월경부터 포도를 수확하여 최대 4-5일간 발효를 시킨 후 압착을 하여 일주간의 짧은 숙성을 거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와인의 깊은 맛을 기대하는 것 대신 신선함과 풍부한 과일향을 맘껏 즐길 수 있고 가격 또한 아주 저렴하여 와인 초보자들도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와인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 리옹의 선술집을 중심으로 주로 지역 내에서 소비가 되던 보졸레 누보가 70년대에 파리로 진출하면서 파리내의 술집과 바에 퍼지게 되고 보졸레 누보 축제는 국가적 차원의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와인 수출상들의 해외시장 개척이 성공을 거두면서 보졸레 누보는 전세계로 진출하게 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몰이를 하게 된 와인이다.
보졸레 누보는 신선한 햇 포도주라는 점 말고는 뛰어난 고품질의 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면 보졸레 누보 마케팅이 얼마나 성공적인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의 보졸레 누보는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까?
우선 보졸레 누보는 한해의 농사를 마무리하고 일년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하는 축제의 술이라는 점에서 가을 추수한 햇 곡식으로 음식을 하여 이웃과 함께 했던 우리의 정서와 부합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정해진 출시 일을 맞추기 위해 비행기로 공수 되는 등 비싼 운송비가 한 몫을 하고 약간의 거품이 포함되어 현지 가격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1~2만원대의 저렴한 와인의 가격도 눈길을 끌고 있다.
이렇듯 보졸레 누보는 우리의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술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값비싼 고급 와인들보다도 당위성이나 의미를 부여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우리의 실정과 조화를 이루어 보졸레 누보가 올바른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느냐인데 개인적으로 보졸레 누보의 인기가 상승하고 이에 편승하여 와인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까지 높아져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보졸레 누보를 수단으로 하는 우리 와인문화의 현실을 확인하면서 보졸레 누보가 왜곡 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89년 11월 일본 동경에 출장을 갔다가 친구와 함께 바에 가서 양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자정이 넘자 분위기가 웅성거리더니만 갑자기 서빙하는 종업원이 공짜라고 하며 포도주를 마시겠냐고 해서 마시던 양주는 남겨 놓고 포도주만 마신 기억이 있다. 바로 이 공짜 포도주가 보졸레 누보였던 것이다.
보졸레 누보 축제가 포도주 산업에 있어서 하나의 성공한 마케팅이라고는 하나 우리의 축제에는 목적성이 없는 듯 하다. 축제의 술이라고는 하나 꼭 그렇게 떠들썩 해야만 보졸레 누보를 음미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보졸레 누보 축제에 보졸레 누보는 잠시 등장만 할 뿐이고 다른 쇼와 눈요기거리만 가득하지 않던가?
우리가 매해 돌아오는 설날에는 떡국을 먹고 추석에는 송편을 먹고 김장철에는 어머니가 막 버무린 겉절이를 먹어보는 것처럼 보졸레 누보도 '겉절이 와인'이라는 생각으로 "올해 보졸레 누보는 이러이러한 맛이구나" 하며 한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의미로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올해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보졸레 누보가 출시되는 11월에 많은 곳에서 보졸레 누보 파티가 열릴 것 같고 연말연시 용 선물로 큰 인기를 끌 것 같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그 동안 고마웠던 지인들에게는 감사를 전하고 열심히 일해 준 동료나 부하 직원들에게는 고마움과 격려의 뜻을 담아서 선물한다는 취지가 매우 좋은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보졸레 누보는 작지만 큰 기쁨을 전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저렴한 보졸레 누보의 가격과는 동떨어진 값비싼 보졸레 누보 파티도 현란한 쇼나 볼거리에 치중하기 보다는 이왕이면 와인문화가 싹트고 있는 현재 와인의 대중화를 위한 의미 있는 행사가 되도록 내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지금은 우리의 와인문화가 짧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과도기가 아닐 까 싶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진정한 문화로서 자리잡게 될 것이라 믿는다.
- ㈜베스트와인 대표이사 은광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