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중순 주요 프랑스 와인 생산지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급작스런 서리와 영하의 날씨가 포도밭을 강타한 것이다. 관계기관에 따르면 프랑스 와인 생산지의 약 80%가 피해를 입었으리라 예상했다. 이번 서리는 수십 년 동안 ‘유례없는 재앙’이라 언급되며 2021년 수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보르도와 론의 피해가 만만치 않고 부르고뉴의 경우 샤블리에서 마콩까지 비교적 일찍 싹트는 샤르도네 품종의 피해가 극심하다고 한다.
<사진 ⓒ domaineevremond>
전세계 와인 생산지들은 기후변화의 영향 아래 몸살을 앓고 있다. 유럽은 심해지는 봄의 냉해와 서리뿐 아니라 2003년부터 계속 더워지는 여름을 겪고 있다. 포도의 성장기가 너무 더우면 타닌이나 안토시아닌 등 화합물들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다. 포도의 생육 기간도 놀랍도록 짧아지고 있다. 평균 수확일은 20~30년 전보다 2-4주 빨라졌다. 부르고뉴의 경우 2020년이 기록상 가장 빨랐다. 보르도 또한 보통 9월말이나 10월초에 수확했으나 요샌 8월이면 수확을 시작한다.
와인 생산지의 여름은 더울 뿐만 아니라 건조해졌다. 스페인, 이탈리아, 캘리포니아 일부 지역과 남호주,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건조한 여름이 계속되면서 가뭄이 심해졌고 포도 알이 햇볕에 타버리는 일도 많았다. 산불의 위협 또한 증가하고 있다. 포도밭이 직접적인 산불의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익어가는 포도가 산불연기에 오염되면 와인의 품질을 떨어뜨린다.
날씨의 패턴이 불규칙하고 극단적이란 점은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포르투갈 도루Douro에선 2018년 5월 연간 강우량의 12%에 달하는 비가 단 한 시간만에 퍼부었다. 유명한 도루의 가파른 계단식 포도밭은 흙이 쓸려 내려가고 포도나무가 쓰러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기후변화가 만든 명과 암
와인 생산지의 평균 기온이 상승하면서 모든 생산지가 위협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국, 캐나다, 독일은 기후변화의 혜택을 받는 곳이다. 눈치 챘듯이 이 지역들은 춥고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포도가 충분히 익는 게 힘들었다. 그러나 현재 이 지역들은 10년 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생산지가 되었다. 특히 남부해안에 인접한 잉글랜드 남부는 고급 스파클링 와인 생산지로 떠오르며 주목받고 있다. 떼땅져 Taittinger와 같은 유명 샴페인 하우스도 일찌감치 영국의 스파클링 와인 생산에 투자했다. 고급 스파클링 와인에 있어 중요한 요소인 높은 산도를 샹파뉴보다 영국에서 더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샴페인 하우스 떼땅져의 회장 Pierre-Emmanuel Taittinger가 영국 켄트 지방의 포도밭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 domaineevremond>>
프랑스에서 샹파뉴는 가장 추운 와인 생산지였으나 점차 뜨거워지는 여름이 문제다. 베이스 와인의 산도를 높게 유지해야 하지만 과거보다 농익은 포도 때문에 평균 산도가 낮아졌고, 대신 맛은 더 풍성해졌다. 생산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확을 앞당기고 있다. 또한 샴페인 양조 중 마지막 단계인 도사주 dosage(맛의 균형을 위해 당분을 첨가하는 과정)를 생략하거나 설탕의 양을 조절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일반 와인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빈티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레드 와인의 품질은 눈에 띄게 향상되고 있다. 반면 수년간의 온화한 겨울은 전통적인 아이스와인의 생산을 어렵게 만들었고 독일 아이스와인은 점점 희귀해지고 비싸졌다. 아이스와인을 만들려면 12, 1월 온도가 최소한 영하 7도까지 내려가 포도송이가 나무에 매달린 채 얼어야만 한다. 2020년 독일와인연구소 German Wine Institute는 “아이스와인 2019 빈티지는 전국적으로 수확이 실패한 첫해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밝혀 기후변화의 뚜렷한 명함을 실감하게 했다.
<아이스와인을 만들기 위해 꽁꽁 언 포도를 수확 중인 모습>
이 밖에 생각도 못한 의외의 생산지들이 등장했다. 맥주 왕국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에서 와인이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다면 믿겠는가? 사실 북유럽은 기후변화의 수혜를 받으며 새로운 와인 생산지로 부각되고 있다. 현재 상업적인 와이너리 숫자는 덴마크 90개, 스웨덴 40개, 노르웨이 12개로 비록 와인산업은 걸음마 단계지만 기대와 희망은 예상보다 크다. 주요 포도 품종은 모두 교배종으로 청포도는 솔라리스 Solaris, 적포도는 론도 Rondo와 마레샬 포슈 Maréchal Foch이다.
와이너리의 변화에서 읽을 수 있는 고민
기후학자들은 2050년엔 세계 와인지도가 변화할 수 있다고 예고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오세아니아의 기존 와인 생산지에선 더 이상 포도를 재배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기후변화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와인 생산자들이 포도밭과 와이너리에서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데 노력하고 있다. 태양광이나 풍력 등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고 빗물의 재사용, 더 가벼운 병 사용, 생산지 주변의 산림 조성 및 보호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생산자들은 더위를 피해 지금의 포도밭보다 고도가 더 높고 바람이 부는 서늘한 곳을 찾아 포도나무를 심는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더운 지역에선 산비탈과 그늘진 북쪽 경사면의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포도가 골고루 잘 익기 위해 낮은 고도를 선호했던 미국 위싱턴주의 와인 생산자들은 천연 산도를 얻기 위해 고도가 높은 적당한 곳을 찾고 있다. 칠레 와인 생산자들은 미지의 땅, 남쪽 파타고니아로 향하고 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어떻게 해야 포도가 충분히 익을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오늘날 와인 생산자들은 포도의 천연 산도를 높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과거와 달라진 캐노피 관리가 좋은 예다. 햇빛을 더 받기 위해 포도 넝쿨의 잎사귀를 제거했다면, 요즘 생산자들은 강렬한 햇빛으로부터 포도송이를 보호하기 위해 잎사귀를 덜 제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또 다른 적극적인 방법으로 생산자들은 가뭄과 더위에 강한 품종을 찾고 있다. 남아공에선 아시르티코 Assyrtico, 마르셀란 Marselan 같은 품종들이 가뭄에 잘 견디는지 실험하고 있다. 남호주 또한 피아노 Fiano, 네로다볼라 Nero d’Avola 등 다양한 지중해 품종들의 재배 시도가 늘고 있다. 캘리포니아 일부 지역에선 알리아니코 Aglianico, 템프라니요 Tempranillo, 프티 시라 Petite Sirah, 투리가 나시오날 Touriga Nacional 등 열기에 강한 품종들을 실험적으로 재배한다.
신대륙에 비하면 와인생산에 관해 답답할 정도로 엄격했던 구대륙 역시 변하고 있다. ‘위기의 와인산업을 구하라!’의 절실함을 알 수 있다. 구대륙 와인의 상징과도 같은 보르도는 INAO(프랑스 원산지명칭협회)에 기후변화의 영향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품종의 재배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2021년 1월 INAO는 보르도 AOC와 보르도 수페리에르에 6개 품종의 재배를 승인했다. 적포도 4종 Arinarnoa(카베르네 소비뇽과 타나의 교배종), Castets(거의 멸종상태의 잊혀진 보르도 품종), Marselan(카베르네 소비뇽과 그르나슈의 교배종), Touriga Nactional(포르투갈 대표 품종)이다. Albarino(Alvarinho, 스페인 북서부의 청량한 성격을 가진 품종), Liliorila(프랑스 남서부의 바스크와 샤르도네의 교배종) 청포도 2종이다. 단, 전체 포도밭에서 차지하는 면젹은 5%, 블렌딩 비율은 10%로 제한한다. 3년동안 재배한 후 블렌딩 할 수 있는데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새로운 품종의 블렌딩은 2024 빈티지부터 가능할 것이다.
보르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부르고뉴의 갈등은 더 깊은 편이다. 부르고뉴는 대체품종의 범위 안에 외국산 품종을 포함하는 타 지역과는 달리 부르고뉴 와인 스타일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클론에서 답을 구하고자 한다.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피노 누아 클론은 47개지만 그 중 사용되는 것은 극소수이다. 2018년부터 일부 생산자들은 현재 환경에 가장 적합한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클론을 찾고 있다. 이와 함께 부르고뉴 와인위원회(BIVB)는 부르고뉴에서 오랫동안 잊혀진 포도 품종인 Aubin, Roublot, Sacy, Melon, César 그리고 Tressot를 실험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기후변화의 위기 앞에 와인 생산자들은 다양한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사실 기대만큼 밝진 않다. 게다가 생산지 이동과 새로운 품종의 도입은 고유의 와인 스타일을 바꿀지도 모른다. 미래의 보르도 와인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보르도 와인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기후변화만큼이나 심각하게 다가온다.
기후변화는 전세계 와인산업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다. 어떤 선택이든 피할 수 없는 와인 생산자들의 깊은 고민과 우려가 읽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