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1997년 7월.
따가운 여름햇살이 채 물러나지 않은 초저녁, 난 San Jose의 어느 작은 이태리 식당에 있었다. 서울 지사와 본사인원으로 새로운 팀이 꾸려지고 난 후의 첫 분기 결산을 마치고 자축회식이 벌어지던 날… 우린 쉴 새 없이 와인을 따랐고, 또 주저 없이 코르크를 따댔다.
무슨 와인이 있었는지, 어떤 샴페인이 좋았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몸 속의 취기가 온전히 와인으로 가득 찼던 그 날. 난 지금도 그 날의 와인의 취기를 잊을 수가 없고 그 여름의 와인들을 그리워한다.
와인산업으로의 한 발을 내딛으며...
2000년 10월. 와인 바를 열기로 결심했다.
직장생활을 접음과 동시에 와인도 그저 남들의 호사라 생각하고 있던 중, 한동안 잃어버렸던 포도주의 유혹이 그 해 여름부터 다시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와인 바가 뭐야 ?",
"와인만 해서 되겠습니까?".
많은 이들의 질문에 나 자신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만들어가야만 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고, 2001년 4월, '마고' 가 문을 열었다.
4월 14일에 오픈을 맞추어 놓고 보니, 이미 시간은 제 속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공사는 삐끗삐긋 해대며 엿가락처럼 늘어지기 일쑤였고, 신축 건물의 마무리는 바의 내부공사보다도 더디게 흘러갔다.
쉽게 생각되었던 와인 리스트 작업도 수월치 않았다. 이걸 넣어야 하나, 이건 왜 빼야 하나. 차마 고가여서 마셔보지 못한 와인들, 마실 필요가 없을 거라 건방지게 생각되었던 와인들을 알아야 했고, 그 수는 예상보다 많았다. 아, 이럴 거면, 리스트 수를 좀 줄여볼까. 며칠 전쯤, 미리 여유 있게 와인을 받아놓고 리스트 작업과 셀러 정리를 마치겠다는 처음 생각은 이런 저런 사소하고 또 중요한 이유로 미루어졌고, 수입상들로부터 오픈 전날이 되서야 와인들을 들여놓았다.
어렵지 않게 채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직원들도 와인에 대한 애착과 지식을 기본으로 맞추어 놓으니 이도 쉽지 않았고 끝내 그 고집에 직원 한 명 없이 14일을 맞이했다.
아, 이런…
사실 개업 당일은 별 기억이 없다. 이미 이틀 여를 꼬박 새우고 막상 손님들을 정중히 모셔야 할 그 날엔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코르크를 따던 기억만 남아있다. 인터넷 동호회 회원분들, 와인 업계 사장님들, 직원분들 또 어디서 알았는지 학교 선후배에 친지들까지.. 예상치 못한 수의 손님들에 고마움과 송구스러움이 날 묶어놓았다.
또 그러면서, 고대했다.
음…오늘만 같아라.
운이 좋았는지 머지 않아 직원 두 명이 합류했다. 정말 고맙게도, 모두 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다. 진용이 갖추어졌다.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 체계와 제반 바의 운영에 대한 틀도 조금씩 잡아나가고, 와인에 대한 이야기도 진지하게 펼쳐보고.
그런데, 아…손님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참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애당초 많은 우려를 안고 홍대 앞에 자리를 잡았던 터라 사실 상당한 불안함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 강북과 대학가는 와인의 불모지인가, 아니면 온전히 '마고' 의 부족함 때문 일까. 힘들었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기실 와인에 대한 추억이란 것은 와인과 그 주변의 공간의 추억이다. 어디서 누구와 마셨다는 기억의 이미지는 때때로 단순히 어떤 와인을 마셨다는 기억의 그것보다 강렬할 수 있다. 이를 인정하면, 또 소비되는 와인의 절대 다수가 레드 와인임 을 인정하면 와인의 계절은 청록의 여름보다는 순백의 겨울이다. 개인적으로도 좋았던 와인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시린 몸을 녹이고 앉아있던 바에서 知人들과 마신 와인들인 것 같다. 아마도, 많은 손님들도 그러신 것 같았다. 가을 겨울, 마고의 바와 테이블이 많이 채워져 나갔다.
이제 마고도 태어난 지 열 달을 넘기고 첫돌을 맞이할 때가 됐다. 초반기의 어려움은 잊을 정도로 이제는 많이 튼튼해진 느낌이다. 바를 운영하면서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값비싼 와인이 팔렸을 때도 아니고, 하루의 매출이 급히 올라섰을 때도 아니다 (물론, 이럴 때도 무척 기쁘지만.. 당연히.. ).
마고 식구들이 추천해드린 와인을 드시고 고객들이 기분 좋은 미소를 얼굴에 머금은 모습을 볼 때, 마고에 오신 것이 계기가 되어 할인점에 갈 때마다 와인 코너에 발길을 돌리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 참 많이 힘이 난다. 그저 와인 매니아 친구를 둔 덕에 마고에 거의 끌려오다 싶게 오신 정통 소주파 손님이 후에 부인을 대동하고 느긋이 한 잔, 인터넷 뒤져 올라왔다는 부산 와인 동호회분들이 한 치의 향이라도 흘릴까 신중히 한 잔 하시는 모습을 뵐 때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가득 담긴 와인 병 하나를 가운데 두고 테이블에 둘러 앉아 두런두런 손님들이 대화를 나눈다. 사람보다 밝은 조명을 한껏 받은 글라스와 와인 병이 따스하고 우아하게 비쳐진다. 웃음도 오가고 슬픔도 나누며 대화는 무르익고 와인 병은 비워져가고 ...
이제 와인 보다 사람이 따스해진다. 자신을 소진사키고 사람을 따스하게 만든 빈 와인 병이 바로 이때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이제 곳곳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샵과 와인 바, 레스토랑이 생겨나고 있다.
아직 와인문화가 시민들의 일상에 깊이 파고 들었다고 보긴 힘들지만, 위스키와 소주, 맥주가 점령하다시피 했던 주류문화에 이미 확실하게 딴지를 건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에 앞으로의 와인 시장이 보다 정확한 Positioning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와인이 오로지 독주문화의 대안으로만 인식이 된다면 이는 스스로 와인문화 창달의 기치를 꺽는 일일 것이리라.와인은 문화의 부분이고, 음식의 부분이고 곧 생활의 부분이라는 인식의 확대가 증가하는 와인소비시장의 행보와 발 맞추어 더디지도 빠르지도 않은 길라잡이 역할을 와인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맡아주어야 할 것이다.
On-line 와인 포털과 Off-line 와인 샵들의 제휴, 와인 수입 업체의 와인 교육기관에 대한 지원과 또 그에 따른 정당하고 적절한 마케팅 효과가 대응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근거리에서 소비자들과 만나는 와인 바와 레스토랑들은 직원들의 내실있는 와인 교육과 순발력있는 와인 리스팅, 적절한 시장가격 형성등을 통해 소비자들과 함께 하는 와인 문화 지킴이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 에필로그 }
부디 더 좋은 품질의 와인이, 더 많은 곳에서 많은 분들과 함께 하는 소망을 꿈꾼다.
대한민국이 비록 와인 생산국으로서의 자존심은 지키지 못할지언정, 와인을 사랑하고 소비하는 만큼에 있어선 세계 어느 나라 부러워 할 것 없는 힘과 경쟁력을 갖추었으면 하는 소망을 꿈 꾼다.
그래서, 나의 후배와 아들이 나와 나의 선배들의 그 것보다 더 좋은 와인을 더 많은 곳에서 많은 친구들과 연인들과 가족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꿈꾼다.
追.
이런 사적인 謝意가 가능하다면..
마고가 태어 날 때 많은 도움을 주신 엘 비노의 성미정 사장님, 음식평론가 고형욱 선생님,젤 델리의 이제춘 사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이제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마고 오픈멤버 최경성씨와 지금도 여전히 마고의 가장 중요한 축을 맡고 있는 김주현씨에게 감사 드립니다. 무엇보다, '마고가 있어 좋아' 라는 제게는 축복 같은 말씀을 던져주시는 많은 고객 여러분들게 깊은 감사 드립니다. [_마침표_]
- 와인 바 Margaux 대표 오희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