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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표

분위기가 예전과 달라졌다. IMF 이전엔 막걸리 소주 놔두고 외국 술 마신다고 핀잔 받았고, IMF 이후엔 경제사정이 힘들어 와인소비가 많이 줄었다. 그런데 요즈음 신문이나 잡지를 펴들면 꼭 한 두 코너는 와인을 다루고 있다. TV 드라마에서도 가족이나 연인끼리 외식하는 장면에는 어김없이 와인이 등장하고 심지어는 집에서까지 와인을 마신다. 모임에 나가 보아도 와인을 마시거나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 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그래서 나도 와인 한 번 마셔보려고 와인샵 문을 용감하게 두드리기 까지는 했는데, 그 진열장의 많은 와인 속에서 지레 겁을 먹고 그냥 획 돌아 나온 경험은 없으셨는지? 사실 와인 한 병을 사기 위해서 백화점의 주류 코너나 와인샵에 가도 어떤 와인을 사야하는지 선택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쇼핑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 쇼핑도 좋아하고 직접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면 더욱 큰 쾌감을 느낀다. 그 복잡한 컴퓨터도 살 수 있고, 화려한 옷가지도 주저 없이 살 수 있고, 먹거리며 반찬도 두려움 없이 골라 산다.

그런데 와인만은 예외다. 영어 선생도 와인 병 앞에서 레이블을 못 읽어 땀 흘리기는 마찬가지이며, 요리 선생도 와인의 요상한 맛을 표현하기 힘든 것은 매 한가지다. 그렇다고 돈만 믿고, "여기서 제일 비싼 것 하나 주시오!" 라고 했다간 샵 매니저의 눈총을 사기 쉽상이다.

도대체 와인이 무엇인가? 와인은 정말 낯선 것일까?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관이 와인을 이렇게 힘든 것으로 만들었을까?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과 와인에 관해서 애기하기 보다는 한 '농산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농산물, 포도주

예부터 우리는 '농심은 천심'이라고 하며 농업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 농산물을 아껴 왔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힘을 주는 음식이기에 더욱 맛있게 더욱 보기 좋게 개량하고 품질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종자를 개량하고 좋은 비료를 주고 땅의 성질을 개선한다.

농부는 봄에 돋은 여린 새 싹이 서리를 맞을 까 걱정하고, 꽃이 피어 수정기를 맞이 할 때 비가 오지 않을 까 저어하고, 열매에 보다 많은 태양볕을 쬐이기 위해 나뭇잎을 솎아 준다. 이제 수확기를 맞아 좋은 날씨를 기원하며, 풍작 후엔 하늘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이 땅의 모든 농산물을 생산하는 과정이 이렇거니와 포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똑 같은 농산물이다. 이렇게 생산된 새콤하고 달콤한 이 포도를 우리는 맛있게 먹었고, 그 맛을 좀 오래 보존하기 위해 김치처럼 발효를 시켰다. 그 과정에서 알코올이 생산되어 우리는 적지않은 '흥겨움(?)' 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들이 이렇게 포도주를 담가 드셨듯이, 외국 사람들도 똑같이 오래 전부터 포도주를 담가 마셨다.

다만, 어떤 나라들은 기후와 토양이 포도 재배에 보다 더 적합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품질 좋고 특징 있는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었다. 포도 나무는 태양이 잘 비치는 곳에서 광합성을 통해 당분을 만들고, 깊이 뿌리를 내려 땅으로부터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 올려 자기의 '개성'을 형성한다.

그래서 더운 지역에서 만든 포도주와 서늘한 지역에서 만든 포도주가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또한 석회질 토양에서 자란 포도와 화강암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포도주가 같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국광'과 '부사'의 맛과 특성이 다르듯이, 포도도 그 품종에 따라 맛과 향, 그리고 색깔이 다르다는 것까지 염두에 둔다면, 바로 여기서 지구상의 수 만 가지 다른 포도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며, 포도주 생산자는 이 포도의 특성이 잘 나타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조련사와 같다.

그러면 이 농산물인 포도주가 왜 유독 세인들의 다양한 관심을 끄는 것일까? 그 어떤 매력이 포도주에는 있는 것일까?

역사성을 가진 술, 포도주

포도주는 9000년 이상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 병 한 병의 포도주 역시 자기 역사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포도주가 갖는 큰 매력 중의 하나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포도주가 갖는 위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깊게 뿌리 박혀 있다.

포도주는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작품 중의 하나이며 각 문명마다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태초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 빵, 그릇, 의복 등과 함께 인류의 첫 생활 주변품이었다.

발효과정을 거쳐 술로 만들 수 있는 많은 과일들 중에서 포도는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특별히 사랑 받아 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포도주는 인간을 기분 좋게 하는 주요 목적 이외의 어떤 또 다른 능력과 가치를 가져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의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포도주의 두 가지 핵심적인 특성이 있다.

첫째, 포도의 품종, 토양 그리고 기후에 따라서 맛이 천차만별이라는 점. 기후, 날씨, 와인메이커의 능력, 포도 품종의 선택, 토양, 지형 등에 따라 엄청나게 다양한 와인이 생산된다.

둘째, 오랜 기간 숙성과 보관이 가능하며 특히 스스로 끊임없이 변한다는 점, 즉 우연과 자연의 산물인 이 포도주가 모든 화학변화를 거쳐 스스로 숙성되고 변화되고 보관 가능하다는 점이다.

포도주는 또한, 풍부한 역사를 지닌 하나의 맛갈스런 음식이라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재화로서 교환수단으로도 사용되는 등 물질적 가치, 문화적 가치, 상징적 가치를 가졌다.

포도주는 무역을 위한 좋은 상품으로써, 고대인들은 포도주로 귀금속이나 노예와 맞교환하였으며, 오늘날 세계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장기 보관과 자기 개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재산의 증식 수단으로서도 사용되고 있다.

삶을 다채롭게 하는 술, 포도주

서구인들에게 있어 포도주는 우리의 막걸리요 소주다. 일상의 식탁에 올라 음식의 맛을 돋구워 주며 수분을 공급해 준다. 포도주의 산과 탄닌은 생기와 신선감을 주며 지방분의 소화와 단백질의 흡수를 도와준다. 포도주는 한 입 넣어 식사와 같이 마시기에 가장 적당한 분량을 제공해 주며, 음식을 동반하기에 충분하고도 적절한 풍미를 가지고 있다.

맥주는 너무 배부르고 맛이 다채롭지 않으며, 소주는 너무 알코올이 많고 향과 맛이 단순하다. 식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음식을 소화해 낼 수 있는 볼륨감과 풍미와 부담없는 알코올량은 포도주 만이 가지고 있는 편안함이다.

더구나 포도주의 색깔과 향과 맛은 너무나 다채로워 그 자체 만을 가지고도 충분한 화제거리를 제공한다. 각 포도 품종 마다 다른 색, 그리고 그 색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색감을 즐기는 것 또한 큰 기쁨에 속한다.

그 향은 어떠한가. 100% 포도로 만들었음에도 느낄 수 있는 바나나 향과 복숭아향은 무엇이며, 버섯향과 고추내음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이 수십 가지 향이 조화롭게 연출하는 '묵은 향' (부께 Bouquet)은 또 얼마나 신기한가.

또한 각기 다른 와인을 공부하며 습득하게 되는 외국어에 대한 지식과 문화 상식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다. 다양한 문화의 산물인 포도주, 다채로운 특성을 가지고 있는 포도주는 마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준다.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술, 포도주

포도주 역시 알코올이 있으나 과음하지 않는다면, 건강과 무병장수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특별한 약이 없었던 고대나 중세 사회에서는 포도주가 소독약이자 치료제였다. 오늘날에도 성인병과 관련하여 좋은 효과를 보여 주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또한 포도주는 일단 과음하게 되는 술이 아니다. 포도주만 홀로 마시는 경우에도 그 향과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즐기며, 식사와 함께 마시는 경우엔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즐기며 천천히 마시기 때문에 말 그대로 '반주'의 선에서 끝난다.

때로 과음하여 내 건강을 해치고, 다음 날의 업무에 소홀하게 되고, 사회적 책무를 흐트러뜨리기 쉬운 것을 생각할 때 포도주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포도주를 중심으로 하는 음주문화가 부부와 가족과 사회에 '대화'를 가져 오게 되어 결국 그 사회가 건강하게 되기를 바란다. 부부끼리 그 어떤 기념일에 다정한 연인처럼 와인을 마시며 사랑을 더욱 키워보라. 온 가족이 함께 한 저녁식사 후에 새콤달콤한 부드러운 와인을 들면서 다 큰 자식들과도 허물없이 대화해 보라. 건강한 부부, 건강한 가족이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아닌가.

'와인'과 '포도주'

지난 설에 와인을 사기 위해 슈퍼마켙에 가서 와인을 고르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오시더니만, 포도주가 어디 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바로 와인 코너 앞에서!! 그래서 와인 여기 있쟎냐고 했더니 그 분 하는 말, " 아~ 와인말고 포도주 말이요!" 결국 이 할아버지는 옛날의 진로포도주 같은 설탕 탄 달콤한 포도맛 희석 소주를 원하신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와인이 차지하고 있는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본다. 일반인의 시각엔 와인은 '외국산 시큼텁덜한 포도주'를 뜻하는 대명사이다. 아직 장년층 이상의 우리 나라 사람들에겐 어머니가 담가주신 달콤한 설탕포도주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와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은 이렇게 형성이 된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맛이 이상할 뿐이다. 외국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민족적인 술이 아니다 라는 인식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직은 즐겨 마시기엔 가격이 높다. 그리고 '공부'하면서 마셔야 한다는 부담감도 한 몫 거든다.

그러나 최근의 와인 소비 형태가 3.40대 중심의 가족 소비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 서울에 국한된 현상이긴 하지만 와인 교육 기관이 계속 설립되며 일반인이 와인을 '공부'하려 한다는 점 등이 미래의 한국 와인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포석이 아닌가 한다. 때론 약간 어렵다는 것이 매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기에…

와인은 자연의 산물이다. 하늘의 태양과 대지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 포도로 만들었다. 자연은 순리가 있으며, 무리하지 않는다. 와인 한 잔에 자연의 향과 삶의 여유를 담아 보자. [_마침표_]

- 중앙대 소믈리에과정 교수 손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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