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리나 토리네제 와인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 [2]
글, 사진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이전 글콜리나 토리네제 와인 이야기[1]에서 소개한 토리노 언덕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우수함과 다양함의 저자 조반니 바티스타 크로체는, 포도를 식용과 양조용으로 구분함은 물론, 토리노 언덕에서 재배되던 포도 품종의 종류와 이름 그리고 그 어원을 기록해 놓았다: 포도송이가 익으면 땅에 떨어지는 카스카롤로Cascarolo (낙하를 의미하는casca rolo), 다 익으면 황금빛이 나는 에르바루스Erbalus(erba 빛을 의미하는lus), 귀족처럼 품격 있는 네비올Nebiol, 익은 포도의 달콤한 냄새에 새들이 쪼아먹지 않고는 못 배기는 우체리노Uccellino(새를 의미하는 uccel lino), 모스토소Mostoso(즙이 풍부하다는 뜻의 mosto so), 좋은 맛 때문에 인기가 높아 희귀해진 카리오Cario(귀하다는 의미의 cari o). 프랑스 품종인 Nereau의 이탈리아식 표기 네렛토(Neretto), 아로마가 풍부한말바시아(Malvasia), 모스카텔로 노스트랄레(Moscatello nostrale), 식용포도인 루리엔가(Luglienga, 여기서 luglio은 '7월’을 의미)와 아오스텐가(Aostenga, 여기서 agosto는 '8월’을 의미)는 두 품종이 완전이 익는7월과 8월이 품종 이름이 된 경우이다. 아바나(Avanat)와 카스타나짜(Castagnazza) 품종은 ‘노비 와인’(알코올 농도가 매우 낮고 저렴한 생산비용 때문에 붙인 이름)의 주재료였고 파술라 비앙카(Passula bianca)로는 단맛을 지닌 발포성 와인을 만들었다.
크로체의 책이야기는 여기서 접기로 하고, 저자로 하여금 와인에 대한 열정을 일깨우고 반 평생을 포도와 양조연구로 보낸 토리노와, 이곳을 300년 이상 지배하던 사보이 왕족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이탈리아 대부분의 주요와인 산지는 최소 2,000년 이상 와인을 생산한 역사를 가지는데, 고대로마의 대학자이자 관리였던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Major, AD23 ~ 79 )가 쓴 “박물지” 에 따르면 초기 토리노 도시 성립과 와인생산 시작시기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1200년경 토리노의 지정학적 위치는, 당시 프랑스 사보이주에 백작령을 확립한 후 그 세력을 넓혀가던 사보이 가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사보이가의 방계인 아카이아(Acaia) 가문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아카이아 가문의 토리노 진출은 이곳의 양조용 포도재배에 대한 이해관계를 증대시켰음은 물론, 백성들이 3대 주요식량인 빵, 고기, 와인을 언제든지 저렴한 가격에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도록 시장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와인이 주식처럼 여겨졌던 이유는, 당시 식수의 위생상태가 좋지 않아 물 대신 와인을 마셨기 때문인데, 이렇게 물처럼 마시려면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낮아야 했다.
이렇게 민중의 생활과 밀접했던 와인을 제도권 내에서 보호하려는 시도는1360년 아마데오(Amedeo) 6세부터였는데, 와인과 관련된 사기와 위조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중세시대부터 구전되어 오던 규정을 재정비해 ‘아마데오6세 법령’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중 규정 몇 가지를 살펴보면, 포도밭을 훼손시키는 자에게 손을 단절하는 형벌이 내려졌고,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는 포도밭 주인을 제외하고는 포 강 건너편의 포도밭에서 숙식하는것을 금지했다. 또한, 포도수확 계절인 6월 24일에서 11월 11일 사이에 강 건너 포도밭에 오려면 반드시 다리를 건너야 하게끔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알려진 꿀과 송진을 넣은 와인을 마시던 습관은 1400년 초기 토리노와 그 언덕 주변에도 계속되었는데, 아마데오6세의 법령에 따라, 자연적 방법이 아닌 인위적 보당을 한 와인은 불법이었고 이를 어기는 와인양조자에게는 벌금형이 내려졌다.
1599년에 쓰여진 기록에 의하면, 피에몬테를 다스리던 사보이의 군주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Emanuele Filiberto, 1528~1580) 공작이 살던 궁에는, 왕실의 와인 공급을 담당하던 소메리에리아(Someglieria)라는 관청이 있었다. 이곳에는 두 명의 소믈리에와 1~2명의 와인 공급담당자, 몇 명의 급사와 나무통 운반인이 고용되었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왕실과 귀빈을 위한 보카 와인(Vno di bocca)과, 궁에서 일하는 인력을 위한 일반 와인(Vino del comune)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또한 1547년 기록에 따르면, 궁에 있는 사람 중 오직 124명 만이 1인 당 하루 1-2리터의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여기에 요리용 와인과 왕실호송부대 소속 군인들의 배급량까지 추가한다면, 1년간 왕실에서 소비하는 와인의 양은 총160,000리터에 이른다. 이러한 대규모 와인소비를 충당하기 위해 토리노 근교의 낮은 산과 언덕에는 상당히 많은 포도밭이 조성되었고, 자연히 와인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는 늘어갔다.
포 강을 사이에 두고 토리노 시가지를 마주보는 지역은 토리노의 부유층 주택가로, 예전에는 귀족이나 중산층들의 여름 별장지로 선호되던 곳이었다. 이곳에 처음 저택을 지었던 인물은 1565년 핀고네(Filiberto Pingone)라는 Cusy 후작이었는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 때 토리노 언덕에 마련해 두었던 저택으로 피난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토리노의 귀족들과 부자들 사이에 이곳에 토지를 사들여 여름별장을 짓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핀고네 후작의 경우처럼 전염병을 피하기보다는 한가한 전원 생활을 즐기는데 있었다.
이 별장들은 필요한 식량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급자족형 농장 형태였는데, 저택에는 항상 농지가 딸려있었고 여기에 각종 야채와 과실수를 심고 남향에는 포도밭을 일궜다. 일가족이 마실 와인을 충당할 수 있는 자가양조시설을 갖춤은 물론이고, 과잉 생산되는 와인은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당시 이런 저택은, 이탈리아어로 저택을 뜻하는 빌라(Villa)보다는 포도밭을 뜻하는 비냐(Vigna)로 불렸다.
비냐(Vigna)로서의 실용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갖춘 대표적인 예로, 1600년대 중반에 지어진 비냐 델라 레지나(Vigna della Regina)가 있다. 이곳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Carlo Emanuele, 1562~1630) 1세 공작의 왕자인 마우리지오 추기경이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곳이다. 건물과 주변의 정원은 언덕의 고운 능선을 따라 상승형으로 조성되었고 이곳의 상당한 면적에 프레이사(Freisa) 포도를 심었다.
1946년 사보이 왕국의 마지막 왕인 움베르토가 사임과 동시에 포루투갈로 망명했고, 당시 피에몬테주는 물론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있던 사보이 궁들의 운명처럼, 비냐 역시 오랫동안 버림받아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5년에 이르러서야 유네스코의 지원 하에 건물과 정원의 옛 모습이 복원되었다. 특히, 정원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정원의 서쪽에 위치한 포도밭에는 1600년대식으로 프레이자 품종을 심었다.
총 0.74헥타르의 밭에 2700여 그루의 프레이자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2009년 첫 수확 당시 약 5,000여 병에 해당하는 와인을 생산하였다. 이 귀한 와인은 ‘여왕의 포도밭’이란 뜻의 비냐 델라 레지나Vigna della Regina 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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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 baeknanyou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