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리나 토리네제 와인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 [1]
글, 사진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피에몬테(이탈리아 최북서에 위치한 주)의 주요 와인산지 지도를 펼쳐보면 제일 먼저 랑게와 몽페라토에 눈이 간다. 만약 피에몬테 와인을 많이 접해 본 네비올로 와인애호가라면, 시선을 조금만 위로 옮겨서 '가티나라’나 '겜메’와 같은 조그만 마을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평소 마셔본 적이 없는 와인에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랑게-가티나라-겜메 마을을 위아래로 연결했을 때 얻어지는 직선에서 왼편으로 조금 벗어난 곳의'콜리나 토리네제(Collina Torinese)’라는 명칭에 눈이 잠시 머무를 수도 있다.(위 사진 참조)
‘콜리나Collina’는 언덕이라는 뜻이고 '토리네제Torinese’는 토리노의 소유격이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와인 이름 앞에 붙는 '콜리나’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다. 그리고 '토리네제’라는 이름을 통해 이 와인의 생산지가 토리노 어디쯤에 있는 언덕임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콜리나 토리네제가 속해 있는 서쪽과 북서쪽을 합친 면적은, 랑게와 몽페라토 그리고 일부 북동지역(겜메, 가티나라)을 합친 면적과 비교했을 때 비슷하다. 하지만, 콜리나 토리네제는 한국은 물론 이탈리아 내에서도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와인산지다.
최근 피자 가게나 슬로우 푸드를 표방하는 레스토랑의 메뉴에 자주 등장하는 “제로 km”라는 요리가 이 지역에서 유행하고 있는데, 레스토랑 근처에서 재배된 농산물만 재료로 사용하는 '무탄소, 무공해 요리’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에 비해 콜리나 토리네제 와인은 일종의 마케팅 부재로 인해, 생산되는 지역 내에서만 소비되고 있는 실정이다.
토리노는 1861년 이탈리아를 최초로 통일한 업적을 이룬 사보이 왕국의 수도였다. 덕분에 토리노 중심지인 '피아짜 카스텔로’ 광장에는 사보이왕조의 정궁, 성당, 행정관청들이 몰려있고, 광장에서 동쪽에 난 길(포 거리, via Po)을 따라 1km정도 걸어가면 피에몬테의 젖줄인 포(Po)강에 도달한다.
강 건너편은 부드러운 오르막길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부터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오는 가지들을 연상시키듯 '발 살리체(Val Salice)’ '발 산 마르티노(Val San Martino)’ '콜리나 디 칸디오(Collina di Candio)’ '콜리나 디 수페르가(Collina di Superga)’라는 각각의 이름을 가진, 해발 600m이상의 낮은 산 무리로 변한다. 이곳은1600년경 성 아구스티노 수도사들의 활약으로 포도재배 기술과 와인양조 기술이 보급되었다. 또한 1563년에 사보이공국의 새 도읍지가 된 토리노와 가까웠기 때문에, 이곳 귀족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와인을 생산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현재 이 언덕에 소재하는 28개 마을(총면적1,172,000 m2, 연간 와인생산량 621,032병)에서는 두 종류의 DOC 와인을 생산하는데, 콜리나 토리네제(Collina Torinese) DOC와 프레지아 디 키에리(Freisa di Chieri) DOC가 그것이다.이들 와인은 지방색이 강한 프레이자, 바르베라, 보나르다, 말바시아, 카리(Cari) 품종을 사용하며, 드라이한 화이트와 레드, 스위트, 약발포성, 발포성, 노벨로(이탈리아식 보졸레) 타입의 와인을 만든다.
프레이자는 네비올로의 먼 친척 뻘로, 타닌 함량이 높기로 유명해서 나무통 숙성을 거치지 않으면 혀를 마비시키는 듯한 떫은 맛을 낸다. 피에몬테에서는 약간 단맛 나는 약발포성 와인으로 즐기며, 와인잔이 아닌 물컵에 따라 마셔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드라이한 와인의 경우 투명한 루비색과 신선한 꽃 향기, 와인이 발효할 때 양조장에서 나는 향을 지니며 숙성초기라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아래 사진 왼쪽)
콜리나 토리네제 와인을 이야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감초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조반니 바티스타 크로체(Giovanni Battista Croce)가 저술하고 1606년에 첫 출판된 '토리노 언덕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우수함과 다양함 Della eccellenza e diversita dei vini che sulla collina di Torino che si fanno’이라는 제목의 책이다.(위 사진 오른쪽) 밀라노 출신의 저자는 보석세공사로 일하다가1580년경 사보이공국의 군주였던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부름을 받아 왕실의 보석세공사로 부임하면서 토리노에서 일생을 보냈다.
평소 그는 보석세공사라는 직업 외에도 포도재배와 와인양조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데, 토리노 언덕의 세 산등성이(위에서 언급한 Val San Martino, Val Salice, Val di Candia)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는 특급 포도밭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포도품종과 새로운 양조법을 실험했고 여기서 얻은 지식을 모아 위의 책을 엮었다. 이 책은 약 1000 페이지에 이르는데 몇 가지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첫 장은 네비올로 품종으로 시작한다. 현재 랑게 지역에서 주연 대접을 받고 있는 네비올로는, 토리노 언덕에서는 은퇴한 노부부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꾸거나, 농부가 반주로 마실 와인을 만들기 위해 밭 한 켠에 소량 재배하는 정도로 조연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살던 당시에만 해도 햇빛이 잘 드는 남향 밭에는 어김없이 네비올로를 재배하였다.
이 언덕에서는 네비올로를 '네비올nebiol’이라 불렀는데, 당시 귀족을 뜻하는 노빌(nobil)과 발음이 비슷한 점을 고려하면 nobil이 nebiol이란 단어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피에몬테 북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드라이한 네비올로를 마시지만, 그 당시에는 달콤한 발포성 네비올로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 저자는 당시의 관행으로 만든 네비올로를 '달고 보디감도 좋아 귀족이 마시기에 적당한 와인’이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또한 이 책에서 16~17세기에 많이 적용되던 28가지 양조법을 소개한다: 1.비노 비앙코 vino bianco(3가지), 2.그리죠grigio, 3.소트라타sottratta, 4.키아레토 chiaretto(8가지), 파시토passito(3가지, 스위트와인), 프리잔테frizzante(7가지, 약발포성 와인), 5.스키아파토 schiappato(3가지).(아래 '크로체의 저서에 소개된 양조법’ 참조).
또한 특정 포도품종의 장단점을 구분한 뒤 그에 따른 적합한 와인양조법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소스트라타sostratta(소트라타와 동일), 키아레토chiaretto, 6.키아레토 코페르토 chiaretto coperto, 뱅 드 메로니vin de melloni, 7.포스카posca(스키아파토와 유사)가 있다.
요즘은 각자의 주머니 사정과 취향에 따라 와인을 선택하지만 이 당시에는 개인 사정 외에 자기가 속한 사회적 신분도 고려해야 했다. 신분이 낮은 계층이 주로 마시던 스키아파토가 그 경우다. 이 와인은 세간에서 피퀘테piquette나 포스카posca 또는 '물로 희석한 와인acquatico’이라고도 불렸는데, 알코올 농도가 매우 낮고 저렴한 생산비용 때문에 '노비 와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탁월한 청량효과로 인해, 하층 계급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여름에 이 와인을 즐겨 마셨다.
여기서 잠시 저자가 묘사한 7.포스카 와인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발효가 막 끝난 와인을 따라낸 후 발효통 안에 남아있는 포도껍질과 효모찌꺼기는 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포도꼭지와 정해진 양의 물, 여과시킨 포도즙을 섞는데, 가끔 청포도 알맹이를 발효통에 넣어 발효 중인 내용물에 포도맛과 향을 첨가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비용은 줄이면서 와인, 아니, 포도로 만든 알코올 음료를 대량 생산했던 것이다.
크로체의 저서에 소개된 양조법
1 비노 비앙코: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2 그리죠grigio: 잘 익은 포도를 압착해서 나오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포도즙을 말함. 단맛과 기포를 내기 위해, 발효의 기미가 보일 때 즉시 다른 용기로 와인을 옮긴다. 이러한 과정을 발효가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반복함으로써 탄산가스와 단맛을 유지할 수 있다.
3 소트라타sottratta: 포도 자체의 무게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포도즙. 즉 Free-Run Juice.
4 키아레토chiaretto: ①달콤한 키아레토: 잘 익은 네비올, 모스토소, 네레토 포도를 수확한 후 땅에 널어 8일 정도 잘 말린 후 큰 나무통에 담는다. 발로 부드럽게 으깨서 나오는 포도즙을 즉시 병 모양으로 생긴 큰 나무통으로 옮긴다. 통 입구를 뚜껑이 아닌 흙으로 만든 그릇으로 덮는다. 그릇 아래로 발효 중인 와인의 부산물이 넘쳐나면 나무주걱으로 거둬낸다. 한달 후 가라앉은 찌꺼기를 걷어내고, 이로부터 한달 후 깨끗하고 청결한 나무통으로 와인을 옮기면 키아레토를 오랫동안 좋은 상태로 보관할 수 있다. ②드라이한 키아레토: 적포도를 따서 땅에 널어 건조시킨 후 큰 나무통에 넣어 발로 으깬다. 발효가 시작되면 2~3일 후에 다른 용기로 옮긴다.
5 스키아파토 chiappato: 본문에서 설명
6 키아레토 코페르토chiaretto coperto: 드라이한 키아레토와 양조방법은 같으나 이틀 정도 발효를 더 시킨 후 와인을 다른 용기로 옮긴다.
7 포스카posca: 본문에서 설명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와인을 감각기관으로 평가했는데, 와인의 색, 맛, 향 외에 탄산가스도 평가기준 중 하나였던 점이 색다르다. 또한 토리노 언덕에 살던 사람들은 대체로 로제, 스위트, 발포성 와인을 즐겨 마셨었다. 당시 와인은 대부분 도수가 낮고, 양조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장기보관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해 만든 와인은 그 해에 다 소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스위트 와인을 살펴보면, 지금은 피에몬테의 대표적인 방향성 품종인 모스카토가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풍미가 단순한 에르바루체erbaluce를 사용했다. 에르바루체는 토리노 북쪽에서 많이 재배되는 청포도 품종으로, 현재 드라이한 와인과 파시토 와인을 만드는데 쓰인다(알면 더 친근해지는 피에몬테 와인[2]참고). 크로체가 타임머신을 타고 400년 후의 토리노로 와서, 모스카토로 만든 약발포성의 달콤한 와인과 잔당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드라이한 에르바루체 와인을 마신다면, 후예들의 와인에 대한 취향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진다.
'콜리나 토리네제 와인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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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 baeknanyou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