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티보와 네그로 아마로가 전부라고?
이탈리아 풀리아의 재발견 [3]
글, 사진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발레 디트리아 VALLE D’ITRIA 지역
발레 디트리아로 안내하는 이정표들을 몇 개 지나치는 동안, 자동차 외부 온도계의 눈금은 올라가고 있었다. 수령이 70~80년도 더 될 것 같은 올리브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를 지나면서, 20세기 초 이곳에서 수확한 네그로아마로 포도를 실은 마차가 북쪽 추운 나라로 분주히 떠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침내 짙은 밤색 이정표에 쓰여진 ”네그로 아마로의 땅 Terra del Negro Amaro”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필자의 상상이 뜬금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쟌 카를로 체치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농토를 유기농 와이너리로 개조한 것은, 과거 선조들이 누렸던 '풀리아 와인의 황금기’를 복원하기 위해 풀리아 주정부와 와인생산자들이 뒤늦게나마 의기투합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들은 헥타르당 포도생산량을 과감히 줄여 품질을 개선시켰고, 포도나무 가지가 뻗게 하는 방식을 고블렛에서 귀요식 방식으로 변경했으며, 풀리아 토착 품종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동시에 국제품종의 도입도 등한시하지 않음으로써 '유럽의 블렌딩용 포도공급지’라는 불명예를 벗어 던졌다.
필자는 이곳에서, 풀리아에 대한 편견을 '과거에 한 때 있을 수도 있었던 불운’ 쯤으로 여기게 만든 와이너리 한곳을 방문했다. 프리미티보 만두리아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 중 하나인 산 마르자노San Marzano에 위치한 페우디 디 산 마르자노(Feudi di San Marzano) 와이너리가 그곳이다. 2003년에 칸티네 산 마르자노 와이너리와 파르네제 비니 와이너리가 합작하여 탄생한 페우디 산 마르자노 와이너리는, 연간 6백 50만 병의 와인을 생산하는 중대형 규모의 와이너리다. 이 와이너리는 프리미티보 품종과 네그로 아마로에 대한 독보적인 지식과 노하우에 최첨단 현대기술을 적용하여, 풀리아 남부 포도 품종의 잠재력을 제대로 표현하는 와인을 만드는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프리미티보는 드라이/로제/주정강화/스위트(파시토) 와인 스타일 등을 다양하게 소화해내는 품종이나, 산 마르자노 와이너리는 드라이와 스위트 타입만 만든다.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돌체 나투랄레(Primitivo di Manduria Dolce Naturale)’라는 긴 이름의 스위트 프리미티보 와인은 DOCG 등급을 획득하였다.
한편 산 마르자노의 자랑인 드라이한 프리미티보 와인은 짙은 벽돌색이 도는 루비색을 띠며, 처음에는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적색 말린 꽃과 과일 잼의 진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다가, 이내 카카오, 바닐라, 트러플 향기가 서서히 드러난다.
산 마르자노 와이너리를 뒤로 하고 알베로벨로Alberobello마을로 향했다.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쓴 모양의 아담한 집들을 처음에는 한 두 채씩, 그러다가 서너 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몇 개의 촌락을 지나친 후 알베로벨로에 도착했다. 이곳은 투룰리Trulli 집단가옥 유적지로 유명한데,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조차 약 1600년경의 것이며 모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가 솥뚜껑 모양이라 묘사한 투룰리 가옥의 지붕은, 하얗게 석회칠 되어있는 둥그렇거나 사각형의 구조물 위에 얹혀있다. 지붕은 얇은 석판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었는데, 위로 올라가면서 폭이 좁아지는 원뿔형이다. 꼭지점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돌조각들이 얹혀있는데, 향토학자들에 의하면 별자리나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내부에는 공간을 따로 나누는 문이나 벽은 없다. 다만, 고개를 숙여야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천정이 낮은 지점이 있는데, 이 지점이 기능이 서로 다른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다음 목적지는 오스투니Ostuni다. 오스투니로 향하는 길은, 풀리아에서도 가장 중요한 화이트와인 산지로의 여행이다. 근대까지만 해도 풀리아 와인은 오스투니, 로코로톤도, 마르티나 프랑카에서 생산된 와인을 의미했다. 생산지 이름과 와인 이름이 같으며, 풀리아의 화이트 와인 품종인 베르데카Verdeca와 비앙코 디 알레산노Bianco di Alessano로만 만든다. 로코로톤도 와인은 이 품종 외에 봄비노 비앙코나 말비시아와의 블렌딩을 허용하며, 생선과 야채가 주식인 이곳의 요리와 아주 잘 어울린다.
필자가 방문하기로 한 와이너리는 오스투니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오스투니는 서로 근접한 언덕을 따라 형성된 도시인데'백색도시(Citta Bianca)’로 알려져 있다. 도시이름에 걸맞게 모든 건물은 하얗게 칠해져 있는데, 이는 보행자 도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지나친 백색선호는, 미관보다는 더위를 피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고, 도시이름이 일으키는 환상은 투룰리로 오는 관광객을 내친 김에 이곳까지 오게 만든다.
수백 년 된 건물들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언덕정상 어딘가에 있다는 와이너리를 찾아 헤매다가 “이런 답답한 골목 사이에 와이너리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손에 쥔 종이에 써있는 Azienda Agricola il Buco di Bacco (부꼬 디 바꼬 와이너리)와 눈 앞의 문패 내용이 같은 걸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낡은 5층 건물의 1층 전체를 와이너리로 개조했는데 50평 남짓했다. 한쪽 내부에는 스테인리스 발효통과 조그만 병입 기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곳의 주인인 주제페는 손으로 열심히 라벨을 병에 붙이고 있었다. 전역군인이었던 그는,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포도밭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와이너리 일은 전혀 관심이 없고 밀라노에서 일한다고 했다. 주제페는 아들이 대도시 생활에 싫증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와 자기를 도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벽에 달린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고 있고 그 옆에는 큰 유리창이 나있는데, 그 너머로 주제페의 할아버지가 남겨준 2헥타르 정도의 포도밭이 내려다 보였다. 거기서 베르데카 품종과 봄비노 비앙코를 재배하며 한쪽 귀퉁이에는 오타비아넬로Ottavianello라는 희귀한 레드 품종을 재배하고 있었다. 생쏘(Cinsaut)를 발레 디트리아 지방에서는 오타비아넬로라고 부른다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품종이라 판매가 어렵다고 했다. 알레아티코Aleatico품종을 재배하면 팔기가 더 쉽지 않겠느냐는 필자의 의견에, 그는 할아버지가 손주같이 돌봐오던 나무들을 버리고 다른 나무를 심을 수는 없다고 했다.
식당에서 사먹는 된장찌개보다 할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가 더 구수하고 맛있듯이. 주제페가 직접 만든 와인은 정말 꾸밈없이 구수했다. 30분 남짓 지나자 와이너리 구경과 시음이 모두 끝났다. 시음비용을 지불하겠다는데 사양하자, 그렇다면 예의상 화이트 와인이라도 몇 병 사면 되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화이트 와인은 재고가 없고, 게다가 로제와 레드 와인 재고가 너무 많아 올해 생산될 와인을 보관할 장소가 부족하다는 주제페의 설명에, 필자는 어쩔 수 없이 로제와 레드 와인 한 케이스를 충동 구매하고 말았다.
오후 4시쯤, 와이너리를 찾아 올라왔던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면서 보니, 골목에 빼곡히 들어찬 집들의 창문과 문이 열려있고 그 사이로 최소한의 생필품만 갖춘 거실 겸 부엌이 보였다.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김이 뿌옇게 낀 로제 와인이 담긴 컵을 들고 열린 문 사이로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골목을 누비는 많은 관광객들이 흘낏흘낏 그들을 쳐다 보는 것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들에게 집과 집 사이를 구분하는 골목길은 마치 비좁은 거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원한 로제 와인 한잔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필자가 사는 토리노의 풀리아 이웃들이 그들이다([1]편 참조). 여행을 마치고 토리노로 돌아가면, 그들과 큰소리로 떠들면서 로제 와인 한잔 기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비록 반 강요에 의한 충동 구매였지만) 주제페의 와인을 구입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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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_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AIS 소믈리에,
이탈리아 와인 유학 및 여행 전문 기관 바르바롤스쿠올라 근무.
( baeknanyou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