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곳에서 머물면서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투어가 혼행족 사이에서 인기라고 한다. 혼행족들 중에는 휴가동안 뭔가를 배우려는 실속파 부류도 상당수라 들었다. 여기에는 육체는 휴식모드를 켜 둔 채 두뇌는 지식 충전 모드를 작동시켜 새 지식을 흡수하려는 자아실현 욕구가 깔려있다. 와인은 한적한 시골이나 산촌이 주요 산지이며 미식 문화의 산실이기도 해 이러한 휴가 풍속도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이탈리아의 심장 움브리아
움브리아주(이탈리아 중부에 소재하는 지방)와의 첫 만남은 고속도로 위에서였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려도 톨게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출구 쪽 요금정산소 직원과 실랑이 벌일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걱정은 곧 기우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출구처럼 보이는 샛길 도로를 빠져나오자 일반 국도로 이어졌다. 움브리아는 고속도로 이용료가 무료인 이탈리아 도로 복지가 쏟아지는 축복의 땅 이였다. 더 신나는 건 움브리아 도로 좌우로 청정한 녹색 들과 숲이 무한정 뻗어나가고 있었다. 푸르다 못해 눈이 녹색에 중독되어 숲과 하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숲이 끝나는 경계에는 가지런한 포도나무 열과 올리브 밭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 숲이 다시 등장했다. 주위보다 높은 언덕 정상에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마을이 솟아있었다. 움브리아는 충청북도처럼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다. 반도인 이탈리아에서 바다와 인연이 없는 곳 중 하나다. 움브리아주는 산이 주 면적의 70%, 언덕이 30% 를 차지한다. 산이 지천인 이곳에서 언덕은 평지로 취급된다. 숲의 비율이 월등히 높아 움브리아는 이탈리아의 심장으로 불린다. 사람으로 치면 심장에 해당하는 이탈리아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숲 안으로 빨려 들어간 탄소가 산소로 치환되어 맑은 산소로 되돌려 주기 때문이다.
움브리아의 녹색자연을 와인 잔에 담은 도시, 몬테팔코
움브리아가 발효해서 몬테팔코를 양조했다고 할 만큼 도시 자체가 와인이다. 몬테팔코는 와인 캘린더가 따로 존재한다. 몬테팔코의 일상이 캘린더에 씌여진 일정대로 돌아가기 때문인데 이유를 아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면 족하다.
몬테팔코에서 볼거리를 물으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추천한다. 제단 뒤의 돔을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화의 예술성 때문이다. 그림은 15세기 중엽의 것으로 12개의 테마로 이루어졌으며 각 테마는 성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묘사했다. 아시시 성 프란체스코 상부 성당의 벽화와 동일한 주제다.
제단 밑에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사그란티노 와인을 양조하던 셀라와 당시의 양조 도구들이 보존되어 있다. 사그란티노 품종이 15세기경 중동지방에서 움브리아에 전달되었다는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재빨리 사그란티노를 받아들였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성프란체스코 성당 내부의 프레스코화>
몬테팔코의 중심가 ‘피아짜 델 코무네 광장’ 바닥에는 도시의 상징동물인 매가 음각되어 있다. 곧 비상할 듯 위세가 당당한 매를 중심으로 건물들이 둥그렇게 모여있다. 시청사를 제외하고 건물은 와인 컨소시엄, 와인 레스토랑, 와인 바가 차지하고 있어 와인 관련업의 건물 입점 비율이 높다.
몬테팔코의 와인과 밀착된 삶은 백 년도 더 넘은 사그란티노 고목이 말해준다. 169년 수령의 사그란티노는 개인 집 안뜰에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그보다 열 살 더 장수한 사그란티노는 레스토랑 벽에 기대어 자란다. 이런 백 년 넘는 고목이 두 그루나 더 있다.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와이너리가 입양을 해서 돌보고 있다.
<몬테팔코 마을 보호수로 지정된 사그란티노(좌), 몬테팔코 중심가 광장바닥에 새겨져 있는 매(우)>
안토넬리 산마르코 와인 리조트의 무공해 일상
로마에서 자동차로 2시간, 아시시에서는 40분이면 안토넬리 산마르코 와인 리조트(이하, 안토넬리 리조트)에 이른다. 경내 면적이 175헥타르에 달하는 리조트는 원래는 소박하면서도 위엄 있는 빌라와 그곳에 딸린 6헥타르 내외의 포도밭에서 시작되었다. 빌라는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관할 주교의 여름 별장이었던 것을 현 소유주의 증조부가 인수하면서 안토넬리 가문 소유지가 되었다. 조부는 로마의 개업 변호사였으나 짬짬이 시간을 내어 포도밭 관리와 양조장 시설을 꾸준히 개선했다. 그의 사그란티노 와인은 품질 좋고 맛이 뛰어나 곧 좋은 반응을 얻었다.
<안토넬리 리조트의 오너, 필리포 안토넬리>
1986년 필리포가 상속자로 지목되면서 3대 변호사의 가문 전통은 끊기고 와인 가문의 길로 들어선다. 영농학 수재 필리포의 새 수혈을 받은 가업은 성장동력을 얻는다. 포도밭은 50헥타르로 확장되었고 제품 라인도 10종류로 늘어났다.
안토넬리 리조트 안에서 이뤄지는 와인과 연계한 휴식 투어는 이를 향유하는 것으로 움브리아 문화의 문턱을 가뿐히 넘을 수 있다.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전원 숙소 아그리투리스모, 움브리아 쿠킹 클래스, 그리고 안토넬리 와이너리 방문과 테이스팅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휴식이 앎이고 앎이 곧 휴식이다.
리조트 안에 살고 있는 생물은 유기농과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다. 포도, 올리브가 자라는 밭과 숲이 사이좋게 리조트 공간을 나눠 가진다. 숲이 많은 이유는, 땅이 무한정 곡식을 낳는 생산자란 편견에서 벗어나 동식물의 거주지라고 보는 생물 복지와 맥을 같이한다.
<포도밭에 설치된 돼지 우리>
리조트 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식품은 BIO라벨을 달고 있다. 제초제나 농약의 살포를 겪어본 적 없는 식물들이 자력으로 병충해 침입을 막아낸다. Dibium협회의 원칙 아래 현대와 전통적인 농법을 조화롭게 활용해, 농장 안의 모든 생물은 지속적 영농방식으로 자란 안심 먹거리들이다.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으로 사육되는 염소, 포도나무 밑을 뒤뚱뒤뚱 걸어가는 거위, 포도밭 한가운데 설치된 우리에서 꿀꿀대는 돼지는 안토넬리 리조트의 무공해 일상이다.
유기농 와이너리
<안토넬리 와이너리 경내에 있는 빌라, 몬테팔코 주교의 여름 별장을 개조한 빌라>
와이너리 경내는 대문이나 철창이 없다. 포도밭 경계를 따라 늘어선 올리브 가로수를 걷다 보면 영화에서나 봄 직한 신전 문 앞에 다다른다. 안토넬리 와인의 로고에 인쇄된 바로 그 건물로 와이너리 입구다. 가로수 끝에는 아담한 테이스팅 룸 건물과 주교의 여름 별장을 개조한 빌라가 보인다. 와이너리 경내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단출한 모양새다. 하지만 발 밑에는 매년 30만 병이 탄생하는 양조와 숙성실을 두고 있다.
안토넬리의 모든 와인은 테이스팅 룸 문지방 언저리에 나있는 개폐 가능 구멍에서 시작된다. 양조 전 과정은 물의 흐름인 낙하 원리를 축으로 하여 움직인다. 과학용어로는 ‘중력 이동’ 으로, 수확한 포도는 구멍과 연결된 파이프를 따라 지하 1층에 설치되어 있는 제경기와 압착기로 흘러 간다. 여기서 불필요한 껍질과 불순물이 제거된 포도즙은 똑같은 방식으로 지하 2층의 발효용기로 낙하한다. 이렇게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대로 포도 이동을 맡기면 기계식 펌프로 이동할 때보다 포도의 아로마 손실을 상당히 막을 수 있다.
다양한 크기의 오크통이 자리 잡고 있는 보타이아 내부에 들어서자 돌장승처럼 우뚝 서있는 토기 항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와인이 양조학의 발달로 세련됨을 갖추기 이전의 본래 맛으로 회귀를 돕는다는 암포라다. 안에 으깬 트레비아노 포도를 몇 개월간 놔두면 흙의 성분과 작용을 해 과거의 맛이 우러난다. 사그란티노 와인에 끓인 소고기 스튜, 오래 숙성한 페코리노 치즈, 리조토와 잘 어울렸던 ‘안테프리마 톤다’ 화이트의 선명하고 굵은 캐릭터의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 이 글은 움브리아를 마신다 [2부] 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