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4일 그린자네 카브루 콜렉션 Open Day 를 맞아 스테파노 라이몬디(좌)와 안나 슈나이더(우)박사가 콜렉션 안내를 맡았다>
양부모를 만나 입양되길 희망하는 고아처럼 입양을 고대하는 포도가 있다. 그린자네 카브루 콜렉션(Collezione di Grinzane Cavour, 이하 GC콜렉션)은 다양한 이유로 버려진 포도를 보호하는 일종의 포도 보육원이다.
GC콜렉션은 요즘 화이트 트러플 축제가 한창인 알바(Alba)에서 멀지 않다. 바롤로 이정표를 따라 남서방향으로 10km 가다 보면 도달하는 그린자네 카브루 마을에 있다. 4천 5백 평에 달하는 공간에 5백 여 종의 품종을 수집해 놨다. 보유목의 가치가 높아 2014년 그린자네 카브루 일대가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될 때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한다.
좀 떨어진 곳에서 보면 콜렉션은 주변의 포도밭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오게 된 사연은 고아들처럼 제 각각이다. 농부들이 돌보지 않아 버려진 포도, 수확량이 적어 수지에 맞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포도밭에서 뽑혀 오갈 데 없는 포도를 모아 놓았다. 고문서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희귀 품종도 있다. 희귀품종이 콜렉션 목록에 오른 건 품종 단종을 막자는 목적도 있지만, 유전자를 분석해 데이타 뱅크에 저장해 두면 과학 커뮤니티와 지식교류가 발생하는 부수적 효과를 얻는다. 상당수는 북이탈리아 토착품종이며 프랑스, 독일, 스페인에서 보내진 것도 여럿이다.
GC콜렉션의 3분의 1은 와인 양조에 적합한 품종으로, 실제로 생산자들이 입양해 와인 양조에 성공한 예도 적지 않다. 요즘 바롤로 생산자들이 크뤼 밭 한 모퉁이를 내어 재배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나셰타 품종이 그렇다. 로쎄세 비앙코(Rossese Bianco)와 감바 디 페르니체(Gamba di Pernice)는 오래전에 “피에몬테주 양조 적합 품종 등록부”에 올랐고 원산지 보호 등급(Langhe Rossese DOC, Carosso DOC)에 지정될 정도로 저변 확대가 이루어졌다. 최근에 등록부에 오른 바라투찻, 슬라리나, 말바시아 모스카타, 몬타네라는 상품화에 성공했다. 일부 와인 마니아들이 기존 와인 맛에 식상한 틈을 파고든 틈새시장이다.
<GC콜렉션에서 보호하던 일부 품종은 와인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몇 개의 와인은 출시되자마자 완판된다고 한다>
GC콜렉션은 올해로 탄생 27주년을 맞이했다. CNR(이탈리아 리서치 위원회) 산하 IPSP(지속가능한 식물보호 연구원) 의 안나 슈나이더 (Anna Schneider) 박사와 포도 분류학 전문가인 스테파노 라이몬디(Stefano Raimondi) 팀이 시작한 ‘GrapeRescue’ 프로젝트의 성과다. 4천5백 평에 이르는 포도밭은 9백 개의 악세션(accenssions)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획(plot)이라고도 하며, 한 개의 악세션마다 다섯 그루가 식수되어 있다. 필록세라에 면역이 있는 대목 뿌리에 이식된 묘목만 식목 했다. 포도가 열리는 덩굴손은 에스팔리어(espaliers) 형태로 잡아주어 고품질의 포도를 원하는 수만큼 성장하게 했다.
지금은 와인 생산자의 관심 밖이지만 충분히 양조 적합성과 상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10여 개의 품종은 따로 구분해 악세션을 배정했다. 악세션은 70~80 그루를 기본으로 하며 일반 악세션(5그루)보다 밀도가 높은 것은 와인 양조에 필요한 최소량을 확보하는 데 있다.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시음한 결과는 품종 데이타 뱅크로 보내진다. 뱅크 안에 테이스팅 자료가 충분히 쌓이고 상업목적 양조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위에서 언급한 이탈리아 주(州) 정부 양조 적합 품종 등록부에 신청할 수 있다.
GC콜렉션은 포도 품종 유전자 분석 및 보존, 신진대사학 , 바이러스, 양조학 등 다양한 과학분야와 연계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양조학 및 포도 품종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도 와인의 과거와 현재 여행을 단시간 내에 끝낼 수 있어 와인 역사 박물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러면 GC콜렉션이 보관하고 있는 특이한 품종 몇 종류을 둘러보자.
<저명한 원예학자가 쓴 서적에 묘사된 비짜리아 품종>
비짜리아 (Bizzarria)
19세기 갈레시오(Giorgio Gallesio)가 쓴 과수 원예학( Pomolgy)에도 언급되어 있다. 백여 년 전 유럽 포도밭에서 사라진 품종을 식물학자들의 끈질긴 추적 끝에 다시 되찾았다. 원산지가 프랑스이며 Tressot Panache 적포도의 돌연변이다. 한 그루에 적포도와 청포도가 공존한다. 포도알은 검은색인데 흰 줄이 나있거나 알의 반은 녹색인데 반은 흑색인 경우도 있다. 안토시아닌 색소 부족과 색소 퍼짐 이상이 일으킨 자연의 조화다. 포도잎 색깔도 포도와 닮는다. 청포도 주위는 녹색잎이, 적포도 주위는 붉은색 잎이 자란다.
우바 델 메트로 (UVA del Metro)
십자군 전쟁 때 중동에 갔던 이탈리아 군인들이 들여온 품종이다. 뜻은 1미터(Metro) 포도(Uva). 다 자란 송이의 길이가 무려 70 cm 나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다산 품종이며 과거에는 농부의 살림에 보탬이 된다고 하여 ‘희망의 포도(uva della promessa)’라 불렸다.
루리엔가 (luglienga)
14세기 유럽에서 흔히 재배되던 청포도다. 이탈리아어의 7월인 루리오(luglio) 가 어원이다. 7월에 완숙하기 때문이다. 혹독한 추위에 잘 견디는 품종으로 기후변화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미래의 포도로 촉망받고 있다. 서늘한 알프스산에서 재배 숙성한 루리엔가 와인을 만나는 것이 먼 미래의 일은 아닐 듯하다.
파슬리 샤슬라
잎 사이에 숨어있는 포도만 아니면 영락없이 이탈리안 파슬리로 착각 될 만큼 닮았다. 식용보다는 주로 관상용으로 재배된다. 샤슬라 품종과 친적 지간이며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테이블 와인으로 사랑받고 있다.
아리칸테 분솃 (Alicante Bunschet)
잎과 줄기, 포도알도 붉은색을 띤다. 안토시안 색소가 풍부해서 과거에는 색소가 부족한 레드와인의 색을 더 붉게 하려고 넣었다. 소량만 넣어도 염색력이 탁월하다. 산미가 낮고 향기의 품질이 낮아 피에몬테 등급 와인(DOC) 양조에는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적포도 과육은 무색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칸테 분솃 품종의 과육은 붉은색이라 염색력이 탁월하다>
비티스 비니페라 (Vitis Vinifera)
포도의 조상으로 유럽과 서아시아 숲에서 자라는 야생 포도다. 재배용 포도는 보습과 투수성을 적당히 갖는 뽀송뽀송한 땅에서 자란다. 하지만 포도의 조상은 습한 땅이나 웅덩이를 좋아한다. 도시 확장으로 숲 면적이 줄어들자 GC콜렉션에 보내졌다.
암수가 한그루에 열리는 일반 포도와 달리 비티스 비니페라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떨어져 자란다. 포도가 열리지 않는 수나무와 달리 암나무는 포도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암술에 꽃가루가 제대로 묻지 않아 알의 크기가 부실하다. 알은 작은데 씨를 품고 있어 포도알 대비 과육 비율이 낮아 와인 양조에는 적당치 않다.
<비티스 비니페라, 수나무(좌)와 암나무(우)>
흔히 이탈리아는 토착품종의 박물관이라 불린다. 토착품종의 종류와 수는 조사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5백~ 7백 여종으로 추정된다. 양조적합 등록부에 올라 상업화 문턱에 성큼 다가선 품종까지 감안하면 박물관 부속건물 증축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의 맛을 되찾으려는 GC컬랙션 수호자들의 토착품종 애착이 있기에 우리는 이탈리아 와인에 싫증을 느낄 새가 없다.
Thanks to Prof. Anna Schneider for the precious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