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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난영 Baek Nan Young (baeknanyoung@hanmail.net)
AIS(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 과정 1,2,3 레벨 이수 후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이탈리아 와인투어 전문기관 바르바롤스쿠올라(BARBAROL SCUOLA)를 운영하고 있다. 베를린 와인 트로피 심사위원이기도 한 백난영은, 이탈리아 와인 및 와인 관련 문화, 행사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와인 관련 전문 통/번역가, 랑게와인 앰버서더(Langhe Wines Ambassador)로도 활동 중이다.
Certified Professional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l President of Barbarolscuola, specialized in Italian Wine & Gastronomic Tour l Columnist of Korean Online Wine Magazine l Member of Judging Panel at: The International Wine Award Mundus Vini, International Wine City Challenge, Emozioni Dal Mondo, Portugieser Du Monde l Blogger l 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l Awarded as Best Foreign Journalist for Roero Wine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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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마 마을의 테라쩨. 한 층의 테라쩨를 만드는데 50년이 걸린다.
 
 
이탈리아에서는 험난한 자연환경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포도를 재배해 온 산지를 일컬어 “영웅적 포도재배 지역viticultura eroica”이라 부른다. 이러한 영웅적 포도재배 지역은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네 군데가 존재하는데, 북이탈리아 알프스 산자락에 소재하는 카레마 마을과 발텔리나 계곡, 티레네 해안에 접한 아말피 해안과 친퀘테레가 그것이다. 산과 바다라는 극과 극의 장소에 위치한 이 지역들은, 험한 불모의 돌산을 젖과 우유가 흐르는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킨 인간승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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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퀘테레(Cinque Terre, 리구리아 주에 위치)의 테라쩨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유산이기도 하다.
 
 
이 네 지역의 공통점은, 작물을 재배할 평지가 부족해지자 거대한 암석이 허옇게 드러난 바위산을 그 대안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즉, 깊숙이 박혀있던 암석을 부수고 파낸 공간에, 광주리나 앞치마에 담아서 날라온 평지의 흙을 채워 넣어 밭을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로 자른 돌덩이를 가장자리에 쌓아서, 만에 하나 폭우에 흙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대비했다. 이 때, 돌덩이들은 최대한 결을 맞추어 쌓았기 때문에 시멘트같은 접착제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처럼 퍼즐 맞추듯 돌을 쌓아 만든 벽을 무렛티 아 세꼬(muretti a secco)라 부르며, 이 벽이 산등성이를 따라 수직 또는 수평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테라쩨(terrazze, 계단식 경작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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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렛티 아 세꼬. 퍼즐처럼 쌓아올린 돌벽
 
 
북피에몬테가 끝나고 발레 다오스타(Valle d’Aosta) 주의 관문이 시작되는 곳에서 테라쩨를 만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카레마(Carema) 마을 입구를 지나 돈나스(Donnas) 마을을 지날 때 스쳐가는 7.6 km 정도의 길이다. 이 길은 해발 평균 1000m의 낮은 알프스 봉들을 좌우에 두며 그 사이로 흐르는 도라 발테아(Dora Baltea) 강의 좌안에 위치한다. 몽블랑에서 발원한 도라 발테아 강은 포(Po) 강 합류 지점까지 총 168km를 굽이치며 흐르며, 이 강이 지나는 좌, 우안에 포도밭이 조성되어 있다.
 
사실 카레마와 돈나스 마을의 테라쩨는, 테라쩨 자체보다는 네비올로를 재배하는 독특한 방식인 페르골라(pergola)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돌과 회반죽을 섞어 만든 피룬(pilun) 기둥 꼭대기에 나무 가지를 바둑판 모양으로 얼기설기 엮어 지붕을 얹으면(이런 구조를 이곳에서는 투피운(tupiun)이라 부른다), 이 나무가지 지붕을 따라 네비올로가 자란다. 그리고 이렇게 묵직한 돌 기둥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테라쩨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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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룬 기둥에 나무가지 지붕을 얹은 투피운에서 네비올로가 자란다.
 
 
한편, 이곳은 북위 46도에 위치해 있어 네비올로가 자랄 수 있는 북방 한계선이기도 하다.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는 높은 산이 뒤에 버티고 있고 태양빛을 반사하는 강이 흐르고 있지만, 바람은 날카롭고 시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기상조건 때문에 네비올로는 10월 중순 이후에나 완전히 익는데, 이 기간 동안 밤기온이 급속히 떨어져 포도가 얼어버릴 여지가 다분하다. 다행히 피룬 기둥이 낮에 열을 흡수했다가 밤이 되면 그 열기를 발산해 포도가 별 탈 없이 익게 하는데, 기둥이 태양에 많이 노출될수록 이러한 열교환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쯤 되면 짐작하겠지만, 카레마와 돈나스 마을에서 자라는 네비올로는 랑게 마을의 완만한 포도밭과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네비올로와 대조를 이룬다. 랑게의 네비올로 와인은 탄산칼슘이 풍부한 석회석 땅의 단단함과 조밀함에 적응한 Lampia, Michet, Rose 클론의 산물인 반면, 카레마와 돈나스의 네비올로 와인이 지니는 미네랄 풍미와 섬세함은 알프스의 거대한 빙하 덩어리가 운반해 쌓아놓은 모래땅에 적응한 CVT308와 CVT423클론의 표현이다.
 
이곳 사람들은 네비올로를 “포도알이 작고 부드럽다”는 뜻의 피쿠텐드로(picutendro)라 부르며, 와인은 사과산 함량이 높아 산미가 강하고 타닌 함량은 낮지만 안토시안 색소가 적다는 점에서 네비올로와 유전적 특징을 공유한다. 최소 25개월로 규정되어 있는 와인의 숙성기간은 타닌의 강도를 조절하기 보다는 산미를 부드럽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또한, 네비올로를 85% 이상 사용하도록 규정함으로써 네비올로의 맛과 향을 온전히 보존하게 하고, 네렛또(neyret)나 프레이사(freisa) 같은 토착품종을 소량 첨가해 색과 향을 보완할 수 있게 하였다.
 
5.jpg ▲카레마 리제르바 와인(가운데)과 카레마 마을의 기본급 와인(오른쪽)
 
 
매해 생산되는 기본급 와인의 이름에는 생산된 마을의 이름이 사용된다. 단, 기상조건이 뛰어나 포도가 특별히 잘 익은 해에는 카레마 리제르바(최소 48개월 숙성 규정) 또는 돈나스 수페리오레(최소 31개월 숙성 규정) 와인을 생산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돈나스 마을에서는 잘 익은 포도만 선별한 후 90일 이상 건조시켜 와인을 만들기도 하는데, Donnas Vieilles Vignes라 불리는 이 와인은 그 풍부한 풍미 덕분에 “알프스의 아마로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숙성 초기에는 투명한 루비색을 띠다가 대형 보테(Botte, 나무통)에서 숙성을 거치면서 알코올의 뜨거움이 스며나는 짙은 적색으로 변한다. 기본급 와인에서는 장미, 제비꽃, 후추, 졸인 과일 향이 나며 리제르바와 수페리어 와인의 경우 감초, 담배, 가죽, 바닐라, 카카오 향이 달콤한 알코올 냄새와 어우러져 은은하게 올라온다. 타닌은, 숙성기간과는 무관하게, 혀를 조이지 않고 부드럽게 적신다.
 
돈나스 마을에는 26헥타르의 포도밭에서 연간 15만 병의 와인을, 카레마 마을에서는 17헥타르의 포도밭에서 연간 7만 5천 병의 와인이 생산된다. 각 마을의 포도밭은 약80명의 농부들이 소유하고 있는데, 와이너리 한곳이 소유하는 포도밭의 면적이 수십 헥타르에 달하는 숫자개념에 익숙한 와인애호가에게는 동일한 면적의 포도밭을 80명 이상이 나눠 가진다는 것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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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나스 마을의 와인(사진 출처 www.vdamonamour.it)
 
 
이렇게 포도밭 면적당 농사인구가 많은 이유는, 땅을 자식들 머릿수대로 나누어주는 상속관습 때문이다. 이런 관행은 땅의 세분화와 농가수 증가를 가져왔고, 고작 몇 평방미터의 포도밭을 소유한 농가에게 포도농사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두 마을의 농부 160여 명은 수확한 포도를 협동조합에 팔았고, 조합은 포도를 선별하여 와인을 양조하고 판매하는 역할을 맡았다.
 
단일 포도밭에서 단일 품종으로 고품질의 와인을 소량 생산하는 것이 추세인 요즘, 여러 곳에서 재배한 포도를 섞어서 만든 와인은 뭔가 부족하고 흠이 있는 와인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네비올로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특정 클론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이곳의 농부들은 불모지를 개간한 테라쩨에서 포도를 기르고 협동조합과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포도재배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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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레마와 돈나스 와인은 포도재배자 연합인 협동조합에서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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