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23일 랑게-로에로-몽페라토(이하 랑게) 지역이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록되었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랑게 지역이 유네스코 목록에 오른 것은 이탈리아 유산으로는 50번째이지만 와인과 관련된 유산로서는 처음이다. 지도에서 유네스코에 지정된 지역을 살펴보면, 알레산드리아군, 아스티군, 쿠네오군에 소재하는 29군데 도시이며 총 면적은 10,789헥타르다.
▲ 6개의 핵심지역(진 분홍색)과 주변의 완충지대(연분홍색)
유네스코에 등록된 지역은 여섯군데의 핵심지역(core zone, 1)랑게 바롤로 2)그린자네 카브루 성 3)바르바레스코 언덕 4)바르베라와 니짜몽페라토 5)모스카토 스푸만테와 카넬리 6)몽페라토 인페르노)과 완충지대(buffer zone)으로 나뉜다.
핵심지역 1), 3), 4), 5)는 이탈리아 대표와인과 그 와인의 탄생지가 짝을 이루고있다. 각 핵심지역의 와인은 토양, 기후, 토착품종의 우수성, 와인생산 과정과 와인 판매망, 와인 & 미식 투어 활성화 등의 자연, 문화, 인간적인 요소가 상호작용해서 낳은 공동작품이다.
또한, 바롤로 와인의 첫 실험이 이루어졌던 장소이자 현재는 유럽최대의 와인용 포도 실험실로 바뀐 그린자네 카브루 성(2)), 몽페라토(6), Monferrato) 지역에 흔한 칸토니(Pietra da Cantoni) 암석 같은 자연조건을 와인저장시설인 인페르노(infernot)로 활용한 민간의 지혜 역시 랑게가 유네스코에 선정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위의 여섯 개의 핵심지역은 100여 개 마을의 76,000 헥타르에 달하는 완충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완충지대는 각 핵심지역의 특징을 완충지대 경계까지 확장시켜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랑게-로에로-몽페라토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은 이곳 와인의 몸값을 올리고 관광객 수를 늘리는데 한몫하여 이곳 주민들에게는 낭보이지만, 숙박 및 식비가 덩달아 올라 관광객 입장에서는 진정 희소식일지는 의문이다. 또한 유네스코 축제분위기로 들떠있는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동일한 품종으로 비슷한 특성을 지닌 와인을 생산하는 피에몬테 북부 사람들이 겪고 있을 심리적 격리감도 갑자기 궁금해진다.
피에몬테의 주도인 토리노에서 북동 방향으로 92km 정도 떨어진 곳에 비엘라(Biella)군과 노바라(Novara)군이 있다. 이곳에서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네비올로 와인을 만들어왔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랑게의 네비올로 와인에 필적하는 복합적 향기와 보디감이 높고 장기숙성에 적합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탈리아 와인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곳을 편의상 ‘북피에몬테 네비올로 지역’이라 부른다.
스위스에서 넘어오지않는 한 북피에몬테에 가려면 유럽최대의 쌀 생산지인 파다나 논을 통과해야 한다. 거대한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이곳에서는 이탈리아 연간 쌀 생산량의 절반(24만톤)이 생산된다. 알프스 산만 빼면 한국의 논과 경치가 흡사해, 마치 타국에서 “작은 한국”을 보는 기분이 든다.
북피에몬테의 네비올로 품종 재배지역은 행정상으로는 비엘라(Biella)군, 노바라(Novara)군, 그리고 일부 베르첼리(Vercelli) 위성도시가 해당된다. 광활한 논의 지평선이 끝나고 프레 알프스(prealpi: 알프스 산 이전의 지역)가 시작되는 일련의 낮은 언덕이다. 와인지도에서는 비엘라군과 노바라군 경계를 흐르는 세시아(Sesia)강 좌우에 위치한 47개의 마을로 표시되며 두 곳의 포도밭 면적은 총 200여 헥타르다.
세시아강은 몬테로사 산(Monte Rosa)에서 발원되는데 이 산은 북피에몬테 네비올로 재배지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알프스 산맥의 주요 산봉우리 중 하나이며 해발 4633m로 몽블랑(4810m) 다음으로 높다. 몬테로사는 ‘분홍(rosa)’과 ‘산(monte)’의 합성어로, 아침에 먼동이 틀 무렵 햇빛이 비추면서 산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다.
▲몬테로사
북피에몬테 지역은 ‘소(小) 몬테로사’로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50만년 전까지 빙하기와 간빙기(두 빙하기 사이에 끼어있는 기후가 비교적 온난하고 빙하가 고위도 지방까지 물러가는 시기)가 네 번 있었는데, 간빙기 때마다 몬테로사를 덮고 있던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왔다. 얼음덩어리가 내려올 때마다 각종 퇴적물이 함께 실려왔고 이것이 반복적으로 쌓여서 지금과 같은 낮은 언덕을 만들었다.
이방인에게는 ‘소 몬테로사’라는 표현이 약간의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토양 검사 결과 화강암, 반암, 운모편암, 사문석, 돌로마이트, 각석암 등이 몬테로사의 그것과 일치해 과장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이곳 토양은 철 성분 때문에 갈색을 띠며 땅 표면에 자갈이 많다. 그리고 광물 성분이 풍부하고 산도가 매우 높지만 석회석 함량은 낮다.
세시아강 왼쪽에는 가티나라(Gattinara), 브라마테라(Bramaterra), 레쏘나(Lessona) 마을이 있고 각각의 마을에서는 마을이름과 일치하는 와인을 만든다. 강의 우안에는 보카(Boca), 겜메(Ghemme), 시짜노(Sizzano), 파라(Fara) 마을이 있고, 좌안과 마찬가지로 와인이름과 마을이름이 같다. 양쪽 마을 모두 네비올로 품종의 함량(90%~50%)이 높은 와인을 생산하며 생산자의 재량에 따라 우바라라(uva rara), 베스폴리나(vespolina), 크로아티나(croatina)의 토착 적포도 품종을 섞는다.
가티나라와 겜메 마을에서 네비올로를 90% 이상 섞어 만드는 와인은 DOCG등급으로 지정되어 있고, 그보다 함유량이 낮은 와인(브라마테라, 레쏘나, 보카, 시짜노, 파라)은 DOC등급이다. 네비올로에 소량 섞는 토착품종을 따로 양조해서 만드는 드라이한 레드 와인(Rosso)과 토착 청포도 품종인 에르바루체만 사용해서 만든 화이트 와인(Bianco)은 각각 콜리네 노바레시(Colline Novaresi) DOC와 코스테 델라 세시아(Coste della Sesia) DOC와인으로 불린다.
▲북피에몬테 네비올로 와인
북피에몬테 지역은 한반도의 최북단 지점인 온성군(위도 43도)보다 3도 정도 더 북위에 위치해 있는데, 이에 불구하고 기후에 예민한 네비올로를 재배할 수 있는 것은 멀지않은 곳에 마조레(Lago Maggiore) 호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조레 호수는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212평방 킬로미터)로 크고 저수 용량이 370억 톤에 달해, 알프스의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발생하는 급격한 온도차를 줄여주는 거대한 자연 온도조절기와 같다.
▲마조레 호수(http://commons.wikimedia.com)
몬테로사 산과 인접한 데서 오는 또 다른 이점은, 봄과 늦가을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개가 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른 아침 몬테로사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평지의 습기를 없애기 때문이다. 포도가 안개 속에서 익는다거나, 두텁게 낀 포도껍질의 과분이 마치 안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안개를 뜻하는 nebbia가 네비올로로 변했다는 랑게식 어원 해석은, 따라서 북피에몬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대신 북피에몬테에서는 네비올로가'한 뼘’을 뜻하는 스판나(spanna)로 불린다.
북피에몬테의 네비올로 와인은 가띠나라와 겜메 와인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롤로 와인을'랑게의 가띠나라 또는 겜메 와인’으로 정의하는 북피에몬테인들의 강한 자부심과도 상통한다. 이들은 바롤로 와인은 불과 200년 전에 탄생했으나 가띠나라와 겜메 와인은 로마 시대 때부터 존재했다고 말한다. 또한, 바롤로가 1840년대 카를로 알베르토 왕이 벌인 궁정외교 덕분에 그 명성이 높아졌다면, 가띠나라와 겜메 와인은 이미 16세기 초 유럽대륙을 호령하던 스페인의 까를로5세 왕이 마셨다는 기록을 내세워 바롤로 보다 3세기나 앞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음을 주장한다.
겜메 와인과 관련된 일화도 꽤 많다. 1860년대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왕을 도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한 카밀로 벤소 카브루 수상은 겜메 와인을 마신 후 이렇게 극찬했다.
“겜메 와인은 부르고뉴 와인과 경쟁할 만큼 우수하며 겜메 와인생산자들이 부르고뉴 와인생산자들과 경쟁에서 이기려면 와인의 풍부한 맛과 우아함을 유지하는 데만 신경 쓰면 된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혹독한 병을 치뤘던 환자에게 최상의 회복제로 음용되었던 겜메 와인은, 최근 심장병 예방에 좋은 레스베라트롤 함량이 높은 것으로 밝혀져 “건강에 좋은 와인”으로 주목 받고 있다.
한편, 가띠나라에 소재하는 총 95헥타르의 포도밭에서는 연간 4600헥토리터의 가띠나라 와인이 생산된다. 이 와인은 네비올로를 90% 이상 사용하며 소량의 베스포리나(4% 이하) 또는 우바라라(10% 이하) 품종을 섞기도 한다. 숙성기간은 최소 3년이며 그 중 2년은 나무용기에서 숙성시킨다. 숙성 초기에는 짙은 루비빛이 돌며 숙성되면서 오렌지 껍질 색이 도는 영롱한 루비색으로 변한다. 제비꽃, 블랙베리, 라즈베리의 달콤한 향기, 버섯향, 다양한 향신료 향은 숙성과 함께 에테르, 가죽, 타르의 부케로 변한다. 강한 산미 때문에 타닌의 맛이 두드러지지만 멋진 조화를 이루며 약간의 쓴맛이 혀에 남는다.
겜메 와인을 만들 때는 네비올로를 75% 이상 사용하며 베스폴리나와 우바라라를 15% 이하로 섞는다. 와인은 최소 24개월간 숙성되는데 그 중 18개월은 나무용기에서, 6개월은 병에서 숙성한다. 숙성을 마친 와인은 짙은 루비색이지만 숙성될수록 주홍빛 도는 루비색이 난다. 제비꽃, 감초, 각종 향신료 향이 나며 적절한 산미와 강한 타닌이 조화를 이루며 짭짤한 맛과 쓴 맛이 긴 여운을 남긴다.
북피에몬테는 지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포도를 재배하는데, 마조리나(maggiorina)로 불리는 이 방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마조리나 방식은 알레산드로 안토넬리의 재치가 발휘된 결과물로, 그는 철근과 콘크리트를 쓰지 않고 벽돌로만 지은 168m의 ‘몰레 탑’(토리노 소재)을 설계한 건축가로 유명하다.
▲마조리나 방식으로 심어진 네비올로
마조리나 포도재배 방식은 포도나무 주위에 바깥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네 개의 말뚝을 박는데서 시작한다. 각 말뚝은 철사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데 이 철사를 타고 포도나무의 가지들이 자란다. 그리고 한쪽 말뚝이 기울어지려 하면 반대쪽 말뚝이 반대방향으로 잡아당기기 때문에 포도나무와 주위의 말뚝은 大자 모양으로 평형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렇게 뻗어나간 가지에서 자란 포도는 태양에 최대한 노출되는 효과를 누린다. 150년 전 벽돌만으로 168m 높이의 탑(Mole Tower, 아래 사진)을 만들었던 천재 건축가의 지식이 포도재배에까지 온전히 응용된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