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된 몬페라토 언덕. 루케, 모스카토, 브라케토 같은 아로마가 두드러지는 와인의 산지로 유명하다. 그래서 아로마 언덕이란 별명으로도 알려졌다>
와인의 향을 맡으면 금방 식별되는 향기들이 있다. 이렇게 직관적인 향을 발산하는 와인을 “아로마틱 하다”고 표현한다. 대표적인 아로마 품종은 모스카토, 말바시아, 게브르츠트라미너, 브라케토를 들 수 있다. 이 품종들은 1백여 개가 넘는 테르펜 화합물로 이루어진 자연방향제군이란 공통점을 지니며 샐비어, 이끼, 장미, 서양배, 복숭아, 라벤더 향을 발산한다. 테르펜은 포도 껍질에 몰려있으며 포도가 와인으로 상태변화를 일으켜도 향기는 변함이 없다. 예를 들어 으깬 모스카토 향기는 동일한 포도로 만든 와인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향기가 일치한다.
향기의 강도와 종류는 아로마 품종에 못 미치지만 희귀성만으로 존재감을 충분히 발휘하는 세미 아로마 품종이 있다. 글레라,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뮐러 트루가우, 실바너, 카베르네 소비뇽이 여기에 속한다. 포도 아로마 외에도, 와인이 완성될 때까지 단계마다 발생하는 2차 향이 부케의 다양성에 기여한다. 알코올 발효 중에 포도즙과 효모가 서로 반응해서 생기는 발효 부케가 그 예다. 또한 자란 곳의 자연환경도 향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뉴질랜드의 소비뇽 블랑은 풀잎, 잔디, 후추 등의 신선한 향이 특징이나 북이탈리아의 소비뇽 블랑은 여기에 바질, 패션프루트의 개성이 보태진다.
이탈리아 세미 아로마 품종을 알아보도록 하자. 말바시아, 모스카토 등 향기가 생명인 아로마 품종은 발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스푸만테 양조방법을 선호한다. 반면 세미 아로마 품종은 적당한 바디와 향기의 복합성도 겸비하고 있어 젊은 드라이 와인으로 인기가 높다. 이런 품종들로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것이 루케, 나스체타, 펠라베르가 피콜라가 있다. 이들 와인을 맛 본 한국인이 극소수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마시길. 이탈리아에서도 이제 막 데뷔한 와인이라 현지인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북이탈리아 피에몬테주 토착품종으로 포도밭에서 거의 사라질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온 전력을 가지고 있다. 위기의 원흉은 20세기 초 이탈리아 포도밭을 황폐화시킨 필록세라 벌레지만 손이 많이 가는 것에 비해 수익이 적어 농부들이 방치한 데도 책임이 있다.
몬페라토의 돈 페리뇽, 돈 카우다 덕분에 빛을 본 루케Ruchè
사멸 위기에 처했던 루케를 구한 이는 돈 자코모 카우다 수도사(Don Giacomo Cauda, 이하 돈 카우다 수도사)다. 돈 페리뇽 수도사가 샴페인을 발명한 것처럼, 루케 품종은 돈 카우다 수도사가 발견해서 그를 몬페라토의 돈 페리뇽이라 부른다.
1970년대 말 돈 카우다 수도사가 카스타뇰레 디 몬페라토에 발령받아 부임한다. 포도농부 출신인 수도사는 품종 지식이 해박했는데 어느 날 성당 관할 포도밭을 가꾸다가 우연히 가시덤불 속에 버려진 루케를 발견한다. 이 품종을 가꾸어 와인을 만들었는데 맛과 향기가 놀랍도록 좋았다. 곧 루케를 복구하기로 결심한 그는 자비를 들여 1헥타르의 포도밭을 구입해 4천 개의 루케 묘목을 심었다.
수도사는 루케의 회생과 보급에 전념을 다하느라 성직 생활 대부분을 포도밭에서 보낸 것을 유감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 미안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신은 나를 용서할 것이다. 와인으로 얻은 이익은 예배당 건축과 복원에 사용했다”.
돈 카우다의 헌신은 와인 생산자들의 귀에 들어갔고 인근의 생산자들도 루케를 심기 시작했다. 1987년에 루케 와인은 DOC 원산지 보호를 받게 되었고 2010년에는 DOCG급으로 격상했다. 현재 DOCG급에 등록된 밭은 7군데 마을 190 헥타르에 이른다. 루케 와인의 90%는 21군데 와이너리가 생산하며 2020년에는 96만 병을 생산했다.
<루케 디 카스타뇰레 몬페라토 와인 산지는 아스티에서 북쪽으로 9km 떨어진 곳에 있다. 사진출처 www.destinazionemonferrato.it>
루케 와인의 정식 명칭은 루케 디 카스타뇰레 몬페라토(Ruchè di Castagnole Monferrato)다. 카스타뇰레 몬페라토는 수도사가 루케를 발견한 시점에서 복원, 상업화 등의 밑작업이 이루어진 도시다. 2014년 포도밭과 농촌 경관의 아름다움, 토착품종 보존 등 와인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랑게, 로에로 지역과 더불어 유네스코 자연유산에도 등재되었다. 모스카토 다스티와 바르베라 다스티 와인으로 알려진 아스티에서 북쪽으로 9km 떨어져 있다.
루케가 지닌 아로마와 레드 와인의 특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포도 유전자 분석의 일인자인 CNR연구소의 안나 슈나이더 박사팀은 유전자 마커( 종이나 개별개체수를 구별할 수 있는 염색체상의 특정 유전자 서열) 기술을 이용해 조상 염색체를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 해독한 염색체를 그린자네 카브루 콜렉션("과거의 맛을 되찾는 토착품종 수호자들" 글 참조)에 저장된 유전자 데이터 뱅크와 대조했더니 크로아티나(croatina)와 말바시아 아로마티카 디 파마(Malvasia aromatica di Parma)의 교잡종임이 밝혀졌다. 즉, 루케의 아로마는 말바시아에서, 바디감과 타닌은 크로아티나에서 왔다. 크로아티나는 북이탈리아산 품종으로 드라이 또는 약발포성 타입의 와인을 만든다.
루케 와인은 수확한 지 4~5개월 후면 시판되며, 규정상 바르베라나 브라케토 품종을 최대 10% 내에서 블랜딩을 허용하지만 대부분은 루케만 사용한다. 보통 레드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14도를 넘으면 맛이 묵직하고 목넘김이 뜨겁다. 그러나 루케는 산미가 뛰어나 의외로 알코올 느낌이 덜하고 바디감도 적당하다. 작년에는 리제르바 타입이 승인을 얻어 2020 빈티지부터는 복합적이며 깊은 맛이 선보일것으로 기대된다.
루케는 여름철 와인으로 권하고 싶다. 타닌은 저온이면 떫고 쓴 맛이 두드러지는데 루케 타닌은 순해서 타닌 맛 감퇴를 일으키지 않는다. 딸기나 향신료 계열 아로마는 저온과 만나면 청량감에 날개를 단다.
피에몬테주는 2백만 년 전까지만 해도 바다와 육지이기를 반복했다.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위치한 지브롤터 해협이 막히면 지중해 해수가 증발해 육지가 드러났다가 해협이 열리면 다시 지중해로 채워졌다. 이 사이 해저에 쌓인 동식물 사체는 성분변화를 일으켜 석회암이 된다. 지중해가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해저가 높은 순으로 융기했는데 이것이 피에몬테주 언덕을 낳았으며 몬페라토 언덕군은 최근(2백만 년 전)의 것이다. 이후 간빙기에 알프스에서 떠내려온 미사, 모래, 자갈이 석회암에 섞이면서 기반암을 이룬다. 북쪽은 알프스가 버티고 있고 리구리아 해가 멀지 않아 기후가 온후하며 연강우량은 600~700mm 정도다.
대부분의 루케는 루케 와인 와이너리 협회(Associazione Produttori del Ruche’ di Castagnole Monferrato DOCG)에 소속된 21군데 와이너리가 제조한다. 지난 10월 8일 협회가 주관하는 온라인 시음회가 열렸는데 이날 선보인 8종류 와인은 다음과 같다.
<좌측부터 가로네 바시오&필리, 칼데라, 페라리스 와이너리>
Ruchè di Castagnole Monferrato DOCG 2020
(가로네 바시오 & 필리 Garrone e Vasio & Figlio와이너리)
2020빈티지. 알코올15.5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했다. 딸기, 장미, 정향 , 흙, 계피, 향신료 향기를 은은하게 피운다. 향기에서 알코올의 더운 기운이 베어나오나 입안에서는 강도가 덜하다. 산뜻한 산미와 순한 타닌 맛이 잘 어우러지고 발랄한 느낌을 낸다.
Ruchè di Castagnole Monferrato DOCG Prevost 2020
(칼데라 Caldera 와이너리)
2020 빈티지. 알코올 14.5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 짙은 루비색이 돌며 홍차, 장미, 계피, 딸기, 주니퍼 베리향이 화사하다. 타닌 결이 부드럽고 산미와 좋은 밸런스를 이룬다. 달콤한 과일향이 입안에 퍼진다.
Ruchè di Castagnole Monferrato DOCG Clàsic 2020
(페라리스 Ferraris 와이너리)
2020빈티지. 알코올 15도. 54헥토리터 오크통에서 6개월 숙성. 장미, 제비, 체리, 딸기, 카시스 등의 우아한 향기를 연이어 피운다. 계피, 정향의 매콤한 여운이 남는다. 산미가 생동감 있고 타닌 결이 매끄러우면서도 긴장감을 준다. 촘촘하고 밀도 있는 구조가 완성도를 높인다.
<좌측부터 몬탈베라, 아메리오 리비오, 프레디오마뇨 와이너리>
Ruche’ di Castagnole Monferrato DOCG Laccento 2020
(몬탈베라Montalbera 와이너리)
2020빈티지. 알코올 15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 짙은 루비색을 띠며 딸기, 핑크 장미, 라즈베리, 제비 향이 만발한다. 과일 향기에 이어 백묵, 후추, 흑연 향기가 채워진다. 타닌이 순하고 산미도 적당해서 식감이 뛰어나다. 입안에 도는 싱그러운 과일 풍미가 매혹적이다.
Ruchè di Castagnole Monferrato DOCG Primordio 2020
(아메리오 리비오 Amelio Livio 와이너리)
2020빈티지. 알코올 14.5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 딸기, 라즈베리, 커피, 넛맥, 허브, 백묵, 잔디, 백후추 향기가 은은히 퍼진다. 전체적으로 발랄하고 상큼한 뉘앙스를 준다. 산미가 다소 두드러지나 질감이 매끄럽다.
Ruchèdi Castagnole Monferrato DOCG 2019
(프레디오마뇨 Prediomagno 와이너리)
2019빈티지. 알코올 14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 흑연, 정향, 계피, 축축한 숲 내음, 가죽, 낙엽향을 발산한다. 2년 숙성했지만 원숙한 향기를 내는 것으로 보아 숙성이 빠른 편이다. 산미의 청량감이 뛰어나며 과일 내음이 입안 가득 퍼진다.
<칸티네 산타가타, 테누타 몬테마뇨 와이너리>
Ruchè di Castagnole Monferrato DOCG Nobilis 2018
(테누타 몬테마뇨 Tenuta Montemagno 와이너리)
2018빈티지. 알코올 15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 루비색이 찬란하며 말린 장미, 정향, 블랙베리, 체리, 금속 , 커피, 유칼립투스, 계피의 복합미가 뛰어나다. 구조가 섬세하며 빈틈없이 채워져 있어 몰입도를 높인다. 산도와 타닌 밸런스가 잘 잡혔으며 질감이 매끄러워 목넘김이 좋다 .
Ruchè di Castagnole Monferrato DOCG Pro Nobis 2018
(칸티네 산타가타 Cantine Sant’Agata 와이너리)
2018빈티지. 알코올 15도. 대형 오크통에서 1년 이상 숙성. 블랙베리, 후추, 홍차, 정향, 페인트, 체리, 홍차향이 잘 어우러져 있다. 오크향과 흑연 향의 여운이 길다. 풀보디의 무게감과 구조가 견고하다. 타닌 결이 매끄러우며 산도와 균형감이 선사하는 원숙미가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