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베네토주 동부 모타 디 리벤자 마을. 포도밭과 와인 밖에 모르던 전 발렌티노 팔라딘 회장은 양조장을 개업한다. 양조장 설립 동기는 팔라딘 회장의 신념과 맥을 같이 한다. 미래는 가족, 땅, 전통문화 같은 베네토인 의식 저변에 흐르는 믿음을 딛고 서야 확고해진다는 신념이며 이는 체계성이 입혀진 후 경영철학으로 거듭난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늘어나는 제품 라인에 대한 통제와 좀더 효율적인 경영 틀을 잡아 줄 구심점이 필요했다. 양조장은 까사 팔라딘의 전신으로 남았고 새 본사는 안노네 베네토 Annone Veneto로 이전한다.
1년 후면 환갑을 맞이 하는 까사 팔라딘은 창업주의 직계손인 카를로와 로베르토 형제 구조로 움직이고 있다. 팔라딘 가문은 성장기 초반에는 베네토주 동부 와인에 집중했으나 사세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자 시선을 외부로 돌린다. 창업주의 신념을 녹여낼 수 있는 제2, 제3의 와인 산지로 진출했고 현재는 까사 팔라딘 아래 5군데 계열사 와이너리를 두고 있다. 각 와이너리마다 개별 브랜드를 창출했으며 지역성이 잘 표출되는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다섯 가지 브랜드는 아래와 같고 15종류의 와인이 한국시장 문턱을 넘었다.
<까사 팔라딘 홍보 영상. 영상에는 그룹을 이끌어가는 2세대 팔라딘 형제와 미래 오너가 될 3세대가 등장한다. 이어 그룹 내 다섯 개의 브랜드와 이 브랜드를 개발한 와이너리를 소개하고 있다>
팔라딘 비녜 에 비니
Paladin Vigne e Vini
까사 팔라딘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봤으며 지금도 꾸준히 생산되고 있는 롱런 와인들이다. 이 브랜드는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동 베네토주와 서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주 와인이 주력 아이템이다. 이곳 지층을 수직으로 자르면 점토와 석회토 단면이 드러나는데 마지막 빙기인 뷔름 빙기에 알프스에서 떨어져 나온 빙퇴석이다. 이 토양은 국제 품종과 토착 품종에 잘 맞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이콘 와인으로는 팔라딘 시라, 팔라딘 드라고 로쏘, 피노그리조, 프로세코 밀레지마토 엑스트라 드라이며 한국에도 수입되고 있다.
<왼쪽부터 팔라딘 프로세코 밀레지마토 엑스트라 드라이, 팔라딘 시라, 팔라딘 드라고 로쏘, 팔라딘 피노그리조>
이 지역은 포스투미아 가도(Via Postumia)에 놓여있다. 기원전 148년, 로마시대 집정관인 포스투미오(Spuvico Postumio Albino Magno) 지휘 하에 건설된 로마가도다. 리구리아 제노바에서 출발한 가도는 서에서 동쪽으로 관통하다가 아드리아해 연안도시 아뀌레이아(Aquileia)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대 플리니오(AD 23~79년)가 쓴 박물지는 당시 팔라딘 가족 포도밭이 속해 있던 지역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포도밭이 광활해서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여기서 나온 와인을 가득 실은 배가 로마로 향한다”.
일설에 따르면 게르만족 대이동 때 훈족이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위협을 느낀 이곳 주민들이 베네치아로 도망간 것이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보스코 델 메를로
Bosco del Merlo
브랜드 콘셉트는 우아함과 고급스런 이미지의 부각이다. 와인이 생산되는 산지의 공기는 서늘한 알프스의 기운이 서려있고 아드리아 해의 염분이 배어있다. 포도나무 뿌리는 빙하와 강이 쌓아 놓은 단단한 퇴적토를 뚫고 뻗어나간다. 산과 바다를 머금은 독특한 풍미는 베네치아 귀족들을 열광시켰고 곧 베네치아 공화국 공식 와인으로 간택된다. 최근에는 베네치아 DOC, 리손 프리마조레 DOC 와인 원산지로 지정되었고 프로세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피노 그리조, 리볼라 잘라, 베루두조 와인이 주종을 이룬다.
브랜드가 주는 고급스런 이미지는 품종에 맞는 토양은 따로 있다는 다년간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먼저 토양 특성별로 밭을 구분한 뒤 단위별로 적합한 클론 후보군을 선발한다. 유전자 선별과 증식을 반복한 뒤 최종 클론을 얻는다. 이렇게 선별한 클론은 화이트 품종이라도 수령이 50년이나 된다. 화이트 품종은 밤에 수확하며 수확시기는 일률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동일한 밭이라도 여러 번에 걸쳐 거둬들인다.
<2020년 9월에 처음 출시한 보스코 델 메를로의 프로세코 Brut 로제 와인>
합리적인 포도재배 Reasoned Viticulture와 4V
여기서 잠시 팔라딘 가족이 자연을 보는 따뜻한 시선을 살펴보자. 보스코 델 메를로가 출범하기 전만 해도 가족의 화두는 기반 구축과 성장이었다. 그러다 포도밭은 생태계를 이루는 요소이며 생물 다양성과 소비자, 자연건강과 맞물려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합리적인 포도재배다. 자연을 닮은 와인을 추구하지만 좀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끌어가겠다는 의도다.
원래 보스코 델 메를로는 시범 브랜드로 출발했다. 생산 단계별로 환경 파괴의 여파를 감소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모의 농법을 실험과 검증을 통해 반복했다. 이렇게 얻은 성과를 그룹 내 150여 헥타르 밭에 확장했다.
합리적인 포도재배는 4개 분야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를 4V 라 한다. 4V는 와인Vino, 포도Vite, 녹색Verde, 생명Vite 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첫자를 딴 것으로 주요 성과는 다음과 같다.
정밀 농업(Precision Agriculture)
인공위성이 보내온 이미지를 분석해 포도 수세(vine vigor)와 포도 성장 상태를 분석해 포도 지도를 작성한다. 이 자료를 분석해 포도밭을 세분한 뒤 비료주기, 전정, 포도송이 솎기의 최적기를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원이나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기계사용 횟수나 인위적 간섭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아황산가스 사용량 50%대 이하로 감소
포도는 수확하는 순간부터 산화될 위험에 노출된다. 이때 포도를 탄산가스로 포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해 산화를 막거나 아로마 손실에 대비한다. 이런 식으로 까사 팔라딘은 아황산가스 첨가량을 이탈리아 허용량보다 50% 넘게 감축하는 데 성공했다(참고. 이탈리아 규정상 아황산가스 최대 허용량은 1리터당 150mg , 화이트는 1리터당 200mg).
탄소 저감 농법 도입
핫이슈로 떠오른 이산화탄소 저감 기술에 그룹 차원의 지원이 몰리고 있다. 이탈리아 와이너리로서는 첫 번째로 포도밭에 온실가스 측정기를 설치했다. 또한 이탈리아 50여 개 기업과 함께 OIV 프로토콜에 적합한 탄소배출 측정기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프레미아타 파토리아 디 카스텔베끼
Premiata Fattoria Di Castelvecchi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와인을 들라면 끼안티 클라시코는 탑 5에 꼽힐 정도로 영향력 있는 브랜드다. 2004년에 팔리딘 가족은 10세기에 축성된 카스텔베끼오 성을 인수한다. 성에 딸린 포도밭은 해발 고도 500~600미터에 걸쳐 있으며 일교차가 크게 벌어져 인근 포도밭 중 열매가 가장 늦게 익는다. 팔라딘 가족은 인수 당시 밭에서 연도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산조베제 클론을 발견했다. 이 클론을 복원하기 위해 레 마드리Le Madri란 묘목장을 따로 설치했다. 끼안티 클라시코 와인은 선별된 문화재급 산조베제로 만들었으니 세기를 뛰어넘는 감동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팔라딘 가족은 밭을 돌본다고 하지 않고 산조베제 한그루 한그루를 보살핀다고 한다.
<끼안티 클라시코 DOCG 까포톤도 & 끼안티 클라시코 DOCG 리제르바 로도라이오>
카스텔로 보노미
Castello Bonomi
까사 팔라딘은 초창기부터 프로세코 와인으로 인지도를 키워왔다. 2008년도에 프란차코르타에도 뛰어들면서 샤르마 방식은 물론 샴페인 방식에도 정통한 스푸만테 하우스로 올라선다. 카스텔 보노미는 19세기 말에 지어진 성으로 건축 당시 유행하던 리버티 양식을 본 따 지었다. 인수 당시 지하실만 개조해 양조장을 들였고 건물 형체는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고풍스러운 멋이 살아있다. 밭은 몬테오르파노 산을 등지고 있고 이제호 호수를 앞에 두는 배산임수형이라 경치도 뛰어나다. 9종의 프란차코르타와 쿠르테프란카 코르데리오 레드와인이 나온다. 레드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카베르네 프랑크, 쁘띠 베르도를 따로 오크 탱크에서 발효한 후 바리크에서 16개월 추가 숙성했다.
<쿠르테프란카 DOC 코르데리오>
까사 루포
Casa Lupo
브랜드 중 제일 늦게 합류한 막내다. 말린 포도로 만들어 와인에 중후한 맛이 배어나는 아파시멘토 양조법의 결정판인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와인이다. 반세기 넘는 팔라딘의 와인 내공에 비춰볼 때 아마로네 진출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복합적인 풍미, 섬세함과 우아함과 마주하면 ‘늦음’은 단지 숫자적 개념일 뿐, 와인에 감동을 선사하기 위한 기다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발 450 미터의 바스티아 디 몬테끼아 디 크로사라 Bastia di Montecchia di Crosara 밭에서 자란 코르비나, 코르비노네, 론디넬라를 9월 중순에 수확해 자연건조장으로 옮긴 후 3달의 아파시멘토를 거쳐 알코올 발효한 뒤 대형 오크통에서 24개월 숙성했다.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DOCG>
<프란체스카 팔라딘 팀장이 포도의 시간(Il Tempo della Vite)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있다>
지난 6월 25일 까사 팔라딘은 포도의 시간(Il Tempo della Vite)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본사에서 열린 미디어 간담회에서 프란체스카 팔라딘 마케팅팀 팀장은 프로젝트의 목표는 와인 체험 공원 설립에 있다고 밝혔다. 또한 포도가 와인이 되는 신비로운 여행에 탑승하려면 그저 시간여행을 가볍게 즐기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공원부지는 까사 팔라딘 본사 입구에 자리 잡은 1헥타르 넓이의 녹색공간을 십분 활용할 예정이다. 청사진에 따르면 공원은 과거 공간과 기술 공간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베네토주의 포도재배 역사실과 베네토주 전통 포도 수형 실물에 배정될 예정이다. 후자는 지속적인 포도재배를 위한 하이테크 농업 기술관이 들어설 거다. 지하에는 토양과 여기에 공생하는 미세동식물 전시공간이 마련될 예정이다. 빠르면 내년에 일부 전시장( 묘목에서 포도나무가 되기까지 테마관) 입장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