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레차 와이너리의 트로이카. 파올라,시빌라, 안젤라 자매. 라 레차는 여성이 오너인 와이너리가 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다>
이탈리아 해안가에 가면 상록 참나무 숲이 눈에 많이 띈다. 참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참나무는 라틴어로 Quercus Ilex, 영어로 Holm Oak라 하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년 내내 잎이 지지 않는다. 성장 속도는 느리나 일단 다 자라면 수 백 년 장수한다. 이탈리아 곳곳에서 수령이 오래된 상록 참나무가 발견되고 있는데, 최고령은 시칠리아 에트나 산 자페라노 마을에 있으며 무려 7백 살 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탈리아에는 신생아가 태어나면 별탈 없이 자라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상록 참나무를 심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다 큰 나무는 키가 20~28미터 정도에 둘레가 4~5미터나 되는 장신이다. 목질이 단단하고 오래 타서 장작으로 인기가 높은데 100kg당 가격이 12~15유로로 일반 장작보다 2~3유로 더 비싸다. 상록 참나무의 도토리는 쓴맛이 덜해(현지인은 달다고 표현한다) 밀가루와 섞어 빵과 케이크를 만든다. 그러나 나무 자체는 타닌 함량이 높아 방금 잘라낸 나무에 못을 꽂아두면 몇 시간 후에 표면이 퍼렇게 변색된다.
티레노 해안에 접한 토스카나에 지금 같이 울창한 상록 참나무 숲이 우거진 데는 역설적으로 전쟁의 공로가 컸다. 토스카나 중세 후반을 피바다로 적신 피렌체와 시에나의 군사충돌은 숲 생태계를 무너트렸다. 피렌체의 승리로 전쟁은 일단락되었으나 숲 훼손이 심각해 승자와 패자가 함께 복구책을 고민해야 했다. 숲 회복의 원칙은 토스카나 전통 경관을 보존하되 농민의 수익과 직결되는 올리브 나무, 상록 참나무, 포도나무 심기에 우선을 두었다. 상록 참나무의 큰 키는 방풍에 유리했고 무성한 가지는 티레노 해풍을 가두는 데도 탁월했다. 건조하고 햇빛이 따가운 토스카나 여름 들녘에 습기를 내뿜는 고마운 나무가 아닐 수 없다.
<아파시토이 건조장에서 트레비아노 토스카노와 말바시아 포도를 널어서 말리고 있다. 3개월 말린 건포도로 빈산토 델 끼안티, 수아 산티타 Sua Santita’를 만든다>
1970년대, 바뇰리 가족에게 걱정거리가 생겼다.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아이들 마음에서 자연이 멀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다 못한 가족은 피렌체 서부 몬테스페르톨리Montespertoli 마을에 있는 빌라를 구입하기로 한다. 빌라는 상록 참나무 거리란 뜻의 라 레차La Leccia라 불리었으나 이름만 거리지, 빌라와 이에 딸린 20헥타르 밭이 전부인 외진 산골이었다.
바뇰리 가족은 이탈리아 젤라토 시장의 20%를 점유하고 있는 삼몬타나 그룹의 오너가족이다. 1948년 창립한 삼몬타나 젤라토가 모기업이며 원통 아이스크림과 콘 아이스크림의 히트에 힘입어 이탈리아 제과업의 큰 손으로 등장했다. 이탈리아내 바에 유통되는 냉동 크로와상의 40%가 삼몬타나 제품이며 트레 마리에 파네토네를 계열사로 두고 있다.
빌라는 외관상 전원주택인데, 딸린 농장에서 경작한 농작물의 가공 시설을 갖춘 자급자족 농가였다. 가족은 농장관리를 외부인에게 맡겼는데 2013년 어느 날 파올라 바뇰리는 농장 관리가 허술하고 농작물이 방치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때 파올라는 농장 원상복구 계획을 세우고 와이너리로의 전향을 모색한다.
<라 레차의 로고>
파올라가 꿈꾸는 와이너리의 이상향은 로고에 함축되어 있다. 나무 그림자가 호수에 비친 듯한 이미지는 상록 참나무에서 영감을 얻었다. 풍성한 아름드리 나무와 그 아래 나무 키만큼 자란 뿌리는 강인함과 용기를 상징한다. 두 나무를 연결하면 숫자 8을 얻는데 이는 영원과 윤회사상을 상징한다.
라 레차는 세명의 자매가 이끄는 트로이카 와이너리다. 파올라, 시빌라, 안젤라가 각가 사무와 마케팅, 홍보를 전담한다. 남동생 로렌조와 가브리엘레 가덴즈가 양조팀을 이끌고 있다. 가브리엘레는 34세 이하의 유능한 와인메이커를 선발하는 Premio Gambelli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다. 아트 디렉터는 조각가 마르코 바뇰리가 담당하며 무형태의 와인 개성을 예술 작품으로 시각화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제 첫걸음을 내디뎠으나 세 자매는 서두를 건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상록 참나무처럼 와이너리 체질을 대기만성형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라 레차의 핵심 제품은 유기농 와인과 버진 올리브유다. 20헥타르의 밭 중 8헥타르를 차지하는 포도밭에는 산조베제, 트레비아노, 시라, 메를로를 재배한다. 농장에는 3천5백여 그루의 올리브가 재배되며 저온 압착한 올리브유는 다 수의 품질경연대회에서 입상했다.
2019년에 포도밭은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해충의 암컷 향을 피워 수컷을 유인해 포살하는 성페르몬제 유인 PVC 캡슐을 설치해 농약사용을 줄였으나 환경폐기물 양이 되려 늘어나자 사용을 중단하고 충전식 스프레이로 대체했다. 또한 농장 곳곳에 설치한 벌통을 통해 환경오염 정도를 모니터링한다. 꿀벌은 환경이 오염되면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기 때문에 천연 환경오염 측정기로 알려졌다.
양조기기 규모에도 다이어트를 감행했다. 대형 발효조나 오크통 사용을 중단하고 한동안 버려졌던 소형용기를 재가동시키고 있다. 밭 단위별로 수확한 포도는 양조장에 입고되는 순서로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므로 몇 개의 큰 사이즈 보다는 다수의 작은 사이즈 일수록 양조 동선을 축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루베도 비노 스푸만테 메토도 클라시코 파 도제
Rubedo Vino Spumante Metodo Classico Pas Dosè
붉은색을 뜻하는 루베도 Rubedo라는 이름은, 납이 금으로 바뀌는 결정적 순간을 표현하는 연금술 용어에서 빌려왔다. 바뇰리 가족이 심혈을 기울인 와인임을 우회적으로 나타낸다. 산조베제 쿠베를 36개월 병 숙성했다 . 양파 껍질색이 돌며 버블 크기는 미세하며 줄기는 지속적이다. 장기간 효모와 숙성했으나 빵, 버터향보다는 장미, 제비꽃 아로마가 또렷하다. 산미는 청량감이 뛰어나며 균형이 잘 잡힌 구조가 완성도를 높인다 .
트레비아노 토스카나 IGT 칸타그릴로 2018
Trebbiano Toscana IGT Cantagrillo
칸타 그릴로는 귀뚜라미 노래란 뜻이다. 프리울리 화이트 와인을 벤치마킹해서 그런지 북 이탈리아 정취가 녹아있으며 와인메이커의 정성이 묻어난다. 늦수확한 트레비아노 토스카나를 저온 착즙 한 뒤 알코올 발효했다. 발효한 와인의 반은 여러 사이즈(100~225리터)의 나무 용기(아카시아, 오크통)에서 4개월 숙성, 나머지는 스테인리스 용기에서 효모와 접촉하면서 6개월 숙성했다. 바닐라, 버터 브래드, 열대과일, 골든 사과 등 달콤한 향을 퍼트린다. 월계수 잎, 타임, 라벤더 향이 이국적인 정취를 선사하며 아몬드 여운이 감칠맛을 더한다. 아삭한 산미가 돋보이며 질감이 매끄럽다.
끼안티 수페리오레 Docg 비네아 도미니 2019
Chianti Superiore DOCG Vinea Domini
점토와 자갈이 골고루 섞여 배수성이 뛰어난 갈레스트로 토양에서 왔다.알코올 발효한 와인을 7~8개월간 효모를 접촉한 상태에서 숙성했다. 어린 산조베제의 순수함 그 자체다. 장미, 라즈베리, 자두, 체리, 제비꽃 향이 터지며 매콤한 후추, 정향의 향이 뒤따른다. 산미가 경쾌하며 과일향이 입안을 화사하게 감싼다. 떫은맛은 적절하며 단단한 구조감이 돋보인다.
빈산토 델 끼안티 DOC 산티타 2005
Vin Santo del Chianti Sua Santita’
트레비아노 토스카노(80%), 말바시아 델 끼안티(20%)를 블렌딩해서 만든 스위트 와인. 짙은 밤색이 돌며 주변은 오렌지빛 섬광이 비친다. 커피, 밀크 초코릿, 캐러멜, 호두, 아카시아 꿀 향이 진하다. 달콤한 곶감, 무화과 향과 감초 향이 어우러진다. 알코올의 열기가 가슴을 훑으며 짭짤한 맛이 단맛을 강조한다. 벨벳 같은 감촉이 입안을 감싸며 견과류 향이 구수한 맛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