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모지오니 달 몬도 와인 경연 대회 직전에 한 심사원의 머리에 GSR 전기피부 반응기를 부착하는 장면. 음악을 틀어 논 가운데 심사원의 마음에 발생하는 6대 기본 감정을 감지하는 실험이 진행됐다>
미래의 와인은 어떨까? 개인의 기호 및 취향, 감정상태는 수시로 변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덕을 부리는 와인의 비위를 맞춰 줄 와인의 존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인의 미래를 다룬 영화는 다음 세대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영화 데몰리션 맨이 가정한 2032년의 지구는 청결, 질서, 첨단기술로 압축된 지상세계와 무질서, 비위생, 폭력의 지하 세계로 이분되어 좌충우돌한다. 지상세계는 완벽해 보이나 그 안의 지구인은 천재 과학자의 두뇌가 짜 놓은 유리 감옥에 갇힌 채 기본 욕망은 억압을 받는다. 음식은 생존을 위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영양소만 뽑아내 제조한 알약 음식은 소화불량이나 식중독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퇴출시켰다. 병균에 전염될까 봐 신체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주인공 남녀는 모자처럼 생긴 헤드 기어를 쓰고 사이버 접촉을 통해 성욕을 해소한다.
이쯤 되면 데몰리션 맨이 펼치는 가상세계 속에서는 와인이 알약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음이 마냥 허무맹랑한 가정이 아닐 수도 있다. 현재의 지구인이 와인에 열광하는 이유 중에는 행복감과 만족감 고양, 스트레스 해소 같은 감정처리에 있다. 그렇다면 긍정적 감정만 활성화하는 성분만 추출해 만든 알약 와인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내추럴 와인에서 슬픔이나 공포 조절에 탁월한 성분을 빼낸 알약이 와인 냉장고 모퉁이를 꿰찰 수도 있다.
이탈리아 피사 대학교 뇌심리학과 연구팀이 다년간 진행 중인 실험 프로젝트는 알약 와인이 상상 속의 현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실험의 핵심은 와인 종사자와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7종류의 레드와인을 시음하게 한 다음 이들의 감정이 일으키는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다.
일단 피실험자들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감지하기 위해서 전기 피부 반응기 GSR(Galvanic Skin Response) 기술을 사용했다. GSR은 데몰리션 맨의 주인공들이 사이버 섹스를 즐기려고 썼던 헤드 기어보다 구조가 훨씬 단순하며 피 실험자의 손가락 검지와 중지에 부착한 전극과 연결되어 있다. 전극 사이는 한 방향으로 전류가 흐르는데 일단 감정 변화를 감지하면 일정하던 전류가 미세한 파동을 일으킨다. 여기서 감정 변화란 것은 와인이 우리의 오감과 접촉하는 순간 감정이 느끼는 기분을 여섯 개의 감정으로 표현한 거다. 여섯 개의 감정이란 일명 6대 기본감정으로 에크만이 정립한 공포, 분노, 슬픔, 행복, 혐오, 놀라움을 말한다.
실험에 따르면 변질된 와인을 마시면 우리의 뇌는 분노, 공포, 슬픔 같은 부정적 감정을 감지한다. 반면 행복과 놀람 같은 긍정적 감정은 줄어든다. 향기의 강도가 짙으면 행복과 놀라움은 상승하고 슬픔과 분노감은 낮아진다. 과일향이 감정에 일으키는 위력은 향기롭다 못해 파격적이다. 마음은 행복감과 놀라움으로 충만해지고 혐오, 슬픔, 공포 지수는 극감한다. 구조의 완성도가 높고 밸런스가 좋은 와인은 슬픔이나 분노 수치를 떨어트린다. 흥미로운 것은 오크향이 진한 와인은 호불호가 엇갈린다는 점이다. 와인 향기에 익숙한 와인 종사자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이 차오른 반면 일반 소비자는 행복, 놀라움 같은 긍정 에너지로 채워졌다. 따라서 오크향이 일부 와인업계 종사자들한테는 부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요소지만 현실적으로는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매력적인 향수임이 재확인된 셈이다.
와인과 감정의 관계에 대한 실험은 에모지오니 달 몬도(Emozioni Dal Mondo. Merlot E Cabernet Insieme) 와인 경연대회로 이어졌다. 피사 대학교 뇌심리학 연구팀의 이번 과제는 다양한 음악이 흐르는 상태에서 우리의 마음 촉수에 걸려드는 6대 감정을 지켜보는 거다. 이번 실험 대상자는 와인을 평가하는 심사원으로 실험자와 피실험자란 이중 역할이 주어졌다. 경연대회 내내 본 대회를 유치한 리버티풍 마르티넬리 빌라 Villa Martinelli 내부는 팝 뮤직,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이날 수집한 자료는 이전 실험 데이터와 연계해 처리 중이며 결과는 올해 말에나 나올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는 음악마다 반응하던 감정의 굴곡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실험 전에는 음악이 집중력을 흩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해 공정한 와인심사에 방해가 될 거란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클래식 음악이 나오자 마음은 차분해졌고 팝 음악 차례가 오자 집중력이 증가했다. 조화가 뒤틀리거나 단조로운 와인을 만나면 슬픔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생산자의 양조 능력에 의문이 일었기 때문이다. 심사원의 최고 자질은 중심에 훈련된 오감과 충분한 경험이 버티고 있는 중립적인 태도에서 온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데 품질미달인 와인을 대할 때 마음에 깃드는 그늘은 피하기 쉽지 않다.
제 18회 에모지니오니 달 몬도
- 메를로 에 카베르네 인시에메 집계 결과
<18회 행사를 유치한 베르가모시 인근에 소재하는 마르티넬리 빌라 내부>
이번 대회는 코로나 사태로 인한 유럽 내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된 이후 열린 첫 대회였다. 코로나 19 기간에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으나 개별 국가의 검역문제로 참가를 취소한 심사원이 적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올해는 24개 국에서 70 여 명의 심사원이 참여했고 220개의 와인이 열띤 경연을 벌였다. 참가 자격은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품종에 주어지며 허용 품종 내에서 블랜딩 했거나 단일 품종으로만 제조해야 한다. 심사 절차와 채점 방식은 국제 와인 기구 OIV 가 정해 놓은 규정을 따른다. 본 대회는 첫 회 이래 이탈리아 최대의 보르도 블랜딩 산지인 롬바르디아주 베르가모와 인근 도시가 유치해오고 있다. 베르가모 일대는 1960년대에 보르도 품종 토착화에 성공한 이래 발칼레피오( Valcalepio DOC), 테레 델 콜레오니(Terre Del Colleoni DOC )같은 고품질 와인으로 지명도를 굳혀가고 있다.
출품 와인 중 상위 30% 만 메달을 수여하는 OIV 원칙에 따라 220여 개 와인에서 50개의 와인에 메달이 돌아갔다(우승 와인 자세히 보기) . 이를 메달별로 보면 그란 골드메달은 10개, 금메달은 56 개다. 규정상 90점 이상을 획득해야만 그란 골드메달 자격이 주어지나 올해는 92점으로 커트라인이 높아졌다. 골드 메달도 원래 85점이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었으나 87점으로 상승해 고득점 와인의 순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참가국 별 메달집계를 살펴보자. 와인을 가장 많이 출품한 나라는 121개로 이탈리아에 돌아갔으며 그란 골드 메달 5개와 골드 메달 27개를 거머쥐었다. 2위는 37개 와인이 참가한 세르비아가 차지했으며 2 개의 그란골드와 16개의 골드를 가져갔다. 크로아티아, 호주, 프랑스, 헝가리, 독일, 슬로바키아, 말타, 루마니아, 북 마체도니아 등이 최소 한 개의 메달을 우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