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온 파드레 트라토리아 외관. 평원에서 바롤로 마을로 연결하는 바이올렛 꽃길을 넘나드는 식객들의 출출함을 달래주던 전통 맛집이다. 트라토리아 상호를 본따서 지은 부온 파드레의 하우스 와인은 이곳에 들른 식객들만 맛볼 수 있는 바롤로의 모태가 되었다>
비베르티 와이너리는 바롤로 서쪽 언저리를 가로지르는 도로변에 나지막이 서있다. 이 도로는 능선을 따라 가팔라지다가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이내 포도밭 운해 속으로 사라진다. 도로명은 비아 델레 비올레, ‘바이올렛 꽃길’이란 뜻이다. 건물은 자연과 마을의 조화를 우선하는 바롤로 전통 농가풍에 맞게 지었기에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만일 간판이 없었다면 이곳이 올해로 백세를 맞는 장수 바롤로의 탄생지임을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아우라를 두른 바롤로는 바로 부온 파드레 BUON PADRE. ‘좋은 아버지’란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다. 부온 파드레는 오너 가족이 3대째 운영하는 트라토리아 (서민적인 음식을 푸짐하고 좋은 가격에 제공하는 식당)의 상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백 년 가까이 식과 주가 한집살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갑자기 와인과 식당이 같은 상호를 공유하게 된 사연이 궁금해진다.
부온 파드레와 맞닿은 바이올렛 꽃길은 예전에는 비아 델 살레Via Del Sale로 알려졌었다. 비아 델 살레는 ‘소금 가도’란 뜻인데 서남 피에몬테 , 리구리아 서부 해안,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에 걸쳐있는 마리팀 알프스 산맥을 두고 해발 1,800~2,100미터 산등성이를 주파하는 무역로다. 내륙에 갇힌 피에몬테주가 짠맛을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고 이렇게 들어온 소금은 바롤로를 지나 북이탈리아 평원까지 전파됐다. 프로방스산 소금은 희귀한 특산물로 알려져 부르는 게 값이었다. 가격이 비싼 데는 국경을 넘을 때 부과되는 소금세가 일조했다. 소금 상인들은 세금징수인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갖가지 묘안을 궁리했는데 그중 앤초비 일화는 유명하다. 소금통 전체를 엔초비와 소금으로 번갈아 채웠고 맨 위는 앤초비로 마무리해 염장생선인 양 위장했다. 소금세 벼락을 피하기 위한 위장술에 불과했던 앤초비는 뜻밖에 피에몬테 식문화에 선한 영향을 미쳤다. 염장 엔초비는 현지 식재료와 만나 육지와 바다 레시피를 낳았다. 마늘과 앤초비가 결합한 바냐 카우다 소스가 그렇고, 파소네 토종 송아지 구이와 참치, 앤초비와 절묘한 만남인 비텔로 톤나토는 소금 가도가 없었다면 지구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안토니오 비베르티는 소금 가도 길목에 트라토리아를 개업했다. 목이 좋았던지 식당은 소금 거래상들로 항상 북적됐다. 고기 소스에 버무린 타야린 파스타, 살라메, 고르곤졸라가 차려진 테이블을 마주보고 여행담이 끊임없이 오갔다. 한편, 안토니오는 인근의 포도밭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바르베라, 돌체토, 네비올로를 심었다. 당시 관습대로 한 품종으로만 와인을 만들었고 하우스 와인(비노 로쏘 델라 카사)으로 식당 손님에게 제공했다. 네비올로는 두 군데 밭에서 나왔는데 이를 혼합해 만든 와인은 부온 파드레 바롤로의 모태가 되었다. 안토니오는 인심이 좋았고 손님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었다. 하여, 좋은(부온) 아버지(파드레)가 주인이라는 의미의 부온 파드레라는 이름을 얻는다. 부온 파드레는 명사들 사이에서도 인기장소로 등장했으며 2차 세계대전에는 독일군이 영업을 방해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지역명소로 자리 잡았다.
한지붕에 살던 와인과 음식, 분가하다
트라토리아 하우스 와인에 머물던 와인이 독립할 수 있었던 데는 마리아가 견인차 역할을 했다. 마리아는 안토니오의 아들인 조반니와 결혼했으니 며느리인 셈이다. 상당수 바롤로 생산자가 전향한 농부임을 감안할 때 비베르티의 성장 배경은 남다르다. 마리아는 라 제멜라 바르바레 달바의 라벨에 그려진 모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녀는 강단 있고 생활력이 강해 시부모가 물려준 식당을 47년간 운영하며 자녀 세명을 키웠다. 또한 성품이 온화한 남편을 독려해 바롤로 생산자로 거듭나게 했고 두 아들을 와인 메이커로 키워냈다.
마리아의 타고난 손맛은 부온 파드레를 탄탄대로에 올려놨다. 그녀가 직접 뽑아낸 타야린은 황금색이 돌며 면발은 실처럼 얇다. 가늘지만 탄력성이 좋아 뚝뚝 끊기지 않는다. 거기다 흡착력도 뛰어나 소스가 흘러내리거나 해서 테이블 리넨에 얼룩을 남기지 않는다. 구수한 고기맛과 토마토의 시큼함이 어우러진 타야린은 입안에서 살살 녹고 바르베라를 곁들이면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 마리아는 은퇴했지만 후임세프에게 요리비법을 전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부온 파드레의 피에몬테식 인기메뉴. 시계방향으로 화이트 트러플 퐁듀, 라구 타야린, 바두타 디 파소네, 브라사토 알 바롤로>
제각각의 열 군데 밭이 부온 파드레로 하나가 되다
초기의 부온 파드레는 라 볼타와 브리코 델레 비올레 밭의 포도를 혼합해서 와인을 만들었다. 지금처럼 특정 밭만 떼어내 고순도의 정제된 맛을 추출하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다. 1980년 이전 바롤로 세계는 밭의 장점을 모아 조화로운 맛을 얻은 게 최고의 양조기술로 통하던 시절이다. 이렇게 만든 와인을 클래식 바롤로라 하며 싱글빈야드와는 대척점에 있다. 지금은 단일밭에서 온 순수한 바롤로가 대세지만 클래식 바롤로는 클래식 음악처럼 유행에 뇌화부동 하지 않는다.
안토니오의 밭은 1세기가 지나면 열 군데로 불어난다. 개별 밭은 각자의 역할이 주어졌으며 블랜딩을 통해 조화로운 접점을 만난다. 트라토리아 반경 2~3km 내에 밭이 모여있고 석회암과 점토, 모래가 섞여 있는 산가타가 토양층이 넓게 퍼져있다. 성분 함량의 경중에 따라 우아함, 신선도, 아로마가 변주한다. 늦게 합류한 몬포르테 달바의 페르노와 노벨로의 라베라 밭은 밀도감이 높고 구조, 힘, 보디감이 충만하다. 특정 밭에 한해(산 피에트로, 브리코 델레 비올레, 라 볼타, 라베라) 작황이 보기 드물게 뛰어난 연도는 소량의 리제르바를 맛볼 수 있는 기회다.
밭이 열 군데나 되다 보니 수확시기가 제각기 달라서 알코올 발효 이후의 양조과정은 유연하게 조절한다. 단, 두 가지 원칙은 꼭 지킨다는 조건하에서다. 첫 번째는 발효와 침용을 2주 안에 끝내는 거다. 이는 부온 파드레가 실크 촉감의 타닌을 지닌 것과도 관련이 있다. 발효 개시 20일 전후로 포도껍질은 부드러운 타닌을 배출하지만, 한도를 초과하면 되려 껍질이 타닌을 흡수하는 역전현상이 벌어져 떫은맛이 두드러진다. 두 번째는 오크향의 철저한 차단이다. 이를 위해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프랑스산 오크로 바꿨다. 보통 오크통의 둥근 형태를 만들기 위해 목판에 열을 가해 구부리는 과정에서 구운향이 오크에 스며든다. 비베르티의 오크통은 나뭇결 방향으로 자른 판자를 조립해서 형태를 잡기 때문에 오크향 개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2018년 부온파드레는 오크 숙성을 36개월 한 10종류의 와인을 블랜딩 했고 추가로 병 숙성을 6개월 늘렸다. 사워체리, 장미, 딸기, 라즈베리, 자두의 달콤함과 신선함이 어우러지며 바이올렛과 라벤더 향이 잔잔히 와닿는다. 타르, 유칼립투스 향이 더할 수 없이 감미롭다. 타닌은 편안한 느낌이나 촘촘한 구조가 중심을 잡고 있어 몰입도가 상당하다. 쌉쌀한 미네랄 풍미가 살아있으며 깔끔한 산미는 경쾌한 여운을 남긴다.
브리코 델레 비올레 리제르바
Bricco delle Viole Barolo Riserva DOCG 2015
브리코 델레 비올레는 ‘바이올렛 언덕’이란 뜻이다. 단어만 들어도 밭과의 상관관계가 금방 떠오르듯 이곳 태생인 포도의 인증마크는 바이올렛 향이다. 브리코는 언덕의 정상 부분을 일컫는 피에몬테 방언으로, 참뜻은 최상의 품질을 약속하는 와인 파라다이스다. 비베르티 밭은 4백~5백 미터대에 속하며 경사면이 정남, 남동쪽을 바라보는 0.5헥타르 크기다. 가족이 최초로 구매한 밭이자 이들 품에 첫 바롤로를 안겨준, 가족의 애착이 특별한 밭이다.
알코올 발효 기간은 부온 파드레와 동일하나 오크 숙성은 50개월, 병숙성은 10개월로 늘렸다. 숙성을 오래하다 보니 수확한 연도에서 60개월이 경과해야 시장에 출시한다. 유칼립투스, 바이올렛, 라벤더, 장미, 블랙베리와 타르, 타바코, 아니스 등 복합미가 출중하다. 타닌 구조는 치밀해 긴장감이 뛰어나며 이를 매끈한 결이 감싸고 있다. 구조에 걸맞은 무난한 보디감, 여기에 경쾌한 산도가 어우러져 젊음과 원숙함이 절묘한 밸런스를 이룬다.
브리코 아이롤리 바르베라 다스티 수페리오
Bricco Airoli Barbera d’Alba Superiore DOC 2019
해발이 가장 높은 브리코에는 수령이 80년이 넘는 바르베라 밭이 펼쳐진다. 일명 브리코 아이롤리 Bricco Airoli라 하는 밭인데 대대로 우수한 포도를 낸 이력이 있는 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꺾꽂이로 번식했다. 알코올 발효와 침용 기간, 오크통 소재와 크기는 물론 숙성기간도 부온 파드레 바롤로와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체리, 장미, 바이올렛, 블랙베리, 라즈베리 향이 은은하다. 타닌 질감이 매끄러우며 적당한 긴장감도 갖추고 있다. 풀보디와 산미의 조화가 자연스러워 바롤로와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이렇게 바르베라가 바롤로를 닮는 것을 바롤레자(바롤로화) 했다고 한다.
바롤로는 엄선된 자연환경과 생산 체계의 피라미드가 피워낸 네비올로 꽃이다. 그러나 바롤로 보다 한 등급 낮은 와인들은 밭 제약을 덜 받고 품종 선택이 자유롭고 숙성방식이 개방적이다. 다른 말로, 와인메이커의 창의성이나 실험성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나르졸레 마을은 바롤로 마을과 이웃하지만 알바, 랑게 같은 고삐가 느슨한 DOC 규정이 활보한다. 알프스 기후권이라 포도는 서늘한 바람을 쐬고 뿌리는 바롤로와 흡사한 토양에 뻗쳐있다.
카시나 누오바는 나르졸레의 완만한 구릉에 조성된 밭이다. 삼각뿔처럼 정상이 뾰족한 몬비조 봉 좌우로 3천 5백 미터급 알프스 연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햇볕에 덥혀진 공기는 안쪽의 냉기와 순환하면서 서늘함을 유지한다. 여기서 자라는 바르베라, 샤르도네는 서늘한 기후에 감응해 바삭거리는 산미를 농축하며 청량감 도는 아로마만 선택적으로 취한다. 필레바쎄 피에몬테 샤르도네(Filebasse Piemonte Chardonnay)는 언덕 아래쪽(바쎄)을 둘러싼 열(필레)에서 익은 포도를 골라 담았다. 알코올 발효는 1주일 이내로 끝냈고 10도로 맞춰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8~10개월간 숙성했다. 청사과, 아카시아, 바나나, 아몬드, 들꽃향이 청명한 가을하늘이 뿜어내는 서늘한 바람을 떠올리게 한다. 톡쏘는 산도의 싱그러움이 살아있고 레몬향이 촉촉이 배어있다.
필레바쎄가 솔직하고 직선적이라면, 리나토 랑게 샤르도네Rinato Langhe Chardonnay는 복합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동안 생산이 중단됐다가 최근에 라인을 재가동했다. 하여, ‘부활했다’는 뜻을 지닌 리나토를 예명으로 붙여줬다. 세상 빛을 다시 보게 된 리나토는 예전대로 숙성을 오크에서 하고 첨단 양조기법을 동원해 농밀함과 유질감을 강조했다. 발효 전에 수확한 포도의 40%는 송이채, 60%는 줄기를 제거한 포도알을 6 시간동안 저온 침용한다. 용기 밑에 가라앉은 침전물을 걷어낸 다음 미리 준비해 둔 자연효모 액을 섞는다. 그런 다음 즙의 60%는 프랑스산 아카시아 용기에 담아 실온 발효를, 40%는 온도가 맞춰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를 일으킨다. 와인을 다시 반분해 프랑스산 배럴과 아카시아 배럴에 채운 후 효모앙금 숙성을 했다. 앙금과 접촉 횟수를 늘리기 위해 1주일에 한 번 주기로 휘저었으며 이를 12개월 반복했다. 오크 숙성과 앙금 접촉을 통해 숙성잠재력을 최대 15년까지 끌어올렸다. 바닐라, 바이올렛, 오크향, 버터, 메론, 배, 아카시아의 농밀함이 코를 간지럽힌다. 잘 익은 바나나, 복숭아, 구운 빵 향기가 잔에 가득 퍼진다. 산미는 레몬향을 머금고 있으며 와인에 생동감을 준다. 매끄러운 질감과 청량함이 멋진 대조를 발한다.
비베르티 가족이 바롤로에 못지않게 정성을 기울이는 와인이 바르베라 달바다. 라 제멜라 바르베라 달바는 발랄하고 부담이 없어 아무 음식과 어울린다. 라 제멜라는 막내아들 클라우디오가 합류한 이래 와인메이커로서 첫 작품이다. ‘쌍둥이’란 뜻의 라 제멜라는 부온 파드레의 정신적 지주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아들의 사랑이다. 식재율이 6800~7500그루에서 오는 농축미, 서늘한 산미, 정남향인 코스테 디 베르네 밭의 원만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안에서 숙성해서 신선도를 유지하며 아로마가 정갈하다. 자두, 라즈베리, 체리, 라벤더 향이 또렷하며 표현이 직선적이다. 타닌은 미세하나 균형 잡힌 구조안에서 존재감을 나타낸다. 산미가 입을 적시면서 잔잔히 퍼지는 체리향이 매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