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루치아Santa Lucia를 둘러보기 위해 뿔리아를 방문했다. 꼬라또 시외의 한적하고 좁은 농로를 따라 10여분쯤 운전하면 나오는 소박하고 아담한 와이너리다. 15헥타의 자그마한 포도밭과 800년 전통의 이태리 남부 귀족 가문에 어울릴 법한 빌라와 양조장이 고풍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1822년에 지어진 건축물이라니 구석구석 멋스런 장식이 눈에 띈다.
이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들의 특징은, 해안으로부터 20여 km 떨어진 해발 300m의 적절한 고도에서 무르지아 라는 단단한 암반층을 뚫고 내려간 이 지역의 토착품종들, 즉 네로디 트로이아와 피아노의 산도와 미네랄 풍미가 그야말로 풍만하고 우람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런 중에도 유기농 인증까지 획득한 와인이다. 물론 유기농 마크를 획득하려고 깨끗한 와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마셔도 건강하고 깨끗한 와인으로 사람을 기쁘게 만들고 즐거운 자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게 로베르토 페로네의 설명이다.
나폴리에서 두어 시간 거리인 뿔리아는 이태리 3대 와인생산량을 자랑하는 지역이지만 사실 병 입 와인은 30%도 채 되지 않고 대부분 벌크 와인으로 판매된다. 그러니 뿔리아 병입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나름 수준 있는 와인인 것이다.
앞뒤 거리가 450km인 이 지역의 기후나 토양은 사뭇 다르고 이에 따라 재배하는 품종도 다르다.제일 아래는 네그로 아마로, 그 위의 만두리아는 프리미티보, 그 위는 네로 디 트로이아 혹은 알리아니코, 그리고 몰리제에 붙은 지역은 몬테풀치아노를 주로 생산한다.
필자가 방문한 산타루치아는 네로디 트로이아 전문이다. 트로이가 멸망함으로써 발생한 유민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라는 전설도 있고, 그들이 가지고 나와서 심은 품종이 바로 네로디 트로이아 품종이라는 옛이야기도 있다. 확실히 뜨거운 태양이 첫 맛에 느껴진다. 더불어 석류속 껍질향과 담배향, 카카오향 등이 피어오른다. 해안가에서 20km 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나 해발 250m의 고도와 단단한 무르지아 토양이 기반이 되어 풍부한 타닌과 신선한 산도가 어울려 멋진 레드 와인의 구조가 되었다. 알리아니코가 남부의 바롤로라 불리지만 사실 잘 빚어진 네로디 트로이아를 맛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특히 리제르바 급의 네로디 트로이아는 그 구조와 풍미가 균일하고 풍부해서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손꼽히는 와인이라 할 수 있다.
한술 더 뜨자면 산타루치아 와이너리의 숨은 보석이 바로 라 가짜라드라 피아노 100% 화이트 와인이다. 피아노는 원래 나폴리 인근 아벨리노나 베네벤또의 전문 품종이다. 하지만 토양이나 기후가 비슷한 뿔리아에도 잘 적응하여 뛰어난 구조와 화려한 풍미를 자랑한다. 맛을 보면 처음엔 파인애플이나 복숭아, 망고 등의 향이 올라오다 산도와 미네랄 풍미가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며 그 자리에 있던 해산물들을 쓸어 먹게 한다. 이 지역에서는 좀 생소한 피아노 품종이 시칠리아에서도 재배되며 각광받는 것을 보면 환경에 정착하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듯하다.
가짜라드라 라는 와인 이름이 좀 우스꽝스럽게 들리지만 이태리에서는 도둑까치를 뜻한다. 뿔리아에 가면 까마귀가 늘 눈에 띄고 까치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특이하게도 이 포도밭에 까치가 항상 날아다니기에 신기해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 외에도 알레아티코나 네그로 아마로 등의 전통적인 뿔리아 와인을 험한 산지가 아님에도 손으로 직접 수확하여 양조하는 방식으로 생산한다고 하니 와인에 대한 자기 철학과 소신이 얼마나 뚜렷한 지를 보여준다. 나폴리에서 두 시간 반 정도 아름다운 이태리 남부를 감상하며 운전한 보람이 있는 와이너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