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들의 향연에 어울리는 로제 와인
대한민국의 봄, 전국이 각양 각색의 꽃들의 향연으로 물들고 있다. 울타리의 노오란 개나리와 야산의 연분홍 진달래, 도로변의 새하얀 벚꽃과 뒷동산의 매화꽃, 과수원의 진분홍 복숭아꽃과 하얀 배꽃…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연구실로 파고 드는 4월 중순의 진한 라일락 향까지~! 눈으로 호강하고 향긋한 향까지 음미했으니, 이제는 맛난 봄의 음식을 먹어 보자. 이 달에는 봄 나물과 여행지에서 즐길 각 지방의 특산 음식들에 잘 어울릴 와인을 골라 보려는데, 늘 마시는 와인 말고 새로운 것은 없을까? 피크닉 모임의 돗자리에 다채로운 음식을 꺼내 놓고 한 병으로 즐겁게 마실 모자이크 와인, 로제를 선정해 본다.
로제 와인은 장미의 대표적 이미지 색상인 분홍색에서 착안해 작명된 와인으로, 연한 회색에서 예쁜 핑크색을 거쳐 가벼운 레드 색상까지 다양한 색상의 와인을 말한다. 이처럼 색상의 대역 폭이 넓기 때문에 때로는 색상으로 구별하기 보다는, 만드는 방식과 원산지 명칭으로 로제를 판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타벨 지역(Tavel AOC) 와인은 법규상 100% 로제 와인을 생산해야 하기에, 색상이 레드처럼 진하더라도 타벨 이름을 달고 출시되면 로제 와인이다.
로제 와인을 만드는 전통적인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레드 와인을 만드는 방법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 하나는 화이트 와인 제조 방식에서 착안한 것이다. 먼저 프랑스어로 '세녜(Saignée)'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붉은 껍질을 가진 적포도를 가지고 일반적으로 레드 와인을 만들고자 할 때는 보통 2주일 이상 장기간 껍질과 과즙을 침용시켜 원하는 진한 레드 색상을 뽑아낸다. 그러나 로제 와인은 아주 연한 레드 칼라만 필요하기 때문에, 껍질과 담가 두는(침용) 기간을 6~24시간 정도로 최소화 한다. 따라서 색상도 매우 연하게 뽑아져 나오게 된다. 원하는 색상이 나오면 바로 포도즙만을 빼내 껍질과 분리하여 별도의 발효조에서 양조를 이어가면 그 색상의 로제 와인이 탄생한다. 세녜 방식 로제의 특징은 짧게나마 껍질과 함께 두었기 때문에 약간의 타닌과 추출물이 있을 수 있다. 진하고 내실있는 로제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방식이 되겠다. 레이블에 '로제 드 세녜(Rose de Saignee)'라고 기입하며, 주로 소규모 생산 방식이다.
두번째 방식인 화이트 와인 생산 방식을 응용한 경우 역시 적포도를 사용하는데, 수확된 적포도를 바로 압착기(프레스)에 넣어 조심스럽게 압력을 가하며 즙을 짜내는 방식이다. 이 때, 점점 압력을 높이다가 전체 과즙 주스가 원하는 색상에 도달하면 압착을 중지한다. 껍질과의 침용 과정 없이 생산되기에 가볍고 생동감있는 로제 와인이 만들어진다. 레이블에 '로제 드 프레스(Rose de Press)'라고 기입하며, 주로 대량 생산 방식이다.
왕들의 로제 Le Roi des Rosés, 타벨 Tavel
이 달의 주인공 로제는 프랑스 론 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대표적 드라이 로제인 타벨 지역 로제다. 타벨 로제 (Tavel AOC) 와인은 프랑스에서 가장 전통적이며 가장 힘찬 내실있는 드라이 로제 와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13세기 이래, 필립 4세, 프랑수아 1세 등 프랑스의 왕들과 아비뇽의 교황들이 애호했던 로제 와인이었기에, '왕들의 로제'라는 별명이 탄생했다. 그르나슈 누아 품종이 주종이며, 그르나슈 블랑, 무르베드르, 쌩쏘, 픽풀, 클레레뜨, 부르불랑 등 다수 남불 품종들을 소량씩 블렌딩해 생산한다. 양조 방식은 세녜 방식과 프레스 방식을 함께 사용해 양조한다. 타벨 로제 와인은 상큼하고 신선하면서도 내용있는 균형잡힌 로제 와인으로서, 가벼운 레드 와인과 같은 힘도 있다. 색상은 밝고 맑은 연한 석류색을 보이며, 전반적으로 진한 편이다. 향은 레드 커런트, 산딸기, 딸기, 석류 등 붉은 과일향이 주류를 이루며, 아몬드, 흰 후추 등 견과류와 향신료 향이 복합미를 선사한다. 미각에서는 높은 산도, 높은 알코올 바디, 미네랄의 긴 여운이 근사하다. 시음 후반부는 세련되고 우아한 알코올과 싱싱한 과일 풍미로 마감되곤 한다. 연어 등 기름진 생선 요리, 오리 구이, 불고기 등과 함께 근사하고 세련된 식탁을 꾸밀 수 있는 수준급 로제 와인이다.
< M.Chapoutier, Tavel, 'Beaurevoir' >
약 40여개의 양조장에서 생산되는데, 필자의 투픽은 엠-샤푸티에(M.Chapoutier)사의 '보흐부아르(Beaurevoir)' 로제와 도멘느 드 라 모르도레(Domaine de La Mordorée)사의 '라 담 후쓰(La Dame Rousse)' 로제다. 보흐부아르 타벨은 그르나슈 누아, 쌩쏘, 시라, 무르베드르, 클레레뜨, 부르불랑 품종이 혼식된 포도밭의 포도를 한꺼번에 수확해 양조했으며, 알코올 도수는 13.5%vol으로 미디엄 보디 로제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레이블로도 유명하며, 자고새의 붉은 눈동자 색상을 닯은 석류빛 진한 로제 칼라가 인상적이다.
< Domaine de La Mordorée, Tavel, 'La Dame Rousse' >
한편, 모르도레 농장의 라담후쓰 타벨은 그르나슈의 알코올, 시라의 과일 풍미, 끌레레뜨의 꽃향기, 쌩소의 향신료를 겸비한 기념비적 로제다. 인디언 핑크 톤의 환상적인 로제 색상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마셔 사라지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다. 그 맑은 수면 위에서 빨간 옷을 입은 요정들이 새콤한 크랜베리와 레드 커런트 열매 향을 풍기며 춤추고, 살구향, 검붉은 장미향과 회색 후추 향신료 터치가 복합미를 거든다. 이 모든 향들은 단단한 미네랄 속에 매우 은은하고 수줍게 표현되고 있어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한 모금 머금으면 쌉싸름한 자몽과 붉은 과육질의 천혜향의 화사한 향미가 입안에 번진다. 이 로제 와인들은 4~5월 새 봄의 화사한 식탁에서 오렌지, 자몽을 곁들인 다양한 주재료의 샐러드, 지중해 타파스 스타일 푸드, 연어 스시 등과 곁들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