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베누토 부르넬로(Benvenuto Brunello, 이하 벤베누토)가 예정일보다 앞서 11월 19일, 20일 양일간 몬탈치노에서 열렸다. 첫 회부터 2월 중순이던 연례행사를 갑작스럽게 앞당긴 결정을 두고 와인 비평가들 사이에서 무성한 소문이 돌았다.
본 행사의 주최자인 빈도치(F. Bindocci)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와인 컨소시엄 회장은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라고 밝혔다. 부르넬로 와인은 매년 1월 1일에 출시하는데 새 빈티지 선공개 행사인 벤베누토를 40일 지난 뒤에 여는 건 너무 늦지 않냐는 의견을 전폭 수용한 거라 강조했다.
이번 벤베누토에 선보인 와인은 2017년 산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안나타 타입), 비냐 셀레지오네 (싱글빈야드 타입), 2016년 산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리제르바와 2020 년 산 로쏘 디 몬탈치노 등이다. 앞의 와인들은 숙성 의무 기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으며 1일 1일 시판을 앞두고 마지막 호흡을 고르고 있다.
필자는 2017년 빈티지(안나타)를 보릿고개에 빗대고 싶다. 이탈리아 와인 메이커라면 겪어야 했던 어려운 해가 마치 지난날 우리 농부들이 힘들게 넘었던 보릿고개와 흡사해 보였다. 이틀간 120여 개 와이너리가 출품한 250종류의 부르넬로가 개봉되었다. 과연 이 많은 와인들이 무사히 보릿고개를 넘어 3년 연속 최우수 빈티지를 달성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30주년을 맞이하는 이번 행사는 참여한 와인 만큼 새 소식들로 풍성했는 데 주목할 만한 소식을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유럽과 북미 출신 마스터 오브 와인(Master of Wine, 이하 MW)이 9명이나 참가해서 부르넬로 와인을 향한 뜨거운 관심도를 보였다. MW들은 ‘부르넬로와 마스터 오브 와인 - 인지도, 전망, 도전’ 이란 제목의 토크쇼를 열었다. 토크쇼를 통해 한국보다 먼저 부르넬로를 접한 나라들이 체감하는 인지도, 트렌드, 명암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몬탈치노 1헥타르당 포도밭이 1992년 36,380유로에서 지금은 20배나 오른 750,000 유로에 거래되고 있다.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면 와인 마진 폭이 높아지는 단기 이익은 얻을 수 있으나 외국인의 투자의욕을 떨어트린다. 로쏘 디 몬탈치노(RDM, DOC급)의 품질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따라서 RDM이 부르넬로의 세컨드 급이거나 등급 심사에 탈락한 와인이란 선입견을 불식시킬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
영국에서 점유율은 빠르게 확산 중이며 프리미엄 와인 점유율도 보르도, 부르고뉴 와인을 바짝 추격하고 있어, 부르넬로를 잠자는 호랑이에 비유한다. 7~8년 전만 해도 타닌이 엄격하고 입안에 깊은 울림을 주는 임팩트에 중점을 두었다면, 요즘은 결이 유연해지고 떫은맛이 상당히 누그러졌다. 프랑스 크뤼급 와인은 라벨 파악이 쉽지 않아 와린이들의 와인 접근성이 떨어진다. 반면, 부르넬로는 라벨 정보가 명확하고 단순해서 초보자 눈에 쏙 들어온다.
<부르넬로 공식 글라스 T-made 700>
부르넬로 전용 글라스 시대가 열렸다. 글라스 모델명은 T-made 700. 납성분 제로의 순수한 크리스탈 소재다. 부르넬로 와인 컨소시엄, 와인 메이커, 와이너리 오너, 몬탈치노 출신 이탈리아 제1호 MW인 가브리엘레 고렐리가 1년 간 3백번의 테이스팅을 반복한 후 탄생한 공식 글라스다. 보울 부분이 널찍해 스윌링 감이 좋고 섬세한 향기가 잘 발현된다. 아로마 층이 겹겹인 부르넬로는 공기와 천천히 접촉시키면서 향기를 깨워야 한다. 본 글라스는 림 직경을 늘여 산소와 와인 접촉면이 커져서 아로마가 연속적으로 피어오른다. 이탈리아 와인 글라스 전문 업체인 Italesse가 디자인과 제조를 맡았다. Italesse 홈페이지에서 구입할 수 있고 세트 당 6개 잔이 담겨있다.
<Palazzo dei Priori 구시청사 건물. 타일화 공개식을 가진 뒤 몬탈치노 구시청사 벽화에 부착되어 일반에게 공개된다>
TIME지가 해마다 올해의 인물을 뽑는다면, 벤베누토는 마토넬라(mattonella)를 선정한다. 마토넬라는 30 cmX30 cm 크기의 타일화인데 주제는 벤베누토가 열리는 해의 작황을 표현한다. 한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나 예술가에게 의뢰하는데 서른 번째 수락자는 카를로 크라코(Carlo Cracco) 셰프다.
카를로 크라코는 이탈리아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헤드 셰프를 두루 거쳤으며 다수의 국제 요리 경연대회 심사원장 및 TV 요리 프로그램에도 고정 출연하고 있어 톱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18년에는 밀라노의 럭셔리 쇼핑가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에 Cracco레스토랑을 오픈했다.
<카를로 크라코 셰프가 디자인한 마토넬라 타일화. 주제는 달걀이다.>
셰프가 디자인한 2021년 작황의 주제는 달걀이다. 달걀은 밀라노의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건물을 배경으로 떠 있다. 셰프는 타일화 공개식에서 달걀을 뽑은 이유를 “가장 오래된 식재료이며 어떤 요리에도 빠질 수 없는 감초 같은 존재”로 들었다. 타일화는 14세기에 완성된 몬탈치노 구 시청사 벽화에 부착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2017년 여름이 깬 기록들
폭염과 가뭄이 기록적이었다는 2017년,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2017년 기상 그래프는 2021년과 유사했는데 아직 기억이 생생한 2021년 여름을 들어 알아보자. 포도농사는 가지가 싹을 틔우고 열매가 자라고 익는 시기, 즉 4월 에서 10월 달이 좌우한다. 이 생장주기를 주도하는 것은 포도가 햇볕에 노출된 기간을 측정한 일조시간이다. 2021년 여름의 일조 시간은 1766 시간이었고, 2017년은 161시간을 초과한 1927시간 동안 포도가 햇빛을 받았다. 중단 없이 폭염이 6일 이상 지속된 날이 토스카나주를 세 번이나 덮쳤다. 수은주가 30도를 가리키던 날은 총 62일, 여기에는 34도가 넘는 날이 15일을 차지했다.
포도가 제대로 익으려면 7, 8월에 비가 2백 mm는 내려야 한다. 그해 여름에는 이 정도 내렸지만 이미 겨울과 봄부터 가뭄이 심했던 터라 가뭄 해갈엔 턱없이 부족했다.
기온이 35도를 초과하면 포도는 더위로 인한 스트레스를 못 견디고 생장을 멈춘다. 보통 레드 품종은 아로마, 당도, 폴리페놀 순서로 익는다. 와인 바디와 색소에 관여하는 폴리페놀이 익을 때까지 수확을 미루면 당 축적은 멈추지 않는 반면 산도는 감소한다. 즉, 알코올만 높고 맛은 밋밋해진다. 산도와 알코올을 적정선 안에 둘 요량으로 수확을 앞당기면 타닌은 떫은맛이 강해 지거나 안토시아닌과 중합력(결합력)이 낮아져 붉은색 보존도가 낮아진다.
아로마, 당도, 폴리페놀 3요소를 다 잡으려면 포도는 여름 낮의 햇빛을 적당히 받고 밤에는 서늘한 바람을 쐬면서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익어야 한다.
2017년 부르넬로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
숙성기간이 종료되고 있거나 와인메이커 취향에 따라 아직도 베럴 숙성 중인 와인이 대부분이라 2017 빈티지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건 무리일지 모르겠다. 와인의 좋고 나쁨을 결정짓는 잣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균형(밸런스)은 가장 인정받는 와인의 자질이다. 향기 분별력과 분별된 향기 종류는 개인의 경험 영역에 들기 때문이다. 밭 관리나 양조 과정에 돌이킬 수 없는 에러가 발생하지 않는 한, 부적절한 향기를 일부러 감추려는 불순한 의도가 없는 한 와인은 자연 아로마와 부케를 표현한다.
어려운 빈티지일수록 알코올, 산미, 타닌처럼 서로 섞이기 힘든 성분이 결합하는 친화력이 중요하다. 이 성분들이 완숙하는 순서가 뒤바뀌면 균형의 기반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2017 부르넬로는 균형이 잡혔을까?
먼저 알코올 농도는 평년 수준인 14~14.5도 범위 안에 들었고 입안이 화끈거리거나 타들어 가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일부 와인에서 과숙한 과일이 내는 과장된 풍만함이나 농밀함이 감지되었다. 뜨거운 여름의 치명탄을 맞았을 것으로 예상했던 산도는 놀랍게도 신선했고 신맛에 생동감이 돌았다.
우려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맞은 것은 타닌이었다. 걱정했던 타닌의 거친 특질이 우세하지 않았다. 소량의 쓴 맛이 감지되나 떫은맛이 적절하며 산도와 밸런스도 잘 맞았다. 물론 아직은 타닌이 날을 세우고 있어 매끈한 식감과 원만함을 기대하려면 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작황이 어려웠는데 풍미가 타고난 듯 조화롭다면 의문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테루아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제 본분을 다 했는지 말이다.
필자는 117여 종의 안나타 타입과 셀레지오네 타입을 시음했는데 비교적 타닌 결이 부드러웠고 조화로운 맛을 내는 와인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몬탈치노 남서부와 일부 해가 잘 드는 북부 밭에서 온 와인이 그러했는데 와인 라벨을 아래에 첨부하였다.
만일 2017 빈티지가 제자리를 잡기까지 기다릴 의향이 없는 독자라면 2016년 리제르바를 주목하시길. 2016 년과 2017년 작황은 극과 극이다. 2016년은 1916년 다음으로 비가 많이 내렸고 겨울과 봄 기온이 서늘했다. 포도 착색은 7월 20일경에 시작했고, 8~9월에 접어들면서 고온 건조한 날씨를 보였으나 일교차(낮 평균기온 26~28도. 밤 평균 기온 15~16도)가 크게 벌어지면서 완숙 속도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주요 성분(폴리페놀)이 시간을 갖고 제대로 익은 와인에는 유수의 와인 평가지로 부터 슈퍼 빈티지란 격찬이 쏟아졌다. 부르넬로 와인 컨소시엄 협회는 별 5개 만점에 별 5개를 수여했으며 20년 후를 전성기로 바라보고 있다. 와인 스펙테이터 매거진도 보기 드문 완벽한 빈티지라 격찬했고 51개 와인에 96점 이상을 주었다.
<2016빈티지 부르넬로 리제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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