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애호가라면 누구나 와인에 깊게 빠져들게 된 계기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와인을 함께 했던 매력 넘치는 누군가일 수도 있고, 인디애나 존스처럼 흥미진진했던 어떤 와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또는 20년, 30년, 반세기를 넘긴 오래되고 가냘픈 와인을 접하면서 번쩍 스친 어떤 영감이나 깨달음일 수도 있다. 아무튼, 와인이 맥주나 소주 같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성으로’ 이해하고 나면 아주 특별한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와인을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져다 주는 이점은 분명히 있다(단지 그것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몰입의 즐거움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그의 저서 <몰입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몰입에 뒤이어 오는 행복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어서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라고.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와인도 종종 이러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버티컬 테이스팅의 묘미
와인을 시음하는 형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한 생산자가 만든 여러 빈티지의 와인을 비교해서 마셔보는 버티컬 테이스팅(vertical tasting)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우선 동일한 생산자가 동일한 장소에서 만든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빈티지에 따라 그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빈티지마다 성격이 다른 이유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 뒤에는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보상으로 주어진다.
최근 참석했던 <하이트진로 주최 ‘에썽스 Essence’ 와인 시음회>는 2000년대 이후의 다섯 개 빈티지를 비교 시음하는 버티컬 테이스팅 형식으로 이루어졌다(위 사진). 에썽스는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보르도의 와인생산자 ‘두르뜨 Dourthe’에서 생산하는 아이콘 와인이다. 1840년에 설립된 두르뜨는 오늘날 아홉 개의 양조장을 거느린 보르도 최대의 와인생산자이며, “보르도 와인의 품질 보증 수표”라 불리며 보르도 와인의 표본을 제시해 온 곳이다. 참고로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8년, 포도재배와 와인양조에 혁신을 꾀해 만든 ‘두르뜨 뉘메로앵 Dourthe N°1’(아래 사진)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며 두르뜨에 성장동력을 제공했다.
에썽스는 두르뜨가 소유한 최상급 포도원의 포도를 선별해서 만든다. 뛰어난 빈티지에만 생산되기 때문에 매년 만들어지는 와인이 아니며, 2000 빈티지를 첫 시작으로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홉 개 빈티지만 생산되었다. 생산량도 6천 병 정도로 매우 한정적이다. 국내에는 180병 정도 수입되는데 현재 2010 빈티지가 유통 중이다. 시음회에는 2005, 2008, 2009, 2010 빈티지를 비롯해 곧 출시될 2015 빈티지 에썽스도 함께 선보였다. 각 와인의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빈티지의 경이로움 보여주는 2005”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숙성잠재력을 갖춘, 위대한 보르도 빈티지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와인이다. 강건하면서도 잘 다듬어진 타닌은 중후한 매력의 신사를 떠올리게 한다. 풍부한 과일 향과 초콜릿 향, 짙은 제비꽃 향과 은은한 향신료의 향이 조화롭다. 2005 빈티지가 이토록 아름다운 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8% 가량 블렌딩된 카베르네 프랑 품종이 시간이 지나면서 잘 숙성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마시기 딱 좋은 2008”
장기 숙성을 요하는 보르도 와인의 경우,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다행히도 2008 빈티지 에썽스는 더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딱 마시기에 좋다. 다른 네 개 빈티지에 비해 평가 절하된 빈티지이지만, 지금 바로 마신다면 맛있는 산도와 신선하고 순수한 과일 풍미, 부드러운 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귀부인의 위엄 갖춘 2009”
2005 빈티지가 중후하고 잘 갖춰 입은 신사 같은 와인이라면, 2009 빈티지는 육감적이면서도 위엄을 지닌 귀부인 같은 와인이다. 앞선 두 와인에 비해 더 육중하게 느껴지며 과즙과 타닌이 풍부하다. 입안에서의 질감은 대리석처럼 매끄럽다. 포도가 매우 잘 익은 해였던 만큼 과일 풍미가 폭발적이며 알코올 기운이 입안을 서서히 덥혀온다.
“진정 위대한 빈티지는 2010”
2009 빈티지가 평론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빈티지로 꼽힌다면, 2010 빈티지는 보르도의 와인생산자들이 최고로 간주하는 빈티지이다. 균형이 훌륭하게 잘 잡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4.5도의 높은 알코올 도수에도 불구하고 산도가 잘 받쳐주고 있어 알코올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와인의 타닌은 입안을 부드럽게 가득 채우며 조여오는데, 매끄럽게 다듬어지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이 빈티지의 에썽스를 마신다면 양구이나 스테이크 같은 육류 요리를 곁들이는 것이 좋겠다.
“2009와 닮은 듯 다른 2015”
2015 빈티지는 스타일 면에서 2009 빈티지와 유사하나 좀더 부드럽고 절제된 면모를 보여준다. 2005나 2009 빈티지처럼 카베르네 프랑 품종이 블렌딩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굉장히 향기로운 와인이 될 것이다.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지금 당장 2015 빈티지를 맛보고자 한다면 마시기 2시간 전에 마개를 열어놓고, 마시기 1시간 전에 디캔터에 옮겨 담아 산소와 충분히 접촉시키는 것이 좋다.
수입_ 하이트진로 (080-210-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