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치 에 브로키 와이너리의 라스투루치 가족. 좌측에서 두번째가 최근에 가업에 합류한 조반니>
1970년 어느 날. 바스코 라스투루치Vasco Lastrucci 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다. 인근 마을 빌라디 세스타를 지나다가 듬성듬성 돌이 박혀있는 붉은 들판이 눈에 띈 것이다. 함부로 잘려나간 나무 밑동들과 수풀이 제멋대로 엉켜 있어, 사람들이 수풀(lecci)과 나무 밑동(brocchi)의 들판이란 뜻의 ‘레치 에 브로키’라 부르던 곳이다. 바스코는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이곳을 산조베제가 자라는 비옥한 땅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꿈을 품었고 곧 땅을 인수한다. 이후 밭에서 나온 첫 수확물로 만든 와인이 농부인 그를 평생 와인 생산자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될 줄이야... 그의 와인은 어떤 산조베제도 흉내 내지 못할 독창적인 풍미를 내고 있었다. 심연같이 검붉은 와인의 중심은 과일향의 휘오리가 몰아치며 흙과 광물향기가 튀어 올랐다.
바스코가 자신의 인생을 맡긴 토양을 사람들은 테라 로싸(terra rossa)라 불렀다. 테라 로싸는 지도상에서 토스카나주 중부에 자리 잡은 카스텔누오보 베라르덴가 마을에서 발견된다. 풀리아를 비롯한 남이탈리아에서는 흔하지만 끼안티 클라시코 지역에서 발견된 경우는 처음이다. 그의 땅은 원래 점토와 석회석이 섞인 갈레스트로 토였으나 인근 산에 있던 철광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토사에 휩쓸려 온 광물이 뒤덮었다. 토양의 속과 겉이 뒤집히면서 공기와 접촉하자 산화를 촉발시켜 원래 빛깔이 적색으로 변했던 것이다. 끼안티 클라시코 내부는 7천여 헥타르의 포도밭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안은 340군데 와이너리가 고유한 자연을 와인에 담아내는 거대 와인 산지다. 테라 로싸의 주인은 오직 두 군데 와이너리이며 이 중 하나가 레치 에 브로끼다.
<끼안티 클라시코 지역을 통틀어 오직 두군데 와이너리만 소유한다는 테라 로싸>
< 원래 수풀(lecci)과 나무 밑동(brocchi) 투성이의 들판이었던 테라 로싸 토양은 바스코에 의해 산조베제 밭으로 탈바꿈 했다. 사진 하단의 지도에 와이너리 위치가 그려져 있다.>
바스코의 와인이 빛을 발하기까지 30여 년이 걸렸다. 그의 고객은 이웃 그리고 독특한 맛에 열광하는 마니아들이었다. 2009년 그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고 딸인 사브리나와 그녀의 남편 잔카를로가 유산을 승계받는다. 이들은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고인이 일궈온 이상을 이어받기로 한다. 그리고 여태껏 은둔해 있던 고인의 와인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와인을 포장하지 않고 소량씩 판매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750ml 병에 병입했고 라벨 디자인과 로고를 전문가에게 맡겼다. 와이너리 이름은 고인과 30년 동고동락한 지명을 본 따 ‘레치 에 브로끼’로 정했다(와이너리 웹사이트 바로가기).
<레치 에 브로끼 로고>
라벨에는 포도밭을 배경으로 한 말과 나뭇잎이 그려져 있다. 브로끼는 나무 밑동이란 본뜻 외에도, 방언 사전에 따르면 시에나 팔리오 말 경주에 참가 자격이 박탈된 말을 뜻한다. 나뭇잎은 레치(수풀)를 상징한다. 라스투루치 가족은 팔리오의 열혈 팬으로 해를 거르지 않고 팔리오 경기를 참관한다.
메를로와 카베르네 품종을 뽑아내고 토스카나 품종인 산조베제, 콜로리노, 말바시아 네라, 카나이올로 네라로 대치하는 수종의 토착화를 이뤘다. 한편으로는 환대 와인으로 명성이 높은 빈산토 전통을 잇기로 하는데, 세 달 건조한 산조베제로 만든 오키오 디 페르니체(Occhio di Pernice) 빈산토다. 나이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마드리 이스트가 담긴 카라텔리 통 안에 포도즙을 넣고 3년 묵힌 후 세상 빛을 본다. 1년에 5백 ml사이즈 , 3백 병만 출시하는 희귀 아이템이다.
사브리나와 잔카를로 부부는 와인은 양조장이 아니라 포도밭에서 온다는 철학을 굳게 믿고 있다. 와인의 미래는 흙 본래의 건강한 상태 복구에 달려 있으므로 밭에서 포장까지 전 과정에 유기농법을 도입했다. 2019년도에 유기농 마크를 단 끼안티 클라시코가 첫 선을 보였다. 기후변화 징후가 짙어지면서 남 토스카나에 우박피해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우박의 빈도에 따라 포도 수확량 변동이 심하므로 전정할 때 건강한 씨눈만 가지에 남기는 식으로 수확량 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공력을 들인 첫 와인들이 출시되자마자 좋은 반응이 쏟아졌다. 20 12년 끼안티 클라시코는 AIS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 밀라노 지부가 주최한 카스넬누오보 베라르덴가 지역 최우수 끼안티 클라시코 중 하나에 선정되었다. 또한 2012년도 끼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일 끼오르바는 Wine Enthusiast로부터 91 점을 받았다.
최근 들어 오너 부부의 장남, 조반니가 양조 대학을 마치고 합류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조반니가 막 뛰어들었을 무렵 한 가지 의문이 그를 따라다녔다. ‘우리는 왜 화이트 와인이 없을까? 산조베제라고 꼭 레드 와인을 만들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하여 탄생한 와인이 산조 Sangiò 화이트 다. 해발고도 420미터에서 천천히 익은 산조베제 일부를 덜어내어 압착한 즙을 저온 발효해 완성했다. 산(San)은 산조베제와 조반니의 조(giò)를 합친 단어다. 올해 Vinitaly 박람회에서 공식적인 출시를 발표했으며 첫 빈티지(2020년)는 이탈리아 와인 메거진 Rosso Rubino.tv로부터 92 점을 받았다. 라벨에는 고목을 뚫고 힘차게 나오는 말이 그려져 있는데 말은 조반니를 상징한다. 가족의 말 사랑은 이 라벨로 다시 한번 입증됐다.
레치 에 브로키는 4헥타르의 포도밭과 6헥타르의 올리브 농장을 경작하는 아티산(Artisan) 와이너리다. 포도밭은 와이너리 주변에 원형극장 형태로 모여있어 건물 안에서 나무 상태를 일일이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뛰어나다. 420미터의 해발고도는 인근 봉우리의 키를 훌쩍 넘어 연중 바람이 불어온다. 덕분에 곰팡이 전염 확률이 낮고 큰 일교차는 포도 완숙 기간을 늘려 수확철은 9월 말이나 10월 초에 맞이한다.
레치 에 브로키의 아이콘 와인들
끼안티 클라시코 안나타 타입은 산조베제(90%), 카나이올로(10%)를 따로 발효한 후 블랜딩 한 와인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했다. 2019 빈티지는 독일 와인평가 기관인 Falstaff가 89점을 줬다. 체리, 딸기, 오렌지 같은 달콤한 내음과 철과 토양의 묵직한 향기가 따라온다. 미네랄의 짠맛이 미각을 정리해 주며 바다향이 내비친다. 타닌이 유려하며 단단한 골격이 구조를 받쳐준다.
끼안티 클라시코 Ragonaia 2019 년 빈티지는 라고나이아 밭에서 자란 23년 수령의 산조베제 크뤼 다. 10월 초에 수확한 포도를 뚜껑을 닫지 않은 오크통 안에서 알코올 발효했다. 발효 중 와인과 부유물의 분리를 막기 위해 막대기로 휘저으면서 껍질 속 아로마 성분을 침출했다. 젖산 발효를 마친 와인을 바리크에서 12개월 숙성했다. 체리, 라즈베리, 초콜릿의 달콤함과 말린 꽃의 은은함이 조화를 발한다. 광물과 이끼 향이 천천히 피어나면서 감미로움이 돈다. 마치 비 온 후 젖은 가을 숲이 발산하는 들꽃, 축축한 흙, 수풀이 뒤섞인 내음이 난다. 유려한 타닌과 신선한 산도, 미네랄이 밸런스를 이룬다.
리제르바 일 끼오르바는 레치 에 브로끼의 핵심이다. 일 끼오르바는 바스코 생전의 별명이자 그를 추모하는 와인이기 때문이다. 뜻이 ‘큰 머리’인데 그의 머리가 유난히 커서 붙여진 별명이다. 작황이 좋은 해에 완숙도가 빼어난 산조베제를 선별해서 만든다. 2010년에 첫 출시한 이래 우박피해를 입은 2015년만 빼고 매년 출시했다. 산조베제(90%), 콜로리노와 카나이올로 (10%)를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별도로 알코올 발효와 젖산 발효한 후 블렌딩했다. 블랜딩 한 와인은 슬라보니아산 보테에서 24개월 숙성한 후 시멘트 탱크로 옮겨 잠시 안정을 취한 다음 병입했다. 2017년 리제르바는 체리, 자두, 바이올렛, 초콜릿, 커피 향이 풍성하다. 타닌이 유연하며 산뜻한 산미가 돋보인다. 풀 보디는 촘촘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2012 ~ 2013년 연속 Wine Enthusiast 부터 91점과 88점을 얻었다. 2013년은 Falstaff로부터 90점을, 2017년은 Decanter로부터 93점을 얻었다.
그란 셀레지오네 Celerarium은 매년 763병 정도만 나오는 한정 아이템이다. 40일 알코올 발효 및 침용을 끝낸 와인을 시멘트 탱크에 옮겨 젖산 발효한 후 두 번 사용한 배럴에서 30개월 숙성했다. 2013빈티지 와인은 타바코, 체리, 낙엽, 해조류, 정향과 감초 등의 향신료 향이 은은히 피어오른다. 특히 철, 흙, 버섯 등 습한 향기가 중후함을 풍긴다. 경쾌한 산도와 파워 있는 질감, 실크같은 타닌 등 숙성력이 돋보인다. 2013 빈티지는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91점을 받았다.
Bianco ITG Sangio’ 2020 와인은 끼안티 클라시코와 같은 밭에서 나온 산조베제를 사용했다. 새벽에 수확한 산조베제를 압착한 후 포도즙의 70%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30%는 중간 정도로 구운 바리크에서 발효했다. 발효 후 따라내기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효모 앙금을 저어가면서 6개월 숙성했다. 저명한 이탈리아 와인 비평가는 산조를 두고 “위대한 레드가 나오는 대지가 낳은 산조베제 화이트(Un grande bianco nella terra dei grandi rossi)”라고 극찬했다. 바이올렛, 라벤더, 레몬, 로즈마리 등 순도 높은 화이트 와인의 여운이 놀랍다. 섬세한 실루엣이 와닿으며 혀에서 미디엄 정도의 무게감을 느낀다. 토양의 실체인 미네랄이 도드라지며 산미는 화사한 꽃의 여운을 품고 있다.
와인과 오너 가족의 환대가 만나는 곳,
아그리투리스모
라스투르치 가족은 와이너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아담한 규모의 아그리투리스모를 운영하고 있다. 16세기의 귀족 저택을 토스카나 농가풍으로 개조해 소박함과 청결함이 배어있다. 새벽 산책은 절대고요와 마주하는 시간이다. 새벽의 경내는 침묵이 휘감으며 저 멀리 세네시 크레테 능선이 빗으로 쓸어내린 듯한 포도밭과 사이프러스 열을 보여준다. 정원 중앙에는 풀장을 배치해 썬베드에 드러누우면 바람결 따라 올리브 가지가 서로 비벼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켠에는 담백한 토스카나 요리가 주 특기인 레스토랑을 들였다. 지역산 유기농 농산물만이 구현해 낼 수 있는 맛의 요리와 주인장 부부의 와인을 매칭하기에 적소다. 조식은 사브리나가 직접 준비하는데 단맛과 짠맛이 어우러진 풍성한 뷔페가 차려진다. 이곳에서 팔리오 경마와 14세기 프레스코화,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가 랜드마크인 시에나가 차로 40분 거리에 있다. 아그리투리스모는 토스카나 중부의 끝자락과 남동부 어귀가 교차하는 축에 놓여 있으며 남 토스카나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라면 베이스 캠프로 삼으면 좋을 듯하다. 자세한 정보와 예약문의는 Podere Casato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