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테프리마 토스카나 2022 취재기 [2부]_ 끼안티 클라시코 콜렉션”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치스테르나 광장. 산지미냐노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다. 광장 이름은 중앙에 있는 우물(치스테르나)에서 유래했다. 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는 중세탑이 인상적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유럽 의식은 순례길 위에서 생겨났다”고 했다. 살아있는 모든 유기체에게 열려 있던 관대한 순례길은 순례자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그가 떠나온 곳의 풍습이 따라다녔다. 그렇다면 괴테의 유럽은 가톨릭 교인들이 머물던 곳에 흘러든 낯선 문화가 타협과 적응을 반복하면서 피운 꽃이 아닐까. 순례길은, 이것이 없었다면 한 곳에 갇혀 있을 뻔했던 포도를 이역만리 타지로 옮겨 놓았다. 포도의 여정 길에는 타 품종끼리 교배가 일어났고 주요 품종이 소수 품종을 삼켜버리는 약육강식도 벌어졌다.
<단테 홀 Sala Di Dante. 산지미냐노 시청 2층에 위치하며 안테프리마 기간 동안 베르나차 디 산지미냐노 관련 마스터클래스가 열린다>
<안테프리마 토스카나 2022>의 피렌체 다음의 기착지는 산지미냐노다. 토스카나의 보석 같은 와인을 만나러 가는 순례 여정에서 세 번째 구간이다. 행사 이름을 ‘안테프리마 베르나차 디 산지미냐노’로 정했을 정도로 베르나차 와인은 산지미냐노 그 자체다. 행사의 꽃인 마스터클래스를 시장의 직무실 바로 위층에 자리한 단테 홀에서 열만큼 베르나차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이번 마스터클래스는 ‘인류학과 테루아’란 주제로 열렸다. 품종학과 유전자 분야에서 이탈리아 최고 일인자로 손꼽히는 아틸리오 시엔자(Attilio Scienza) 교수가 진행했다. 그는 유럽 순례길 중 종주거리로는 최장인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를 예로 들며 유럽 품종의 친인척관계나 포도의 기묘한 행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키워드라고 했다.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비아 프란치제나가 있다.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으로 갈라지던 산티아고 길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한 길로 모아진다면, 영국 캔터베리에서 출발한 비아 프란치제나는 프랑스, 스위스를 품은 중서부 유럽을 관통하다가 알프스를 등지고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를 지나 로마로 끝나는 일직선 길이다. 비아 프란치제나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9세기경으로 가톨릭 신자의 성지인 로마까지 1,700킬로미터를 안내하던 길이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수공업품과 전쟁물자를 실은 마차가 다니는 중세 고속도로 구실을 했다.
시엔자 교수에 따르면 비아 프란치제나는 중세 유럽의 절박함이 낳은 일종의 정신적 안식처였다. 북유럽 야만인들의 방패막이였던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국경 수비가 뚫리면서 유럽은 일순간 암흑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999년 지구 종말론이 가세하면서 현실 도피 현상은 극심해졌다. 사면초가에 빠진 이들에게 교황이 있는 로마는 내적 평온의 이상향이었다. 이러한 평정은 검소한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 수십 Km를 걸으면서 입으로는 기도문을 매일 반복하는 강행군 끝에 맛보는 감로주였다.
<비아 프란치제나 Via Francigena 종주구간. 이미지 출처 Wikipedia>
프티 아르빈은 중앙유럽이 이탈리아에 전파한 대표 품종 중 하나다. 원래 스위스의 토착품종인데 비아 프란치제나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발레다오스타주에 정착했다. 오랫동안 학계는 북동 이탈리아 트렌티토 알토 아디제주의 테롤데고와 라그라인 유전자 지도에서 피노 누아 DNA가 발견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풍미가 전혀 다른 건 둘째 치고, 피노 누아의 고향인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613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비아 프란체지나가 말끔히 해소해 주었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하강하던 길은 알프스를 횡단하는 비아 라에티카(Via Raetica)와 마주친다. 경로대로라면 남쪽으로 향해야 했을 피노 누아가 알프스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트렌티노에 도달한 거다. 똑같은 경로를 거친 스위스산 레제 Reze’ 품종도 트렌티노의 토착품종과 만나 그로펠로와 노시오라를 낳는다.
역사는 반복한다는 진리는 와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기후가 변하면 포도밭도 품종을 바꿨다. 품종이 바뀌면 양조법도 거기에 맞는 새 기술을 내놓는 게 순리. 신 양조법은 순례길로 쏟아져 들어와 유럽 곳곳에 퍼졌다. 9세기에서 13세기까지는 습한 중세기로 이때는 레드 품종이 번성했다. 소 빙하기인 1528~1546년 사이는 베르나차, 말바시아처럼 추위에 적응한 청포도가 농부의 사랑을 받았다. 1568년 이후 40년간 기온이 상승하자 적포도가 다시 출현했다.
포근한 기후와 비가 내리는 시기가 길어지자 페르골라 재배방식이 등장한다. 페르골라는 목재 구조물로 모서리마다 말뚝을 땅에 박은 사각형 끝을 같은 재료로 짜 맞춘 지붕이 얹혀 있다. 지표와 열매가지 간격이 넓게 벌어지면 그만큼 포도가 습기로부터 먼 곳에 열매를 맺는 이치다. 페르골라에서 따 온 포도는 널찍한 나무 통에 부어지고 이어 익숙한 풍경이 벌어진다. 아이들과 처녀들이 달려들어 춤추듯 발로 포도를 압착한다. 소빙하기에 접어들면 이런 정경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땅이 복사한 태양열을 최대한 흡수할 수 있게 지표면과 열매가지 간격이 좁아진다. 몸집도 줄어들고 성장을 억제해 최대한 열손실을 막았는데 이런 재배법을 알베렐로라 한다. 압착한 즉시 포도즙 표면에 살얼음이 필 정도로 혹독한 날씨는 외부 공기를 차단하는 압착기 발명으로 이어졌다.
추위에 떨던 중세 이탈리아는 베르나차와 말바시아 와인으로 몸을 덥혔다. 베르나차는 원산지가 이탈리아고 국경을 넘어본 유례가 없는 이탈리아적인 품종이다. 반면 말바시아는 그리스 품종이고 전통 와인 생산국이면 한번 정도는 양조 역사를 남겼을 정도로 글로벌하다. 말바시아를 낳은 건 그리스지만 이를 전 세계에 퍼트린 건 베네치아다. 베네치아가 크레타 섬을 지배하던 시절, 말바시아 와인은 모넨바시아(Monenvasia) 항구로 모여든 후 서유럽으로 향했다. 즉, 말바시아의 어원은 출항지인 모넨바시에서 유래했고 몇 번의 음운변화를 겪은 후 지금의 단어로 정착한 것이다. 베르나차는 리구리아주 친퀘테레에 속하는 베르나짜 항구에서 선적됐고 그런 연유로 베르나차라 불렀다. 상선의 소유자는 중세와 근세 지중해 무역권을 두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다투던 제노바 공화국이다.
강대국의 후광을 업은 두 와인은 중세 와인 세계를 평정했다. 노란빛이 돌고 향기만 비슷하면 무조건 베르나차 아니면 말바시아라 했다. 확인된 짝퉁만 해도 베르나차가 7개, 말바시아는 20개도 넘었다. 짝퉁 베르나차가 번성하던 곳은 에밀리아 로마냐주와 비아 프란치제나가 겹치는 피아첸자 인근 지역이었는데 세 종의 청포도가 본명을 포기했다. 적포도도 유행을 보고만 있지 않았는데 말바시아 네라와 베르나차 네라가 그 경우다. 이름을 포기하고 흑색을 뜻하는 형용사 네라 nera를 곁들이는 식으로 베르나차 유행에 가담했다.
마스터클래스에 이어 비아 프란치제나 화이트 와인 시음으로 이어졌다. 순례자들이 이탈리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로마를 벗어날 때까지 맛보았을 와인들이다. 모두 7종류로 1천 년의 시공을 넘나들며 꾸준히 역사의 한 귀퉁이를 채운 와인들이다. 약간 부풀린다면 산 지미냐노에서 세기적 밀레니엄 버티칼 시음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상단 좌측에서 시계방향으로. 프티 아르빈,에르바루체, 말바시아 디 칸디아 아로마티카,티모라쏘, 베르멘티노, 스페르골라 품종으로 만들었다>
발레다오스타 주 프티 아르빈 품종으로 만든
Valle D’Aoste DOC Petite Arvine, 2020
(생산자: Ottin 와이너리)
청정한 노란빛이 돌며 파인애플, 복숭아, 사과, 사루비아의 밝은 느낌이 감돈다. 산미는 상큼한 부드러움을 보이며 감귤류의 여운이 감돈다. 미네랄의 단단함 속에는 보디감이 숨겨져 있다.
피에몬테 주 에르바루체 품종으로 만든
Erbaluce di Caluso DOCG Le Chiusure 2020
(생산자: Favaro와이너리)
레몬빛 와인에 허브, 생강, 레몬, 흰 꽃, 사과, 자몽의 아로마가 피어난다. 입안에서 생강향이 지속적으로 맴돌며 아몬드의 고소함이 어우러진다. 발랄한 산미와 깔끔한 미네랄 풍미가 청량감을 높인다.
피에몬테주 티모라쏘 품종으로 만든
Derthona Timorasso DOC 2019
(생산자: Vigneti Massa 와이너리)
호두, 열대과일, 복숭아, 샤프란, 마르게리타 꽃 향이 또렷하다. 바다내음과 페트롤 향이 복합미를 준다. 산미와 미네랄이 내는 밀도감이 느껴진다. 입에 감도는 미세한 타닌이 긴장감을 증진한다.
에밀리아 로마냐주 말바시아 디 칸디아 아로마티카 품종으로 만든
Colli Piacentini DOC Malvasia Tasto di Seta 2020
(생산자: Castello di Luzzano 와이너리)
아카시아, 흰 꽃, 복숭아, 망고, 배, 꿀 아로마가 매력적이다. 약간의 잔당이 매끄러움을 주고 산미는 상쾌한 분위기를 띄운다. 미네랄의 감칠맛과 미디엄 보디가 멋진 균형을 이룬다.
에밀리아 로마냐주 스페르골라 품종으로 만든
Colli Di Scandiano DOC Brezza di Luna 2020
(생산자: Tenuta di Aljano 와이너리)
효모와 오랜 숙성만이 낼 수 있는 구운 빵과 비스킷 향이 그윽하다. 감귤류, 흰 꽃, 약초의 은은한 향이 이어진다. 짭짤한 풍미, 예리한 산미가 돋보인다. 다채로운 맛이 어우러져 탄탄한 보디감을 뽐낸다.
리구리아주 베르멘티노 품종으로 만든
Colli di Luni DOC Vermentino Etichetta Nera 2021
(생산자: Cantine Lunae 와이너리)
후추, 레몬, 청사과, 허브, 복숭아, 약초의 상큼함과 잔디의 풋풋함이 매력적이다. 미네랄의 감칠맛과 산미의 신선함이 입안을 채운다. 타닌의 수렴력이 돋보이며 혀 밑으로 무게감이 깔린다.
이제 토스카나주의 베르나차디 산지미냐노 와인을 살펴볼 차례다.
<상단 좌측에서 시계방향으로. Il Colombaio di Santa Chiara, Fattoria San Donato, Tenuta La Vigna, Panizzi, Casa Lucii, Signano 와이너리>
Vernaccia di San Gimignano DOCG Selvabianca 2020
(생산자: Il Colombaio di Santa Chiara 와이너리)
우아한 허브, 흰 꽃, 복숭아, 효모 향이 스며 나온다. 산미는 짜릿하며 사루비아 향을 머금고 있다. 매끄러운 미네랄이 쌉쌀한 맛과 조화를 이룬다. 잘 다듬어진 조각처럼 빈틈없는 구조가 매력적이다.
Vernaccia di San Gimignano DOCG 2020
(생산자: Fattoria San Donato 와이너리)
농익은 살구, 바이올렛, 핑크빛 장미 향을 피운다. 산미에 상큼한 꽃 향기가 배어 있다. 청량감이 있는 산미와 다채로운 맛이 잘 어우러져 복합미가 뛰어나다.
Vernaccia di San Gimignano Riserva DOCG 2018
(생산자: Tenuta La Vigna 와이너리)
아몬드의 고소함, 청사과, 사루비아 향이 경쾌하게 어우러진다. 높은 산도, 짭짤한 미네랄 풍미가 화음을 이룬다. 목 넘김이 부드러우며 마신 뒤에 매끄러운 감촉이 혀를 감싼다.
Vernaccia di San Gimignano DoOCG Riserva La Ginestra 2017
(생산자: Signano 와이너리)
망고, 바나나, 노란 꽃, 샤프론, 슈크림의 감미로운 향이 난다. 풍부한 맛과 질감이 인상적이다. 산미가 경쾌하며 복합적인 맛이 잘 어우러져 깊은 맛의 세계를 보여준다.
Vernaccia di San Gimignano DOCG Riserva Mareterra 2016
(생산자: Casa Lucii 와이너리)
바다내음, 들꽃, 프리시아, 금작화, 숲, 페트롤의 싱그러운 내음을 낸다. 예리한 산도와 미디엄 보디가 주는 꽉 짜인 구조감이 격조 있다. 미세한 타닌과 산미가 어우러져 내는 신선함이 돋보인다
Vernaccia di San Gimignano DOCG Riserva 2012
(생산자: Panizzi 와이너리)
산뜻한 노란 꽃, 아몬드, 페트롤 향이 매력적이며 십 년이 지났건만 금방 수확했을 때의 순수함과 생생함이 펼쳐진다. 미네랄과 조화를 이룬 미디엄 보디, 아삭한 산미는 와인에 생기를 준다. 감귤류와 망고의 여운이 퍼지면서 입안이 황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