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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표

따스트뱅에 녹아 내린 루비

본은 그 도시 지하 전체가 까브로 이루어졌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많은 와이너리가 있다. 본에서 까브의 규모가 가장 크다는 네고시앙인 Patriarche을 방문하였는데 어찌나 내부가 복잡하게 미로처럼 이루어져 있는지 길을 잃게 되면 살아서 나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본에서 까브를 투어할 때에는 입장할 때 그 네고시앙의 문양이 새겨진 작은 타스트뱅을 주는데 이것은 까브 내에서 와인을 시음할 때 쓰다가 기념으로 갖는 것이었다. 항상 와인 글래스로만 시음하다가 타스트뱅으로 시음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무척 흥미로웠다.

프랑스 속담에 "부르고뉴 와인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르고뉴 와인이 워낙에 섬세하고 민감해서 몇날 며칠을 두고 흔들리고 덜컹거리며 높은 온도에서 시달리며 다른 지역으로 수출이 될 때에는 그 고유의 맛과 향이 변질되기 쉽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나 역시 항상 서울에서 부르고뉴 와인을 마실 때에는 뭔가 부족하고 비어있는 느낌을 받았었기 때문에 부르고뉴의 지하 까브에서 테이스팅 하는 것에 무척 기대를 많이 갖게 되었다

주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 시음하도록 열어놓은 모든 와인을 다 시음할 수는 없었고 그중 알록스 코르통, 샹볼 뮤지니, 포마르, 본느 로마네, 즈브레 샹베르탱, 뉘 상 조르쥬 등 그랑 크뤼급의 와인들만 조금씩 시음하였다.


확실히 현지에서 마시는 와인, 게다가 운치 있는 지하 까브에서 타스트뱅에 시음하는 와인은 더 풍부한 향과 맛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까브 내부는 어두웠지만 시음을 위해 군데군데 촛불을 밝혀 두었는데 은빛 타스트뱅에 담긴 채 촛불에 비춰진 와인은 루비를 녹여놓은 것처럼 아름다웠고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이 살아 숨쉬는 와인들은 살짝 매콤하면서도 톡톡 튀는 산도를 가졌고 뒷맛에서 달짝지근한 피니쉬를 남겼다. 역시 와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백미는 현지에서 생생한 와인을 마시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된다.

어두운 까브에는 세월의 숨결을 간직한 채 언젠가 와인을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시음될 날을 기다리며 잠자고 있는 와인병들이 두꺼운 먼지를 옷처럼 입은 채 쌓여 있었고 아직 병입 되지 않은 퀴베(Cuvee-포도즙 상태)들은 오크통 속에서 저마다의 향기를 만들기 위해 숨쉬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와인을 마시며 발그레한 얼굴로 저마다의 느낌을 주고받고 있었고 어느새 국적과 나이를 초월하여 와인을 화두로 즐거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두운 까브에서 투어를 마치고 나오자 중세의 고도 본에는 가는 빗줄기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비는 꼭 안개처럼 본 시내를 뿌옇게 채우고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본의 밤거리에서 와인의 향기에 취해 걷고 있으니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다른 시대로 온 것처럼 느껴졌다. 여행이란 이렇게 자동차와 엘리베이터의 틈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여유로움에 한껏 취해보는 것이리라...

- 조 희 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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