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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표

로버트 몬다비社(Robert Mondavi Winery)는 외국의 명성 있는 와인가문과 제휴하여 여러 좋은 와인을 많이 생산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탁월한 하나가 보르도의 고 남작 필립 롯드실드와 제휴하에 탄생한 세계 희대의 와인 오퍼스 원(Opus one)이다. 이 와인을 탄생 시킨 두 장본인 중 로버트 몬다비를 그의 자서전 `기쁨의 수확`(Harvests of Joy)을 통해 살펴보고 그의 혼이 담긴 와인 오퍼스 원(Opus One)을 소개하고자 한다.

1943년 로버트 몬다비의 아버지 세자르(Cesare)는 몬다비와 그의 동생 피터(Peter)와 같이 운영하는 조건으로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세인트 헬레나의 찰스 쿠루그(Charles Krug) 포도원을 구입하였다.

당시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은 활기도 없었고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몬다비는 유럽의 여러 와인 생산국을 여행하며 이들의 전통과 미국의 신기술을 접목시킨다면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또한 와인을 본격적인 사업으로 하려면 여행, 판촉, 접대에 적당한 돈을 지출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늘 새로운 유형의 와인, 새로운 유형의 홍보, 그리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고민했다.


다음은 그가 자서전 "기쁨의 수확"에서 밝힌 자신의 와인관이다:

"나파밸리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와인은 생활비를 버는 데 적당한 비즈니스였다. 그러나 내게는 좀 다르다. 내게 있어서 와인은 항상 보다 큰 대상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와인은 내게 있어서는 정열이다. 와인은 가족이자 친구이다. 와인은 마음의 온정이요. 정신의 고결함이다. 와인은 예술이요. 문화이다. 와인은 문명의 본질이요 생활 예술이다."

그는 또한 2000년전 페트로니우스(Petronius)를 인용하여 "와인은 인생이다.(Wine is life.)"라고 정의하며 만족스러운 삶의 부수적인 요인 이상의 와인을 꿈꾸었다.

그리고 1962년부터 세계의 많은 훌륭한 와인 생산 지역을 방문하고 그들이 어떻게 와인을 생산하는 지를 배웠다. 보르도, 부르고뉴, 토스카나, 독일의 모젤 지역등 세계의 가장 유명한 양조장을 답사하고 그곳 포도 농장과 저장 창고와 장비를 눈여겨 보았다. 몬다비는 와인 양조자들과 오랜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들의 와인을 시음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포도 농장, 저장 창고, 시음장에서 훌륭한 와인 창조과정에 반영된 정신, 정열, 책임을 배웠다. 이들 눈에 비친 와인은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몬다비는 보르도의 일등급 샤또들을 비롯한 이들 와이너리에서는 미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전혀 다른 포도 재배방식과 와인 양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히려 그에게 나파밸리 와인의 가능성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자신이 느꼈던 바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의 토양, 기후, 접목은 유럽의 조건과 같이 좋으며 또한 많은 면에서 더 좋다. 우리 또한 훌륭한 와인을 양조할 올바른 포도 품종, 즉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삐노 누아(Pinot noir), 샤도네이(Chardonnay),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유럽인들의 기술 혹은 장인 정신과 전통이지만, 빨리 배울 수 있고 또한 와인의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귀중한 도약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나는 미국의 기술 경영 기법, 시장과 구세계의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전통과 우아함의 접목을 원한다. 우리는 연구, 개발, 새 장비에 투자할 정열, 신념, 용기가 필요하다. 나파밸리와 캘리포니아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훌륭한 와인과 어깨를 나란히 경쟁할 수 있는 와인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Robert Mondavi

그가 여행을 통해 나파 밸리의 와인의 잠재된 가능성을 예견했고 이를 실현시킬 용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동생 피터와 다른 가족 주식 소유주들의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은 몬다비가 추진하는 일들이 위험한 동시에 무의미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그의 노력이 이미 아름답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쿠르그 농원에서 가족이 영위하고 있는 안락한 생활과 훌륭한 사업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 작업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몬다비는 상당히 답답해 했으며, 주식의 80% 이상이 다른 가족의 명의로 되어 있는 쿠루그에서는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와 창조력을 백분 발휘 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그의 아내 마가렛(Margrit)와 아이들 뿐.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좌절과 다른 가족 구성원들간의 마찰은 커질 뿐이었다.

Margrit &
Robert Mondavi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이태리 수상을 위한 백악관 공식 만찬에 저명한 이태리 출신 미국인의 일원으로 로버트 몬다비 내외를 초청한 것이었다. 이 초청은 찰스 쿠루그 양조장에는 대단한 영예요 황금 같은 좋은 기회였다. 케네디 대통령과 부인 재키는 미국에서도 새로이 훌륭한 와인이 생산됨을 이태리 지도자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 같았고 이 자리에 초청되었다는 것은 더 없는 영광이자 홍보의 기회였다.

그러나 몬다비 내외는 이 초청을 받고서 대단히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 대단히 신경이 쓰였다. 그들은 부자도 아니었고 큰 도시 사람처럼 세련미도 없었다. 또한 자그마한 가족 회사를 운영하는 소 도시민이었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으로 둘러싸인 카리스마적인 대통령과 그의 유명한 부인이 있는 백악관에서 그들은 어떻게 보여질까? 그의 부인 마가렛은 더 구체적인 걱정을 하였다. 무슨 드레스를 입을까? 어떤 핸드백? 어떤 액세서리를 해야하나? 코트는 또 어떤 것을 입어야 하나? 그녀가 특별히 걱정을 한 것은 겨울 코트였다. 캘리포니아 세인트 헬레나의 온화한 겨울 날씨에 입는 코트는 있으나 동부 워싱톤의 추운 날씨에 적합한 코트는 아니었고 또한 파리의 유명 디자이너에게 항상 맞추어 입는 영부인의 고상한 품위와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몬다비의 연봉이 2만4천불인데도 1천5백불을 그녀의 코트 값으로 책정하였다. 일생에 단 한번 뿐인 기회를 위한 과감한 투자였다.

그러나 이들이 훗날 비난을 받게 되듯, 함부로 돈을 낭비한 것을 아니었다. 여러 상점에서 여러 다른 옷을 입어보았고 예산과 행사 어울리는 코트를 찾으려고 고심했다. 그러던 중 한 여점원이 마가렛에게 잘 어울림과 동시에 백악관 행사에 꼭 맞는 밍크 코트를 가져왔다. 그러나 가격이 너무 비싸 씁쓸하게 상점을 나와야 했었다. 몇 주 후, 우연히 그 상점을 들렸을 때 전에 입어보았던 똑같은 밍크코트가 세일가(2천5백불)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대단한 유혹에 빠져들었다. 과시냐? 검약이냐? 비록 세일 가격이지만 밍크코트 구입은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오랜 고민과 숙고 후에야 그들은 밍크코트를 계약할 수 있었고 이듬 해까지 불필요한 지출을 중지시켰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생 피터 몬다비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결정이 사치이고 무책임한 행위로 보였으며, 자신들이 초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은 여러 해 동안 부인들 간에 시샘 거리가 되었다. 그도 그랬던 것이 로버트 몬다비 내외가 결국에는 백악관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식 만찬이 개최되기 전 1963년 11월 22일 대통령이 암살되었던 것이다. 이태리 수상의 미국 방문은 다음으로 연기되었고 따라서 그날은 대통령 린든 존슨의 첫 공식 만찬이 되었다. 결국 비싼 밍크 코트는 빛을 보지 못했고, 피터 내외의 눈에는 더욱 더 비난 받아 마땅한 행동으로 비춰졌다.

그렇게 불만이 쌓이던 어느 날, 1965년 11월 어느날 몬다비의 대가족 전부가 모두 양조장에 모였을 때 피터와 로버트 둘은 말다툼을 시작하였다. 피터가 로버트에게 여행과 판촉에 회사 돈을 너무 많이 낭비한다고 비난하면서 로버트에게 양조장의 돈을 가져간다고 힐난하고 밍크코트를 살 수 있는 여유가 어디서 생겼는지 따졌다. 로버트는 어떻게 친동생이 형인 자신의 노력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도둑놈 사기꾼으로 몰아세울 수 있는 지 의아해 했고 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것 같이 실제로 치고 박고 떠들썩하게 싸웠다. 싸움이 끝에 이들은 사과도 용서의 악수도 없었다. 이 싸움은 둘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켜 법정 싸움으로까지 번졌고, 결국 1965년 로버트가 찰스 쿠루그 양조장을 떠나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홀로 새로운 와이너리를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자신의 포도원을 설립한다고 결정을 하였을 때 마치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고 자서전에 쓰고 있다. 그제서야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길과 목표를 분명히 계획할 수 있었고 자신의 재능, 재원, 진취적인 기상과 기지에 따라 성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작은 어린 아이 같이 되어 정열이 솟구쳐서 산을 오를 준비가 되어 있고 세계의 정복과 목표를 향해 전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1966년에 Robert Modavi Winery라는 이름으로 그가 새로 설립한 포도원은 유럽의 장인 정신과 전통을 최근의 미국의 기술, 경영 시장기법과 결합시켜 훌륭한 세계 수준의 와인을 만들 것을 목표로 했다. 또한 포도농원에도 와인과 같은 심혈을 기우려 전 세계의 관광객과 와인 애호가의 마음을 끄는 장소로 만들고 매일 관광객을 와인 시음이나 관광 그리고 교육 행사에 초대해서 와인과 음식 궁합의 진가를 깨닫게 도와주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1930년대 후반 이래로 이같은 일은 나파밸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회의적인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새로운 포도 농원을 시작해? 세계의 훌륭한 와인에 버금가는 와인을 만들어? 전 국민이 먹고 마시는 습관을 개조해? 하며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 그러나 로버트는 이들이 두려워했던 위험과 장애를 모두 이기고 오늘날 전세계인들의 찬사를 받는 오퍼스 원(Opus One)을 비롯한 수많은 고급 와인을 만들어냈다.

20여년 역사의 Opus One

1970년 하와이에서 로버트 몬다비와 바론 필립 롯드쉴드(Baron Philip Rothschild)가 만났을 때 바론 필립이 먼저 합작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1978년 바론 필립이 로버트 몬다비를 보르도에 초청할 때까지는 진전이 없다가 두 사람이 만나고 한시간도 채 안돼 합작의 기본 원칙이 합의가 되었다. 1979년 무통 롯드쉴드의 와인 양조자 루시앙 시오노(Lucien Sionneau)와 로버트 몬다비社의 티모시 몬다비 (Timothy Mondavi)의 합작 하에 첫 빈티지(생산년도)가 로버트 몬다비 양조장에서 만들었다. 그리고 1980년 로버트 몬다비와 샤또 무통 롯드쉴드의 남작 필립 롯드쉴드가 역사적인 합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Opus One(오퍼스 원)은 50대 50의 자본 합작으로 와인의 정신과 특성에서 그 어떤 와인보다도 훌륭한 야심작이었고 지난 20여년 간의 세월 속에서 그 진가를 보여주었다.

Opus One은 양 합작사의 대표들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쉽게 인지 할 수 있는 라틴 어원의 이름을 원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남작 필립이 음악 용어인 작품(Work)이란 뜻의 "Opus" 라는 단어를 선택하였고 이틀 뒤 여기에 "One"이란 단어를 덧붙였다. 즉 Opus One이란 작품 1번(op.1)이란 뜻인 셈이다.

1984년에는 Opus One이란 이름으로 1979년과 1980년의 두 빈티지가 동시에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같은 해에 남작 필립과 그의 딸 필리핀(Philippine)과 로버트 몬다비는 건축가 세콧 존슨(Secott Johnson)에게 Opus One 양조장의 디자인을 의뢰하였고 이는 1991년 완공되어 현재 로버트 몬다비社 맞은 편에 그 신비로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1988년에는 남작 필립의 사망으로 그의 딸 여남작 필리핀이 가족 와인 사업을 인계 받았고 이때부터 1985년 빈티지가 프랑스, 영국, 독일와 스위스에 캘리포니아의 첫번째 초고가 와인으로 판매되었다. 1998년에는 Opus One을 전세계 65개국에서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1999년에는 Opus One의 설립 20주년 행사로 1979년 이후 20년간 생산된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만찬이 오크빌, 뉴욕, 파리와 런던에서 열었다.

Opus One의 전 양조 과은 세심한 주의 그 자체다. 포도의 깊은 맛을 내기 위해 촘촘히 심겨진 포도나무에서 일일이 손으로 수확한 포도는 약 15킬로 들이 통에 조심스럽게 그리고 포도알이 송이의 무게로 터지지 않게 운반된다. 양조장에서는 덜 익은 포도와 너무 익은 포도들이 손으로 구분되고 압착기에서 조심스럽게 얻어지는 포도즙은 달리 펌프를 사용하지 않고 바로 아래 층에 마련된 와인 탱크로 옮겨진다. 오퍼스 원의 양조과정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은 다른 곳의 60배정도라고 한다.

깊이 있는 색과 맛을 얻어내기 위해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에서 1차 발효와 긴 침용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오퍼스 원은 18개월간 새로운 프랑스산 오크 통에서 숙성된다. 숙성과정을 마친 후에도 바로 시장에 출하하지 않고 18개월간 더 병숙성을 해 소비자들에게 최고의 맛을 선사하는 배려를 하고 있다.

이러한 양조과정은 캘리포니아 와인 양조의 대변혁을 가져온 로버트 몬다비의 열정과 샤또 무똥 롯드쉴드의 전통의 표현이다. 이들의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세계 시장은 이처럼 좋은 와인을 선사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_이석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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