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잔의 선택은 와인매너의 시작




글 이상황 ㅣ 사진제공 와인북스


이 세상 이치가 그렇다. 어떤 것을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 자체뿐 아니라 그 주변의 것들에게도 마음이 가게 되어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은 오디오에 한 재산을 갖다 바치는데 주저하지 않고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기나 다구에 마음을 쏟는다. 이런 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칫 본말이 전도되어 멋 부리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원래 인간의 본성에 그런 구석이 있으니 그리 탓 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와인 쪽을 돌아보면 좋은 잔, 좋은 기물을 탐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음에 의아한 마음이 들곤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그릇의 빈 곳이 있음에 그릇의 효용이 있다고 했지만 좋은 기물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공간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좋은 와인은 그것을 담는 잔을 통해 빛이 나고, 좋은 잔은 그것을 채우는 와인 덕에 생명력을 얻는다. 요즘은 웬만한 곳이라면 다 쓸만한 잔을 사용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특급호텔에서조차 제대로 된 와인 잔을 구비하고 있지 못한 곳이 많았다. 납작하고 동그랗게 생겨 ‘토마토 잔’이라고 부르던 막 유리잔을 대부분 사용하던 시절이어서 모임을 할 때마다 잔을 챙겨 다녔던 기억이 있다.

대치동에 가게를 내면서 친분이 있던 호텔 출신의 소믈리에들이 ‘토마토 잔’을 닦던 식으로 잔을 닦다가 깨 먹은 와인 잔이 적지 않았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같지만 불과 6년 전 이야기다. 6년이면 벌써 까마득한 세월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세상이 하도 빨리 바뀌니까. 그 후 많은 와인애호가, 와인전문가들이 좋은 와인은 제대로 된 잔으로 마셔야 된다는 것을 알리고 납득시켜온 것이 나름 결실을 맺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좋은 잔은 좋은 매너를 만들고, 와인을 더 아름답게 완성시킨다.

헌데 요즘은 와인의 대중화를 논하며 마치 이런 사실에 반하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여기는 견해가 팽배하고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상식과 몰상식의 경계를 흩트려 놓고 선동적인 역설로 대중의 관심을 끌며 에티켓을 비아냥거린다. 일탈의 통쾌함은 줄 수는 있을지언정 이를 통해 진정한 와인의 대중화를 끌어 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낮은 데로 임하려는 자세도 좋겠지만 높은 곳으로 끌고 가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것이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이다. 사실 와인 잔은 아무렇게나 잡고 마셔도 된다.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이라고 와인에 다 정통한 것은 아니며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고상한 예절을 갖춰서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네도 그렇듯이 대통령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분은 듣기로 와인보다는 맥주애호가로 알고 있다. 조금 더 우호적인 쪽으로 해석하자면 와인이 낯선 문화에서 온 손님을 편하게 대접하려는 외교적 의도는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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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느 분이 파리에 가보았더니 길거리 카페를 가득 채운 프랑스 사람들이 저마다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아주 조막만한 잔에 스템도 아니고 보울(몸통)을 잡고 마시더라는 이야기다. 거기서 문뜩 깨달았다고 한다. “아하,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 보울을 잡고 마시는구나”. 멋진 결론이다. 그 잔은 스템을 거의 잡을 수 없게 되어 있는 ‘토마토 잔’보다도 작고 땅딸막한 막 잔이다. 스템이 길면 다루기 까다롭고 깨지기 쉬워 많은 손님들이 몰리는 대중적인 레스토랑에서는 쓸 수가 없다. 뻔한 객 단가에 잔 하나 깨지면 식사값보다도 더 나오는 잔을 어떻게 쓰겠는가 말이다. 그 잔은 보울 부분의 용량이 작아서 흔들 수도 없으며(그래서 그 사람들은 방정맞게 잔을 흔들지도 않는다) 향을 모아 둘 빈 공간조차 충분하지 않다.

와인 중에는 막 잔에 막 따라서 막 마셔도 되는 와인도 있다. 그것을 막 와인이라고 한다. 대개 그들이 마시는 하우스 와인은 막 와인이다. 우리의 소주나 막걸리와 비슷한 가격, 비슷한 개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 와인은 음미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그냥 마시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그러나 와인은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좋은 날이 오면 길거리 카페나 조촐한 비스트로가 아니라 품위있는 레스토랑에서 한껏 멋도 부리고 좋은 와인을 마신다. 좋은 잔에. 그리고 천천히 와인을 음미할 것이다. 물론 그들 중 몇몇은 여전히 보울을 잡고 마시겠지만.

한번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봉사와 다를 바 없다. 어쩌면 봉사보다도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남에게 틀린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으므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다. 그러기에 낯선 문화를 바라볼 때는 더욱 더 조심해야 한다.

와인의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음미하는 행위는 그리 어렵고 까다로운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공허한 예절이 아니라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절차이며 와인에서 감동을 얻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최소한의 기술이다. 전문가로 대접받는 사람들은 이 기술을 더욱 세련되고 정치하게 발전시켜야 하며, 와인을 멋지게 즐기고자 하는 모든 초심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와인의 대중화를 부르짖으며 막 와인, 막 술을 마시는 방식으로 하향평준화는 곤란하다.

잔을 아무렇게나 잡아도 상관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잔은 흔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흔들 수 없는 잔에 마시는 와인은 향기가 없다. 와인의 향기는 잔의 벽면에 눈물을 뿌릴 수 있어야 피어나는 정령 같은 것이다. 잔의 스템을 잡는 행위는 이렇게 기능적인 동시에 미학적이기도 해서 전세계 모든 와인전문가들이 권하는 그야말로 스탠다드한 파지법이다.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꼴불견으로 또 속물적으로 비춰진다면 그렇게 보는 사람의 시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저가의 와인을 별 생각 없이 마시는 사람은 잔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책을 사보지도 않으며 인터넷 검색을 통해 와인을 어떻게 마셔야 하는 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와인을 마신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정당하고 옳다. 그러나 자연의 조화와 인간의 땀과 의지가 집약된 고가의 와인을 마시면서 그 와인을 즐기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속물적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와인을 마시는가. 와인은 비싸다. 비싼 와인을 취하려고 마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막 와인을 마실 때라면 모르되 존중 받아 마땅한 훌륭한 와인을 마실 때는 그에 해당하는 예우를 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단지 와인뿐이 아니다. 모든 문화적 상품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예일 것이다. 그런 예우에 대한 기준과 지침이 ‘에티켓’이란 용어의 원래 의미라고 나는 알고 있다. 와인의 레이블을 굳이 에티켓이라고 부르게 된 배경에는 이런 함의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런지? 와인은 오랜 세월 인류가 만들어 온 문화의 집합체 일 수도 있으며 한낱 주정뱅이들의 취기를 부추기는 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잔을 잡는 손에 달려 있다.


글쓴이 _ 이상황
약 력 _ 와인레스토랑 베레종 대표
한국와인협회(KWS) 운영위원장
한국소믈리에협회 이사
와인나라 아카데미출강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출강
중앙대 산업교육원 와인전문과정 출강
프랑스 와인스쿨 CAFA전문가과정이수
국제와인작가연맹
(FIJEVFederation Internationale des Journalistes et Ecrivains des Vins et Spiritueux)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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