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무의식은 잡다한 추억으로 채워진 호수와 같다. 어느 순간 누군가 호수에 돌을 던지면 유영하고 있던 과거의 파편들이 호수 표면에 떠오른다. “36년 전 어느 시간대”에 화석 상태로 갇혀있던 아마데우스 영화를 끄집어낸 건 부르넬로였다.
부르넬로가 아마데우스와 무슨 상관있냐고?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지선우가 마셨던 와인이 화재가 되었던 적이 있다. 아마데우스 출연자 누구도 지선우 처럼 와인을 병 채로 마시지 않았다. 2백 년 전 오스트리아에서 살던 영화 주인공들이 그 이후에 등장한 부르넬로를 알 턱이 없으니 부르넬로가 영화 상영 후 대박 났을 리는 더더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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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음악에 조예가 깊고 음악을 아낌없이 지원했던 요제프 2세 황제가 다스리는 18세기 말 빈이 배경이다. 화려하고 과시적인 의상, 음악의 수도로 절정을 누리던 빈 궁전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익숙한 모차르트의 음악이 포개진다. 눈과 귀를 붙들어두는 장치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줄거리는 아마데우스를 음악영화의 클래식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영화가 진정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적 비범함에 좌절하는 평범남 안토니오 살리에리 궁정악장의 복잡한 심정이다.
다시 와인 얘기로 돌아가자. 새해벽두에 새 부르넬로가 시판에 들어갔다. 2015년 생 안나타(annata) 타입과 2014년 산 리제르바 타입이다. 전자는 피치 못할 기상이변이 없는 한 원칙적으로 해마다 나온다. 후자는 포도의 작황상태와 이후 숙성과정을 지켜본 뒤 생산자가 시판 여부를 결정한다.
시판 2개월 뒤 ‘벤베누토 부르넬로(Benvenuto Brunello)’란 연례 시음회가 열린다. 참가자 대부분이 와인 비평가와 저널리스트들인 본 행사는 일종의 부르넬로 공론장이다. 막 태어난 햇 부르넬로 와인을 두고 이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아마데우스의 명장면으로 대신하겠다.
벤베누토 부르넬로는 토스카나 몬탈치노에서 개최된다. 올해는 2월 21일 부터 24일까지 열렸다.
모차르트는 요제프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입궁한다. 황제 집무실로 안내된 그는 피아노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황제와 대면한다. 황제가 연주하던 곡은 살리에리가 작곡한 ‘환영의 곡’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차르트는 한 번 들은 곡을 한 음정도 틀리지 않고 완주한다. 여기서 끝났으면 될 터인데, 현장에 있던 어느 누구도 요청하지 않았는데 모차르트는 즉석 편곡을 한다. 삼척동자라도 단순하던 원곡에 근육이 붙고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했음을 알 수 있다. 살리에리의 황당한 표정과, 그런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 자신의 실력을 뽐내는 모차르트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관객들이 더 민망스럽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두드려 맞은 살리에리의 음악은, 한 소절 한 소절 쓸 때마다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내린 신에게 감사하며 써내려 갔던 곡이다. 영화는 살리에리에게 고통을 보태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당구 치면서 악보 쓰는 모차르트, 죽어가면서도 레퀴엠 악상을 떠올리는 모차르트가 화면에 잡힌다.
2014년 부르넬로 리제르바는 한마디로 쉽지 않은 빈티지다. 다수의 생산자들이 리제르바를 자진 반납했을 정도다. 경건, 묵직하고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좌절하는 살리에르의 번민이 가슴 한쪽을 저리게 한다.
2015 빈티지 부르넬로를 개봉할 때 장기 숙성력, 거친 타닌, 근육질 등 부르넬로에 따라오는 수식어를 잠시 접어두면 좋다. 연례 시음회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부르넬로의 평균수명 40년 도달은 어렵지만 반은 장담한다. 한마디로 영 빈티지 값을 치르면 산미와 타닌의 밸런스, 산조베제 그로쏘의 아로마와 원숙한 부케 등 적당히 묵힌 부르넬로를 향유할 수 있다.
2015년생은 날씨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금수저 부르넬로다. 모차르트가 궁정부악장 아버지를 둔 것과 같다. 2015년의 겨울과 봄 기온은 평년을 웃돌았고 비는 적당히 내렸다. 여름이 매우 덥긴 했으나 2003년 여름을 펄펄 끓게 만들던 폭염 수준에는 못 미친다. 본격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 비가 내렸다. 8, 9월에는 일교차가 벌어졌고 공기는 급격하게 쌀쌀해졌고 건조했다. 거둬들인 포도가 알코올 발효를 끝낼 무렵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컨소시엄은 작황결과를 발표한다. 한 해 포도농사 점수를 별의 수로 매긴다. 2015년 부르넬로는 5성 만점에 5성을 얻었다.
<2015년 부르넬로. 생산자는 시계방향 순으로 마스트로얀니, 발 디 수가, 바르비, 파토이, 차치 피꼬로미니 다라고나, 카사노바디 네리>
<2015년 부르넬로. 생산자는 시계방향 순으로 타렌티, 카파르조, 푸리니, 산 포로,꼴레마토니, 모카리>
2002년 이탈리아는 여름이 없던 해다. 리제르바 탄생연도 2014년도 그랬다. 봄이 여름을 추월해 곧장 가을로 돌진했다. 2014년 7월에 비가 85.4mm, 8월에는 7.2 mm내렸고 평균 기온은 21~21.8도였다. 2002년은 7월에 46mm, 8월에 98mm의 강우량을 기록했고 같은 달 평균기온은 21.5도였다. 결국 2002년에 주제페 퀸타렐리는 아마로네를 포기했고 안티노리는 티냐넬로 수퍼 투스칸을 건너뛰었다.
비온디 산티와 살비오니(Salvioni)는 욕심을 버리고 한 등급을 낮추어 로쏘 디 몬탈치노에 전력투구했다(“난산 끝에 얻은 2014년 산 부르넬로” 참조). 이로서 연례시음회 시음 리스트에 리제르바가 빠진 이유가 분명해졌다. 생산자 상당수가 리제르바를 체념했거나 아니면 셀러 안에 더 묵히면서 결과를 지켜보기로 한 것일 수 있다. 다만 현재로선 2014년 안나타 시음 경험에 의지해서 리제르바 맛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2015년 빈티지에도 맹점은 있다. 더운 해에 나무는 당분을 과도하게 만들고 다른 성분들이 폴리페놀이 익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익은 상태가 들쑥날쑥한 포도로 만든 와인은 풋과일과 야채 향이 끼어들어 향기의 조화를 깨트리며 타닌 맛이 떫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알코올 농도가 과도해지고 산도는 줄어들어 와인 맛이 심심하다. 더 우려스러운 건 우리 마음속에 숨어있던 태만이 슬쩍 고개를 든다는 거다. 날씨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는데 피나게 노력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날씨는 평등하다. 남향 포도밭이 있는 생산자는 2015년에 포도를 지키기 위해 햇빛과의 전쟁을 벌였다. 일년 전에는 응달 쪽에 치우친 포도밭 때문에 사투를 벌이던 불행남을 보며 날씨에 감사했던 행운남 일 수도 있다.
실제의 모차르트는 25살이 되어서야 안정적인 수입을 갖게 되었다. 그가 35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천재성에 비하면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성공한 건 아니다. 허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보다 두 배 더 살았고 죽기 1년 전까지 궁정악장을 지냈다. 어려운 음악가에게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살리에리처럼 살기로 했다. 결코 화려하다 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그는 천수를 누리면서 음악을 곁에 두었다. 의사가 노환을 이유로 금주령을 의무 하지 않는 한 나도 와인을 붙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