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자신이 속고 있지만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속고 있는 자가 어리석은가 아니면 속인 자가 사악한가. 사랑을 성사시키기 위해 속임수가 끼어들었다면 잘잘못을 가리기가 애매해진다. 사랑에 눈이 멀면 팥으로 메주 쑨다 해도 믿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은 순진한 청년이 약장수의 꾐에 넘어가 물약을 마셨는데 뜻밖의 약효를 얻는다는 내용이다.
지주의 딸 아디나와 농부 네모리노는 서로 사랑하지만 진심을 몰라 전전긍긍한다. 이럴 때 잘 생기고 믿음직한 군인 벨꼬레가 아디나를 보고 첫눈에 반하면서 삼각관계로 치닫는다. 관계의 얽힌 매듭을 푸는 건 떠돌이 약장수 둘까마라가 제조한 사랑의 묘약이다. 싸구려 와인을 섞어 제조한 물약인데 어리숙한 네모리노는 이 약을 마시면 아디나가 자기와 사랑에 빠질 거라고 철떡 같이 믿는다.
오페라의 클라이맥스인 아디나와 벨꼬레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 가난한 네모리노는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에 자원입대한다. 약을 입에 털어 넣는 순간 묘약은 신통력을 부리기 시작했고 상황은 급반전한다. 아디나는 네모리노의 냉정한 태도가 사실은 묘약에 빌어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한 연기였음을 알게 되고 눈물을 흘린다. 이를 몰래 지켜본 네모리노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르며 아디나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는 북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가난해서 도니제티는 소년 시절을 부자촌 응달에 가려진 빈곤층 밀집촌에서 보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도니제티는 음악 마에스트로의 눈에 띄어 이탈리아 각지의 음악원에 보내져 실력을 쌓는다. 그러다 볼로냐 음악원 시절에 조아키노 로시니의 제자가 되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오페라 작곡가로 입문한다. 그의 재능이 원숙해지는 1830년대에 사랑의 묘약, 안나 볼레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등 보석 같은 오페라가 연이어 발표되었고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사랑의 묘약이 지닌 효염은 도니제티의 사생활을 비켜간다. 그의 커리어가 절정에 달할 무렵 부모, 자식 , 부인을 차례로 잃는다. 일련의 불운은 도니제티의 정신을 쇠약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정신병 나락에 떨어지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르가모의 스콧티(Barone Scotti) 남작은 도니제티의 귀향을 주선한다. 귀환한 지 몇 개월이 지나 그는 고향 친구들에 둘러싸여 눈을 감는다. 정신이 망가진 도니제티를 받아들인 스콧티 남작 저택과 주변은 도니제티 거리(Via Donizetti)로 지정되어 도니제티 애호가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가짜 사랑의 물약 말고, 진짜 도니제티 와인
해마다 도니제티 탄생일(1797년 11월 29일)을 전후해서 베르가모 시는 도니제티 오페라 축제를 개최한다. 보통 11월 둘째 주에 시작해서 12월 첫 주에 막이 내린다. 축제는 사랑의 물약에서 나오는 불량 와인이 아닌, 도니제티를 기리는 정품 와인들이 선보인다.
먼저, 도니제티 스프리스(Donizetti Spriss) 아페리티프 칵테일. 스피릿츠의 일종이나 프로세코 대신 레드 와인을 넣었다. 탄산가스의 청량감을 앞세운 스피릿츠에 비해 스프리스는 레드 와인의 묵직함을 살렸다. 도니제티 음악재단이 후원했고 베르가모 출신 바텐더 토니 포이니(Tony Foini)가 레시피를 고안했다고 한다.
<도니제티 스프리스에 빠질 수 없는 사랑의 묘약 리큐르. 도니제티 칵테일은 베르가모의 아이콘 칵테일로 자리 잡았다. 오후 5시 이후에 베르가모 시내의 어느 바 에서든 맛 볼 수 있다. 이미지_ www.donizetti.org>
레시피는 간단하다. 허브와 식물 뿌리, 과일을 우려낸 사랑의 묘약 Bitter 24 리큐르, 오렌지 주스를 섞은 온 더 락스 잔을 베르가모 레드 와인으로 마무리한다. 스프리스의 완성도는 손 힘을 조절해 가면서 와인을 따르는데 달려있다. 붉은빛 와인 줄기가 천천히 퍼지게끔 와인을 조금씩 흘려보내야 도니제티 오페라가 잔잔히 가슴을 적시는 효과를 얻는다.
평생 갈고 닦은 양조 기술을 녹여낸 인생 와인을 도니제티에게 헌정한 두 와인메이커를 소개하겠다.
탈라리니 (Tallarini) 는 베르가모 외곽에서 40년간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해 온 중견 와이너리다. 탈라리니 양조팀이 도니제티 와인을 선별하는 절차는 이렇다. 일단 블렌딩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와인이 오크통 안에서 머무른 지 1년이 지나면 양조팀은 배럴 테이스팅을 여러 번 반복한다. 1차 테이스팅을 통과한 블렌딩 와인이 담겨있는 오크통은 리제르바 급으로 격상된다. 이후 2년 더 오크 숙성을 하고 추가로 2년의 병 숙성 과정을 지켜보면서 향기, 맛의 원숙도, 복합성을 점검한다. 양조팀 전원이 테이스팅 합격으로 의견이 모아지면 도니제티에게 바쳐진다.
<초콜릿, 바닐라, 베리류와 스파이시 향이 그윽하며 목을 지날 때 발현되는 묵직함은 도니제티 오페라 감상 때 제격이다. 보르도 블렌딩 와인 경연대회인 Emozioni dal Mondo: Merlot e Cabernet Insieme(오른쪽 이미지) 에서 금메달을 여러 차레 수상한 전력을 갖고 있다>
앞서 언급한 도니제티 와인이 보르도 스타일이라면 레 코르네 Le Corne 와이너리의 디베니레Divenire 와인은 부르고뉴 스타일이다. 슬라보니아산 오크 보테에서 1년 숙성한 피노 누아는 오로지 포도 액기스만 모아 놓은 피노 누아의 지존이라 할 수 있다. 와인의 탄생 경위는 도니제티 마니아인 양조가의 입김이 컸다는 후문이다. 도니제티가 오페라 작곡가로 막 입문했을 때 발표했던 3곡의 연작 오페라를 기리며 피노 누아 작황이 우수했던 2015, 2016, 2017 빈티지가 선발되었다.
< Divenire 1818 와인. Divenire 1817은 도니제티가 19살 이 되던 1817년에 작곡한 그의 첫 오페라 ‘피그말리오네’를, Divenire 1818은 두 번째 오페라 ‘보르고냐의 엔리코’, Divenire 1819는 ‘위대한 표트르 대제’에 바친다. 사진속 라벨은 오페라 초연이 있었던 베네치아의 카를로 골도니 극장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동일 와이너리의 코르네Corne 와인은 라벨 디자인 때문에 운명이 뒤바뀐 경우다. 코르네는 포도밭 심층부를 채우고 있는 암석을 일컫는데 풍화로 깎여 나가는 바람에 밖으로 드러났다. 처음 의도는 암석을 선과 곡선으로 단순화시킨 콘셉트로 토양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은 우연히 도니제티 극장의 박스석과 매우 흡사했고 원래 의도를 수정해 도니제티에게 헌정하기로 했다.
<코르네 와인 2015빈티지. 2019 Decanter Award에서 동메달, 2020 비엔나 AWC에서 금메달 , 2020 브뤼셀 와인 품평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속담이 있다. 도니제티 콩깍지가 달라붙은 와인메이커 눈에는 돌이 도니제티로 비췄다. 우리 마음의 눈에도 긍정의 깍지가 씌어 어려운 시기를 즐겁게 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