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좀 마신다는 사람 중에 영화 <사이드웨이 Sideways>(2004)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와인애호가인 소심남 마일즈와 그의 절친이며 플레이보이인 잭의 와인 여정을 코믹하게 그린 이 영화는 당시 전세계 와인애호가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 덕분에 캘리포니아의 한 와인산지와 품종에 대단한 이목이 쏠렸는데, 바로 캘리포니아의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와 피노 누아가 그것이다.
(마일즈) “이곳의 피노 누아가 뛰어난 이유가 뭔지 알아?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밤공기가 열매를 식혀 주기 때문이지. 피노 누아는 껍질이 얇아서 열기나 습도를 좋아하지 않아. 매우 섬세한 품종이지.”
산타 바바라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서늘한 지역 중 하나다. 또한 강우량이 매우 낮고 건조해서 비, 서리, 질병 등의 위협을 덜 받기 때문에 포도는 여유롭게 천천히 익는다. 칼슘이 풍부한 산타 바바라의 토양은 포도의 산도를 유지시켜 주고 회백색의 연한 규조토는 포도에 농축된 풍미를 제공한다. 토양에 섞인 모래는 포도의 과일 풍미를 극대화하고 습기를 지닌 점토는 포도나무에 수분을 제공한다. 마일즈가 예찬한 산타 바바라의 피노 누아는 이런 곳에서 탄생한다.
더 힐트 The Hilt
“한때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는 짙고 파워풀하며 화려한 풍미로 치장한 듯했지만, 지금은 신선하고 우아하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피노 누아를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Exploring California’s Bold Pinot Noir By Eric Asimov>
The New York Times의 와인 전문 기자, 에릭 아지모프(Eric Asimov)는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의 진화를 위와 같이 요약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곳 중 하나로 산타 리타 힐즈(Sta. Rita Hills)를 언급한다. 산타 바바라에는 네 개의 공식 와인 산지(AVA, American Viticultural Area)가 있는데 산타 리타 힐즈도 그 중 하나다. 그리고 산타 리타 힐즈의 피노 누아는 농축된 과일 풍미와 우아함, 신선한 산도를 모두 갖추고 있어 그 중에서도 가장 높게 평가받는다.
국내에서도 산타 리타 힐즈의 와인을 만나볼 수 있는데 수입사 나라셀라가 최근 출시한 ‘더 힐트 The Hilt’가 그것이다(아래 사진). Hilt는 ‘칼, 검의 자루’를 의미하는 단어로 “to the hilt” 하면 “최대한, 철저하게, 완전히, 끝까지”라는 뜻으로 쓰인다. 와인생산자의 단호하고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이름이다.
The Hilt의 소유주가 아스널 FC의 구단주이자 세계적인 부호, 스탄 크론케 Stan Kroenke라는 점도 자못 흥미롭다. 사실 그의 와인 경력은 예전부터 매우 화려했다. 2006년에는 캘리포니아 컬트 와인의 대명사 '스크리밍 이글 Screaming Eagle'을 인수했고, 2017년에는 부르고뉴의 그랑 크뤼 와인 '보노 뒤 마트레이 Bonneau du Martray'를 인수해 한바탕 떠들썩하게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왼쪽부터 ‘더 힐트 이스테이트 샤르도네’, ‘더 힐트 이스테이트 피노 누아’, ‘더 힐트 올드 가르드 피노 누아’, ‘더 힐트 뱅가르드 피노 누아’>
현재 유통 중인 2015 빈티지의 The Hilt 피노 누아 와인 3종은 표현력이 풍부하고 세련되며 잘 다듬어져 있다. 잔에 따르면 과일과 허브 향, 흙내음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여운에서 느껴지는 미네랄 풍미와 짭조름함은 식욕을 돋게 한다. 깔끔하게 잘 차려진 한식 차림이나 시간을 많이 들여 만든 섬세한 음식에 어울리는, 한마디로 고급스런 와인이다.
산타 바바라의 서늘한 기후는 피노 누아 뿐만 아니라 샤르도네 품종이 자라기에도 안성맞춤이다. The Hilt의 샤르도네 와인은 십만 원대의 가격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매혹적인 풍미를 선사한다. 잔에 따르자 마자 농익은 과일 풍미와 은은한 꽃 향이 가득 퍼지고, 입 안을 부드럽게 가득 채우는 와인의 질감은 대리석처럼 매끄럽다.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와인의 여운도 일품이다.
수입_ 나라셀라 (02. 405. 4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