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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파뉴 전체 포도밭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대를 이어 이곳에 살아온 포도재배자들이 소유하고 있다. 샹파뉴의 포도밭 가격은 매우 비싸기 때문에 포도밭을 구입하여 와인을 만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샴페인 전체 생산량의 2/3를 차지하는 샴페인 하우스들이 대개 포도재배자들로부터 포도를 구입하여 와인을 만드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물론 수확한 포도를 샴페인 하우스나 조합에 팔지 않고 직접 샴페인을 만드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RM(Recoltant manipulant의 약자)으로 분류되는데, 특히 1960-70년대 즈음 샴페인 양조 기술을 습득한 포도재배자들이 많아지면서 RM의 수가 크게 늘었다. 이들이 만드는 샴페인은 블렌딩하는 베이스 와인의 수가 적어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포도가 자란 장소의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나 독특한 개성을 지닌다.

RM 샴페인의 이러한 개성은 재배에서 양조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생산자들이 기울이는 세심한 주의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포도가 잘 익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손으로 수확하며 품질 좋은 포도를 골라낸 후 낮은 압력을 가해 포도즙을 얻는다. 발효 과정에서 상업적으로 배양된 인공 효모 대신 토착 효모를 사용하며, 샴페인 양조의 마지막 과정에서 첨가하는 도사쥬(dosage, 와인과 설탕으로 이루어진 혼합물)의 양을 최소한으로 제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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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크리스탈와인은 샴페인 전문가 피터 림(Peter Liem)을 초청하여 국내에 유통 중인 12가지 RM 샴페인을 선보이는 대규모 세미나를 개최했다. 와인평론가로써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림은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샴페인 분야에서 전문적인 식견과 명성을 쌓아왔으며www.champagneguide.net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심도 있는 샴페인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다. 림은 샴페인을 시음하기에 앞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공유했는데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간 지배적이던 샴페인 양조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 1950년대에 도입된 이후 광범위하게 쓰이던 스테인리스 발효조를 중고 오크통이 대체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이는 샴페인에 특정한 풍미를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소와의 화학 작용을 통해 샴페인의 숙성력, 품질, 질감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샴페인의 병입 시기가 늦춰지는 점도 언급할 만하다. 샴페인은 포도 수확 후 이듬해 1월에 병입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몇몇 뛰어난 샴페인 생산자들은 샴페인의 풍미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3월~7월 사이에 병입한다. 샴페인 양조의 최종 단계에 첨가하는 도사쥬의 양이 줄어드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도사쥬는 당분을 첨가하여 샴페인의 높은 산도를 보완하고(다시 말해 균형감을 강화하고) 산화 방지를 도우며 복합적인 풍미를 얻는데 기여한다. 이 때 도사쥬의 양은 샴페인 생산자가 추구하는 스타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해 포도가 과거에 비해 더 잘 익고 포도의 당분이 높아지면서 인위적으로 첨가하는 도사쥬의 양이 점차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도사쥬를 적게 하거나 전혀 하지 않는 경우 샴페인의 숙성과 장기 보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의 여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경향이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임을 감안하여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샴페인은 도사쥬의 당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되며 해당 정보는 레이블에 기재된다.

□ Brut Nature 0-3 g/L
□ Extra Brut 0-6 g/L
□ Brut 0-12 g/L
□ Extra Dry 12-17 g/L
□ Dry 17-32 g/L
□ Demi-Sec 32-50 g/L
□ Doux 50 g/L


뒤이어 진행된 샴페인 시음 부문에는 샹파뉴 지역의 네 개 주요 산지인 발레 드 라 마른(Vallee de la Marne), 코트 데바(Cote des Bar), 코트 데 블랑(Cote des Blancs), 몽타뉴 드 랭스(Montagne de Reims)에서 생산된 12개 RM 샴페인이 등장했다. 참가자들은 모든 샴페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방식으로 시음해야 했는데, 레이블에 기재된 정보(생산자, 산지 등)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편견을 차단함으로써 샴페인의 품질과 맛에 온전히 집중하게 한다는 것이 주최측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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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 데 바(Côte des Bar)의 세 가지 RM 샴페인

샹파뉴 지역 남단에 위치한 코트 데 바의 토양은 쥐라기 시대에 형성된 포틀랜디언(Portlandian) 석회암과 키메리지안(Kimmeridgian) 이회토가 덮고 있으며 토양의 특성상 와인은 높은 산도와 미네랄 풍미를 지닌다. 토양의 특성만으로 보자면 샤르도네 품종의 화이트 와인으로 명성이 높은 샤블리 지역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해양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공존하는 코트 데 바는 적포도 품종인 피노 누아를 재배하기에 더 적합하다. 실제로 이곳의 포도 재배 면적 중 90%를 피노 누아가 차지하는데 피노 누아의 블렌딩 비율이 높을수록 샴페인의 향, 보디감, 질감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유기농 및 바이오다이나믹 방식으로 재배한 포도로 만든 Nathalie Falmet Brut NVFleury Fleur de l'Europe NV는 짙은 과일 풍미, 적당한 무게감, 둥근 질감을 선보이며 코트 데 바 지역의 피노 누아가 지닌 특성을 잘 드러낸다(샤르도네가 섞인 비율은 10~20% 정도). 한편, 피노 누아가 지배적인 코트 데 바에서 종종 샤르도네 품종으로 놀랄만한 품질을 지닌 블랑 드 블랑 샴페인(Blanc de Blancs, 샤르도네 품종만 사용해서 만든 샴페인)이 생산되는데, 섬세한 풍미와 신선한 산도 그리고 우아함이 돋보이는 Charles Dufour La Sauvage Extra Brut 2007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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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드 라 마른(Vallée de la Marne)의 세 가지 RM 샴페인

샹파뉴 전체 포도밭의 66%가 몰려 있는 발레 드 라 마른은 과일 풍미가 짙고 마시기 편한 대중적인 스타일의 샴페인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몇몇 뛰어난 RM 샴페인 생산자들 덕분에 이 지역은 최근 들어 개성 있는 샴페인 산지로 재조명 받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유기농 샴페인의 대부”라 칭송 받는 Georges Laval, 군대에 있을 때 화학합성물의 폐해를 목격한 이후 자연주의 농법의 신봉자가 된 Franck Pascal, 피노 므뉘에의 정수를 보여주는 Benoit Dehu 등이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들의 샴페인은 섬세하고 복합적이며 우아한 스타일을 선보이며 발레 드 라 마른의 최고봉으로 꼽히는데, Benoit Dehu Blanc de Blancs NVGeorges Laval 1er Cru Brut Nature NV 그리고 Franck Pascal Quintessence 2004는 이러한 명성을 잘 증명해 보인다. 차이점이라면,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준 Benoit Dehu Blanc de Blancs이 발레 드 라 마른의 샤르도네가 지닌 잠재력을 드러내는 반면, 피노 므뉘에를 소량 블렌딩한 나머지 두 개 샴페인은 발레 드 라 마른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실제로 피노 므뉘에는 발레 드 라 마른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는 품종인데, 이곳의 토양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다른 두 품종에 비해 싹을 늦게 틔우는 탓에 이른봄 늦서리의 피해를 덜 받는다. 피노 므뉘에는 샴페인에 과일 풍미, 섬세함, 보디감, 둥그런 질감을 부여하기 위해 소량 블렌딩되며 NV(넌빈티지) 샴페인에 흔히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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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 데 블랑(Côte des Blancs)의 세 가지 RM 샴페인

‘청포도의 언덕’(Côte des Blancs)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코트 데 블랑에서는 샤르도네 품종이 주로 재배된다. 백악질 토양이 유독 도드라진 이곳은 샹파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품질의 샤르도네를 생산하며, 자연히 이곳의 블랑 드 블랑 샴페인은 세계 최고의 위상을 자랑한다. 이들 샴페인은 신선하고 우아하며 섬세하고 복합적일 뿐만 아니라 오랜 숙성력을 지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꽃 향, 감귤류 향, 높은 산도가 특징이다. 20헥타르의 포도밭이 모두 그랑크뤼 급인 Franck Bonville Grand Cru Brut 2010, 그리고 35~80년 된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샴페인을 만드는 Larmandier-BernierLongitude 1er Extra Brut Blanc de Blancs NV는 코트 데 블랑에서 생산되는 블랑 드 블랑 샴페인의 훌륭한 예이다. 단 한 명의 위대한 RM 샴페인 생산자를 꼽으라면 단연 1위를 차지할 Jacques Selosse의 샴페인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와이너리를 운영해 온 Anselme Selosse는 샹파뉴 지역 일대에 바이오다이나믹 혁신을 몰고 온 장본인으로, 1994년 는 그를 '프랑스 최고의 와인메이커’로 선정했다. Jacques Selosse Initial Brut NV는 앞선 그 어떤 샴페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는데, 엔트리급 샴페인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세련되고 우아하며 깊이 있고 조화로운 풍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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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타뉴 드 랭스(Montagne de Reims)의 세 가지 RM 샴페인

몽타뉴 드 랭스(Montagne de Reims)는 그랑크뤼 및 프리미에크뤼로 지정된 마을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샴페인 산지이다(17개 그랑크뤼 마을 중 9개가 이 지역에 위치). 산정상의 고도가 300m 정도에 불과해 산이라기 보다는 넓은 고원처럼 보이는 몽타뉴 산은 서쪽을 향해 열려 있는 U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안에 자리한 포도밭은 서리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미세기후의 특성상 피노 누아가 자라기에 적합한 이곳은 실제로 이 품종을 기반으로 한 그랑 크뤼 샴페인으로 명성이 높으며, 이들 샴페인은 무게감(weight)과 풍성함(richness)이 다른 지역 샴페인에 비해 돋보인다. 피노 누아에 소량의 샤르도네를 섞어 만든 Savart 1er Cru Belle de Rose NV는 이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며 여기에 화려한 풍미까지 더해져 매력적이다. ‘샹파뉴의 로마네콩티’로 불리는 Ay 마을에서 생산된 Henri Goutorbe Cuvee Millesime Grand Cru Ay Brut 2006는 피노 누아를 위주로 35% 가량의 샤르도네를 블렌딩했는데, 과일 풍미가 잘 드러나며 섬세하고 우아한 스타일을 띤다(사실 Ay는 피노 므뉘에 품종이 지배적인 발레 드 라 마른의 세부 산지에 속하지만, 토양과 미세기후의 특성은 인접한 몽타뉴 드 랭스의 그것과 흡사해 피노 누아가 자라기에 이상적이다). 한편, 몽타뉴 드 랭스의 남서쪽 프티 몽타뉴(Petite Montagne) 지역에서는 종종 피노 므뉘에 품종으로 만든 뛰어난 샴페인을 찾아볼 수 있는데, Jerome Prevost La Closerie Les Beguines Extra Brut NV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림, 조각, 사진 등 예술 분야에도 대단한 열정을 지닌 Jerome Prevost는 컬트에 가까운 경이로운 샴페인을 생산하며 생산량이 1만3천 병 정도에 불과해 희귀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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