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도락가도 아니고 음식에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평범한 집밥인으로서 우리 음식에 와인을 곁들일 때 지키는 원칙이 있다. 우선 산미가 좋은 화이트 와인을 선택하고, 음식의 재료와 양념에 따라 와인의 풍미를 고려한다.
예를 들어, 새싹비빔밥에는 풀 배어낸 향이 은은한 소비뇽 블랑도 잘 어울리고, 딸이 좋아하는 치즈 들어간 부대찌개에는 오크 풍미가 강하지 않은 샤르도네도 나쁘지 않다. 우리나라 요리는 아니지만, 파인애플 조각을 올려 싸 먹는 월남 쌈 요리에는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 향이 지배적인 화이트 와인도 좋다.
와인의 바디감과 질감은 음식 재료의 그것에 맞추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이 부분은 와인 가격과 요리의 수준에 관련된 부분이고 대체로 와인의 바디감과 질감이 좋을수록 와인의 가격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니, 와인의 수준은 자신의 지출 범위에서 맞추면 된다.
한식과 와인의 조합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산도(acidity)다. 이는 아래 그림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우리나라 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김치와 깍두기다. 특히 잘 익은 신 김치와 깍두기는 어느 음식이나 식욕을 돋게 한다. 쌀쌀한 날 뜨끈한 설렁탕 한 수저에 신 김치 한 조각을 올리면 더 바랄 나위 없고, 점심으로 끓인 라면에 김치만 곁들여도 행복하다. 외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 음식이 되어 버린 자장면에 단무지가 빠지면 섭섭하고, 피자와 치킨을 주문할 때 늦게 배달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무와 피클을 빠트리면 용서가 안된다. 오히려 무 또는 피클 하나라도 더 달라고 사정한다.
신 김치와 깍두기, 단무지와 피클 그리고 치킨에 달려오는 무는 우리 입맛이 산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이다. 여기다 요즘은 새콤달콤한 각종 장아찌와 청들이 다양한 풍미를 더하며 입맛을 돋우어 준다.
이런 면에서 와인은 우리에게 국과 같은 역할을 하기보다는 "김치 + 국물" 혹은 "치킨 무 + 맥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산미가 좋은 화이트 와인을 라면에 곁들이면 맛있는 것도 그래서다. 군고구마에 동치미 대신 오크 풍미가 없는 화이트 와인이, 세꼬시에 시원한 소주 대신 차가운 샤블리 와인이 어울리지 않을 리 없다.
음식에 와인을 곁들일 때에는 요리가 주연이고 와인은 조연이다. 그리고 와인에 음식을 맞추지 않고 음식에 와인을 맞출 때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다. 예들 들어 살펴보자. 우리 음식이 맵기 때문에 와인 매칭하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엽기떡볶이를 사 먹을 때 따라 나오는 쿨피스를 떠올리면 어떤 와인이 어울릴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즉, 쿨피스와 비슷한 산도와 당도와 바디감을 가진 와인이라면 엽기떡볶이와 잘 어울릴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화이트 와인의 수요가 유독 적다. 이는 여전히 와인이 주연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 음식을 중심에 놓고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찾아 소개한다면, 와인 소비는 물론이고 화이트 와인의 수요가 지금보다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는 단맛 가득한 배를 썰어 넣고 버무린 육회에, 산미 좋고 배 향 은은한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야겠다.
■ 글쓴이_ 이상철
경영학과 마케팅을 전공하고 통신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보르도 와인을 통해 와인의 매력을 느껴 와인을 공부하며 와인 애호가가 되었다.
중앙대 와인소믈리에 과정을 수료하고 WSET Advance Certificate LV 3 를 취득하였으며 와인 애호가로서 국내 소믈리에 대회에 출전하여 수상한 경력이 있다.
2004년 부터 현재까지 쵸리(chory)라는 필명으로 와인 블로그를 운영하며 개인 시음기와 와인 정보 및 분석적이 포스팅을 공유하며 생활 속의 와인 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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