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마시게 된 뒤로 온오프 라인을 통해 많은 지인들을 알게 됐다. 이 역시 필자가 와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이기도 하다. 다양한 와인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이지만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와인을 좋아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좋아하는 와인을 본인의 생활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오늘은 그 중 한 분의 블로그 포스팅을 소개하려 한다. 도구로 땅을 파는 것(?)과 관련된 분이라 떼루아에 대한 이해가 깊고, 함께 와인을 마시면 말을 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는 지인 중 하나다. 그는 평소 와인을 즐기며 기억에 남을 만한 와인을 따로 선별한다. 그리고 해당 와인과 본인만의 기록을 차곡 차곡 모아 언젠가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을 계획하고 실행 중이다. 독자들이 선호하는 와인의 스타일이 그의 것과 다를 수 있겠지만, 그가 와인을 선별하는 방식이나 자녀에게 전하는 방법 등은 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아래는 그의 허락을 받아 가급적 원문을 그대로 살려 작성한 글이다.
1. 와인 선별
선별한 와인은 총 150병이다. 그 중 핵심이 되는 100병은 와인 자체와 떼루아(산지의 특성)를 이해하기 위해 꼭 마셔봐야 할 와인이다. 이 와인들은 가급적 고가의 와인이나 일등급 그랑크뤼는 피하고, 지역적 혹은 산지의 토양적 특징을 잘 보여주거나 품종, 가격 대비 품질, 희귀 빈티지 여부 등에 따라 선별하였다. 나머지 50병은 앞의 100병을 마시기 전에 와인과 떼루아에 대해 좀더 알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일종의 훈련용 와인으로, 주로 세컨드 와인 혹은 저렴한 것 중에서도 산지의 토양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별로 보면 프랑스 70병(보르도/루아르/론 등이 45병, 부르고뉴 25병), 스페인 10병, 이태리 10병, 호주 5병 그리고 기타 5병이다.
2. 기록물의 서문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에게,
아빠는 훗날 성인이 된 너희들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겨주고 싶어 고민하다 결국 와인을 떠올렸다. 아빠는 술꾼이라며 자주 놀리던 너희들에게 남겨주기로 한 것이 결국 술뿐이라는 점에서 너희들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내게 있어 와인이란 또 다른 황홀을 만끽하게 해 준 것이었다.
와인은 술이지만, 때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회생활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술을 마실 때가 있지만, 그것이 와인이라면 그 때마다 한 가지 기억을 더 보태어 준다. 와인을 함께 마신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위안이 된다. 또한 와인을 마시는 도중에는 희열에 합치하지만, 마시고 난 뒤에는 빈지갑의 괴로움에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비싸고 좋은 와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와인을 통한 희열은 서로 나누되 와인에 대한 궁금증과 금전적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아빠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동기이다.
너희들도 알 듯이 아빠는 많은 와인을 접해 보았다. 그 중에는 황홀감을 주는 것도 있었고, 높은 가격에 비해 실망감을 안겨준 와인들도 많았다. 가격이 높다고 모두 맛있는 건 아니다. 입맛은 사람마다 달라서 정해진 틀 속에서 와인의 가치를 말하기도 어렵다. 아빠가 남긴 와인들은 가격의 고저를 떠나 최고의 맛을 보여주거나 최악의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한 것들, 장차 너희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접하기 힘들 빈티지, 혹은 토양이나 양조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을 선별한 것이다. 각 와인의 개별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아빠가 남긴 코멘트를 참조하되 궁극적으로는 너희들이 느끼고 알아가길 바란다.
와인에 대한 가장 불필요한 질문은 "와인이 무엇인가"하는 것이고, 가장 틀린 질문은 "와인을 얼마나 마셨나"하는 것이다. 또한 와인에게 기대하지 말 것은 같은 맛의 확인이다. 아빠가 남긴 이 와인들을 통해 학문적 접근보다는 와인이 무엇인지 이해만 해도 다행이지만, 와인의 지식이 늘어나는 만큼 반드시 겸손해지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이 와인들을 공유하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매개체로 활용하길 희망한다.
이 프로젝트는 누구보다도 이를 이해해 주고 후원해 준,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음을 특기해 두고 싶다.
훗날 너희들이 성인이 되어 이 와인들을 의미있게 활용할 때가 올 것임을 확신하며, 술쟁이 아빠가.
■ 글쓴이_ 이상철
경영학과 마케팅을 전공하고 통신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보르도 와인을 통해 와인의 매력을 느껴 와인을 공부하며 와인 애호가가 되었다.
중앙대 와인소믈리에 과정을 수료하고 WSET Advance Certificate LV 3 를 취득하였으며 와인 애호가로서 국내 소믈리에 대회에 출전하여 수상한 경력이 있다.
2004년 부터 현재까지 쵸리(chory)라는 필명으로 와인 블로그를 운영하며 개인 시음기와 와인 정보 및 분석적이 포스팅을 공유하며 생활 속의 와인 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 글쓴이의 블로그 바로가기
☞ 글쓴이의 페이스북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