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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에 발표한 <유리알 유희>로 194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에게 확고한 문학적 지위와 명성을 안겨준 것은 이미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1904)였으며 이 소설에서 헤세는 다음과 같이 와인에 대해서 쓰고 있다:
 
“강하고 달콤한 주신(酒神)은 변함없는 내 벗이 되어서 오늘까지 이르렀다. 주신처럼 강한 것이 있으랴? 그처럼 아름답고 공상적이며, 열정적이고 명랑하며 우울한 것이 있으랴? 주신은 영웅이고 마술사이다. 그는 유혹자며 에로스(Eros)의 형제이다. 그는 불가능한 것도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고 기이한 시로써 충만하게 한다. 그는 나 같은 은자(隱者)와 농부를 왕으로, 시인으로 또한 현인(賢人)으로 만들었다. 텅 빈 인생의 조각배에 새로운 운명을 싣고 낙오자를 위대한 인생의 빠른 물살로 돌려 보낸다.
 
와인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와인도 모든 귀중한 재능이나 예술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랑 받고, 요구 받고, 이해되며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기를 바란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와인은 수많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들을 늙게 만들고, 죽이고, 그들에게 있는 영혼의 불길을 꺼버린다. 그러나 와인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축제에 초대하고 그들에게 행복의 섬으로 가는 무지개 다리를 놓아준다. 그들이 피로를 느끼면 와인은 머리 밑에 베개를 베어주며, 그들이 비애의 함정에 빠지면 친구처럼, 위안해주는 어머니처럼 조용히 그리고 정답게 안아준다. 와인은 혼란스러운 인생을 커다란 신화로 바꾸어주고 거대한 하프로 창조의 노래를 부른다.”
 
<페터 카멘친트>의 주인공이 화가인 에르미니아를 사랑하게 되고 이 사랑을 고백하려는 순간 그녀에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비애에 빠져 와인을 많이 마시는 날들을 보내며 한 말이다. 헤세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렇게 와인을 예찬하기도 하고, 와인에 무절제하게 탐닉하는 것에 경고를 보내는 듯한 글을 쓸 정도면 그는 아주 젊은 시절부터 와인을 많이 경험했음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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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에서 키안티를 마시는 헤르만 헤세(1906)
 
 
1905년 5월 14일 헤세는 비엔나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노이에스 비너 탁블랏, Neues Wiener Tagblatt>에 ‘와인연구(Weinstudien)’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친구이자 스위스의 화학자인 콘라드 포이퍼(Konrad Pfeuffer)와 함께 스위스 와인가이드를 공동으로 발행하려다 실패한 경험담을 적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포이퍼는 원래 혼자 와인가이드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자 헤세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 헤세는 출판사를 섭외했고 이 출판사가 와인 생산자들에게 연락하여 시음용 와인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와인가이드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다. 포이퍼는 와인의 색에만 관심을 두는 반면 헤세는 와인을 마시면 떠오르는 기억들에 관심이 있어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세에게 어떤 와인은 그에게 어린 시절을, 어떤 와인은 학창시절을 상기시켰고 또한 여행, 사랑의 경험, 우정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서로의 연관성을 만들기 위해 헤세의 제안으로 포이퍼는 와인 시음기를 적기로 하고 헤세 자신은 이를 바탕으로 일종의 시를 쓰기로 했다. 그러나 포이퍼가 헤세의 시 두 편을 읽어보고는 헤세의 제안을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게 된다. 결국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각자 작업을 하기로 하고 6개월이 지나자 와인 생산자들이 보내준 와인이 고갈되었다. 이번에는 와인 생산자들을 직접 찾아 다니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술집, 저 술집에서 직접 와인을 사서 마셔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헤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팔아서 와인 값을 마련해야 했고 포이퍼는 이를 견디다 못해 떠나버렸다. 헤세는 혼자서 1년을 더 시도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apos와인연구’의 끝부분에서 헤세는 당시의 경험이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1905년에 발표된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페터 카멘친트>에서 헤세가 와인에 대한 글을 쓸 정도의 내공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에게 와인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알 수 있다. 헤세에게 있어서 와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경험한 감정에 대한 은유였던 것이다.
 
헤세가 태어난 독일의 칼프(Calw) 지역에는 헤세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헤세가 와인을 마시고 있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몇 장 볼 수 있다. 1909년에 뮌헨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헤세의 사진은 우아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레드 와인이 담긴 와인 잔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담고 있다. 금방이라도 와인 잔을 돌리고 향을 맡고 이어서 한 모금 마실 것처럼 보인다(아래 사진). 함께 와인 가이드를 발행하려고 했던 포이퍼는 분명히 이 레드 와인의 색을 분석했을 테지만 헤세는 과거의 어떠한 행복한 경험을 되새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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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는 시를 많이 남겼는데 그 중에서 1922년의 <사랑의 노래, Liebeslied>, <술잔 속의 나비, Falter im Wein>(1919), <그대 없이는, Ohne Dich>(1913)에서는 와인을 사랑과 연관시켜 노래하고 있다. <와인을 마시며, Beim Wein>(1902)에서는 가끔 혼자 와인을 마시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며, <위로를 주는 와인, Troster Wein>(1900)에서는 제목 그대로 와인에서 위로를 찾고 있다. <늙는다는 것, Altwerden)>(1918)의 마지막 연에서는 늙은 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은 난로와 부르고뉴의 레드 와인 그리고 평온한 죽음이라고 읊으며, 그의 와인에 대한 사랑이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을 예견하고 있다. 헤세의 와인 셀러는 한 번도 빈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40세의 나이에 헤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6년 그의 정신치료를 맡았던 스위스 베른의 랑(Lang) 박사는 헤세에게 본인의 꿈을 그림으로 표현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한 그림은 마침내 열정으로 변했다. 프란츠 칼 긴츠타이(Franz Karl Ginzkey)에게 1920년에 헤세가 쓴 편지에는 “펜과 붓으로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은 내게 포도주와도 같아서, 그것에 취한 상태가 삶을 그래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라고 적혀 있다.
 
헤세는 약 3,000점의 수채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는 포도밭을 그린 그림이 다수 있다. <포도밭 속의 붉은 집, Rotes Haus im Weinberg>(1922), <포도나무가 있는 마을의 봄, Dorf mit Rebstocken im Fruhling>(1922), <포도밭의 곡간, Schuppen im Weinberg>(1927), <포도밭의 농가들, Gehofte am Weinberg>(미상)이 대표적이다. 헤세는 이와 같이 포도밭을 예술로 승화시키면서 와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문학과 예술에서도 와인에 대한 애정을 노래한 헤세는 위대한 와인 애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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