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찰떡 궁합 : 갸메(Gamay)와 보졸레.
피노 누와 (Pinot noir) 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갸메 (Gamay)' 가 제 물을 만난 곳, 보졸레 (Beaujolais).
꼿꼿한 기품을 자랑하는 외줄기 황금의 언덕(Cote d'Or)을 지나, 크고 작은 둔성들이 연이은 샬로네(Cote Chalonnaise)와 마꼬네(Maconnais), 그 화려한 부르고뉴 맏형의 그늘에 가린 땅, 보졸레.
한편으로는, 화산 활동의 흔적 속에 굽이친 높은 구릉지대(400m 고지)에서 세속과 단절된 험한 지역일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때묻지 않은 이 동네 저 동네의 특색 속에, 멀리 남쪽의 지중해 내음이 은근히 전해지는 이국적인 곳…
일찍이 갸메의 가능성을 발견한 보졸레의 농민들은 특이한 양조기법과 애정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었다. 이 순하고 상큼한 레드 와인은 세계인의 식탁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화제거리를 제공해 주었으며, 달력의 한 칸을 장식하게 되었다.
"Beaujolais nouveau est arrivé ! "
이름하여 보졸레 누보. 보졸레 지방에서 만든 햇술이라는 뜻이다.
잘 익은 갸메는 손으로 수확되어 "통째로" 발효 양조 통에 채워지고, 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CO2 가스를 가득 채운다. 맛있는 포도 주스를 포도 알 안에 두고 안타까워 하던 껍질에 묻은 효모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소까지 빼앗긴 것이다.
으~ 최악의 조건.
" 난 좀 때를 기다려야 할까봐 - "
이렇게 효모가 쉬고 있는 사이에 포도 껍질 안에서는 산과 효소의 작용에 의해 1~2도의 미소한 알코올이 형성된다. 이 알코올은 나름대로 껍질내부의 각종 성분을 우려내, 보졸레 누보의 기본 틀을 형성한다. 직경 1cm 의 밀폐된 공간 안에서 신비스럽고도 복잡한 화학변화와 함께 특유의 풍미를 갖춘 햇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보졸레 누보 와인은 편하고 쉽게,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감칠맛 나는'' 와인이다.
보졸레 누보는 '숙성'을 위한 와인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 해가 가기 전에, 이왕이면 그 달이 가기 전에 마시는 것이 권장된다.
INAO 의 규정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보졸레 누보'는 "보졸레 프리뫼르 (Beaujolais primeur) " 라고 불러야 맞는다. 11월15일 이후에 시판되어 이듬해 1월31일 까지 유통되는 "진짜 햇술" 인 이 와인에 비해, '보졸레 누보'는 이듬 해 8월31일까지 유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확한 생산자들은 '보졸레 프리뫼르'라는 명칭을 "덧붙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보졸레 누보'는 매스컴과 상업화의 영향으로 슈퍼스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 봄에… 철 지난 보졸레 누보 타령이냐구요?
호기심 많은 우리 스테판이 가만 있을리 있겠어요?
과연 이 와인이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작년에 보졸레 누보 한 병을 꼬불쳐 두었다지 뭡니까?
II. 일장춘몽 : '누보' 의 고별 행진
깊은 동굴에서 발견된 루비의 빛깔, 빛에 투영되지 않은 어둠을 머금은 미스테리.
흑색의 뉘앙스를 띈 갸닛처럼 어둡지는않으나, 깊이를 가진 그 루비색.
그러나 너무나 맑고 투명한 루비 호수다. 진한 루비색이 너무도 맑아 바닥이 깨끗이 보이는 그 신비스러운 호숫가에 스테판은 섰다.
그리곤 발을 담그고 싶은 충동에 발을 들이지만, 그 가장자리의 처연한 보랏빛이 애처로와 움찔해진다. 초기의 원시성을 간직한 본색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 힘.
" 아니! 이럴 수가… "
스테판은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랏빛이 다 사라지고 오렌지빛 내지는 고동색의 불편한 뉘앙스를 연상했지 않았는가.
"이건 <누보>가 아니고 그냥 <보졸레>야." 라고 생각할 정도로 색상은 완벽했다.
아주 서서히 형성되는 눈물은 아메바처럼 풀어지며 해체된다. 흘릴 눈물마저 없단 말인가. 아니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첫 코, 드러나지 않는 상큼한 자태 속에 묻어둔 과일들…
마침내 승무춤 사위속에 팔을 휘두를 때마다 그 소맷저고리에서 풍겨나오는 딸기, 바나나, 영국 캔디…
그러나…
그러나…
한 모금 입안에 품어 안기에는 너무도 거칠어진 산도.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가 하늘하늘 과수원의 꽃밭을 날아다니며 춤을 추다… 이제는 지쳐 나락을 접고 땅 위에 앉으니… 피곤이 너무도 빠르게 다가 온다.
아직도 마음은, 아직도 향기는, 꽃밭의 그 하늘에 있는데, 몸은 이미 기력이 쇠잔해 가니…
이 햇 와인을 지켜 줄 장수(탄닌)가 없으니, 그 군대를 이룰 병사들(추출물질)이 없으니, 누가 초나라를 당하리오. 그 빈약한 체구는 날카로와진 산미의 균형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시큼씁쓸" 한 최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새로운 '누보'를 기다리며…
- 중앙대 소믈리에과정 교수 손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