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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표

와인글라스 없는 와인, 생각해 보신적 있으세요? 안고 없는 찐빵같다 고나 할까, 웬지 허전한 느낌이죠? 와인을 마시는 일이 가끔 불편하고 귀찮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함께 갖추어 할 몇 가지 소품들 때문일 것입니다. 코르크를 따야 하는 스크류도 있어야 하고 따라 마셔야 하는 글라스도 있어야 하고 디캔터도 있어야 하고... 그러나 그 뒤에 만끽할 수 있는 기쁨과 환희에 비한다면 그까짓 소품준비가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다만 와인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각각의 와인에 최선의 짝이 되는 소품준비가 그리 쉽지만은않더군요. 특히 와인글라스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는 말이죠.

와인글라스를 처음 구입하시는 분들은 어떤 글라스를 구입해야 할 지 참 난감해 하십니다. 사실 요즘은 지역별, 품종별로 그 기능을 달리하는 전문 와인글라스들이 많이 선보여서 필요한 것을 모두 구입하면 되겠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엔 경제적인 부담이 적지 않게 따르니 우선은 두루두루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와인글라스를 구매해서 사용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와인글라스를 구매할 때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와인글라스는 립(Lip), 볼(Bowl), 스템(Stem)과 베이스(Base)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볼은 아래쪽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져서 와인의 향을 잘 모아주어야 하며, 와인의 다리는 가늘고 길어서 손으로부터 볼로 열이 전달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와인글라스는 색이나 무늬, 장식이 없어 와인의 색과 맑기를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끔 시음회 때 볼 수 있는 ISO(INAO)잔이 바로 와인 시음을 할 때 가장 표준이 되는 글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ISO잔이 시음을 위한 표준 규격 잔이면서 가격이 또한 저렴하기에 부담 없이 구입해서 사용하긴 좋으나 잔이 두꺼워서 그런지 입술에 닿는 촉감도 많이 떨어지고 와인의 깊은 맛과 향을 충분히 즐기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은 듯 합니다. 저도 처음에 ISO잔을 구입해서 열심히 사용했습니다만, 그 투박함에 영 와인 맛이 안 나는 것 같더군요. 와인을 즐겨야 하는데 자꾸 와인을 시음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러던 차에 와인글라스 한 세트를 선물 받게 되었는데 어찌나 기쁘고 고맙던지, 좋은 와인을 선물 받은 것 보다 더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주 와인을 선물하는 분들에겐 한번쯤 와인글라스를 선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더군요.

제가 받은 글라스는 요즘 잘 나가는 R사 제품의 전문가 용 와인글라스였습니다. 듣고 보던 건 있어서 선물해준 분의 높은 안목을 칭찬하며 마침 보관하고 있던 와인을 한 병 따서 잔에 따랐습니다. 잘 빠진 몸매, 형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얇고 가벼우면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크리스탈잔에서 잔잔히 동요하고 있는 와인이 유난히 달콤해 보였습니다. 기분이었을까요?

그날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와인 글라스 때문이었을까요? 와인은 왜 그리 맛있던지요. 확인을 해보기 위해 ISO잔에도 따라서 마셔 보았습니다. 확실히 다르더군요. 향의 무게, 크기, 맛의 시작과 끝마무리에 이르기까지.. 결국 정답은 와인글라스에 있었습니다.

와인글라스는 분명 와인의 맛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중요한 도구인 것입니다.

참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죠? 와인글라스에 따라서 와인의 향과 맛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최근에 와서는 많은 레스토랑이나 와인바에서 전문 와인글라스의 사용이 보편화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급 호텔 레스토랑이나 와인전문바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전문 와인글라스의 진가가 확인되면서 점차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입 소문이 나고 사용이 늘게 되자 이제는 와인을 만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전문가용 와인글라스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겠더군요.

사실 크리스탈 와인글라스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17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그 전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근세 초기까지는 나무, 사기, 주석 등의 잔들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 19세기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던 크리스탈잔은 채색과 장식이 들어가면서 시음을 위한 기능적인 면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날과 같이 맑고 투명하면서 볼이 넓어 와인시음에 적당한 와인글라스의 등장은 바로 리델(Riedel)이라는 와인전문 글라스 제조업체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리델잔은 전 김대중 대통령 방북 시, 평양 만찬 장에서 사용되었다고 하여 우리에게 다소 익숙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리델(Riedel)은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와인글라스 제조업체로, 전 세계 60여 개국에 와인글라스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와인에 알맞은 개별적인 와인글라스를 만들어 각 와인의 향과 맛을 최대한 끌어낸 것이 바로 리델잔의 성공 비결이었습니다.

이 회사는 비넘(VINUM), 우베튀르(OUVERTURE)같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가격의 브랜드에서부터 직접 장인의 수공으로 제작되는 고급 브랜드인 소믈리에(Sommelier)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브랜드의 와인전문 글라스를 제조하고 있습니다. 이태리 소믈리에 협회(ASI)의 도움으로 1973년에 첫 출시된 Riedel Sommelier 시리즈는 기술적인 목적과 쾌락적인 목적,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최고의 와인글라스라고 와인비평가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로부터 극찬을 받은바 있습니다.

또 다른 와인전문 글라스로 스피겔라우잔이 있습니다. 스피겔라우(Spiegelau)사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유리 제품 생산 회사인 나흐트만(Nachtman)의 계열 회사로, 와인전문 크리스탈잔을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와인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도록 고안된 기능적인 와인글라스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보르도잔, 버건디잔, 화이트잔 등이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리델잔과 비교해서 디자인면에서는 슈피겔라우잔이 좀 더 세련된 것 같더군요.

이런 기능적인 잔들은 와인의 향과 맛을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지역과 품종에 따라 그 모양새가 각각 다르게 제작이 되는데요, 여기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 과학적인 근거가 있답니다.

테네시대학 한 연구팀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보르도잔에 레드 와인을 따라 마시는 것이 와인의 향과 맛을 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 연구팀은 레드 와인 속에 gallic acid의 함량을 측정함으로써 글라스의 모양과 크기가 레드 와인의 화학성분을 변화 시킬 뿐 아니라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와인의 타닌 함량을 알 수 있는 gallic acid의 수치는 화이트 와인보다 레드 와인에 6배 정도가 높은데요, 공기에 노출되면 이 산은 일종의 에스테르로 변화하여 와인에 적당한 드라이함과 부드러운 느낌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gallic acid의 수치가 높을 경우, 와인은 매우 자극적인 느낌을 갖게 됩니다.

연구원들은 Merlot품종의 와인을 각기 다른 세 개의 잔 - flute잔, Martini잔, Bordeaux잔-에 따른 후 각각의 gallic acid의 함량을 측정하였는데, 결과는 보르도잔에서만 에스테르의 수치가 높아지면서 gallic acid의 함량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보르도잔이 다른 잔들 보다 공기에 노출되는 면적이 더 넓었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와인이 지닌 향이 충분히 발산되기 위해서는 조용히 잠자고 있는 향을 자극하기 위한 적당한 공기와의 접촉이 필요합니다. 또한 와인글라스가 넉넉해야 글라스를 돌렸을 때 아래쪽의 무거운 향들도 끄집어 내어 감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모두 와인글라스의 크기가 어느 정도 커야 가능 한 일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혀가 쓴맛, 단맛, 신맛을 느끼는 부위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와인이 혀의 어느 위치에 먼저 떨어지느냐에 따라 와인의 맛은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기능성의 잔들은 와인을 마셨을 때 와인이 원하는 혀의 위치에 정확히 떨어질 수 있도록 제작되어야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와인글라스가 이처럼 인체 공학적으로 제작이 되어 타닌과 산미의 균형을 잡아주고 품종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주면서 와인을 즐길 수 있도록 제작이 된다면 와인 잔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닌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같은 와인을 두고 어떤 도구를 선택했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와인 잔 선택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그렇다고 와인글라스를 종류별대로 모두 구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우선은 레드 와인용과 화이트 와인용, 그리고 샴페인용 정도만 준비를 해보고 차츰 늘려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레드 와인용 : 거친 타닌을 부드럽게 하고 와인의 풍부한 향을 잘 발산할 수 있도록 글라스의 크기는 넉넉하면서 입구는 좁은 것으로 준비 합니다.

그래서 와인을 마셨을 때 포도주가 직접 입 안쪽으로 떨어져서 와인의

여러 쓴 맛 등을 억제하고 부드럽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 화이트 와인용 : 화이트와인은 잔 밑 부분은 둥글면서 입구는 끝 부분까지 쭉 뻗은 다소 작은 글라스로 준비 합니다. 이런 잔들은 포도주가 혀 앞쪽으로 떨어지게 하여 와인의 산도가 너무 티지 않도록 합니다.

일반적인 백포도주뿐 아니라 가벼운 적포도주를 마실 때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 샴페인 용 : 샴페인의 풍부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거품이 용솟음 치는 것을

맘껏 감상하기 위해서는 폭이 좁고 긴 flute형의 잔이 제격입니다.

마지막으로 와인글라스의 세척 요령에 대해 알아보겠는데요, 와인글라스는 용도에 맞는 것을 구입해서 적절히 이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관하는 것 또한 중요하겠지요? 세척할 때는 가급적 세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세제 성분이 와인 글라스에 남아 있을 경우 와인의 맛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샴페인의 경우 기포가 줄어들거나 아예 올라오지 않을 수도 있다니, 흐르는 미온수에 깨끗이 씻어내고 부드러운 천으로 바로 물기를 제거해 주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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