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가 된 보르도의 이방인
장 뤽 뛰느뱅Jean-Luc Thunevin
2006년 5월, 샤토 발랑드로를 소유하고 있으며 '가라쥬 와인 Grage wine의 대부’라 불리는 장 뤽 뛰느뱅에게 권위 있는 '메독-그라브 지역 봉탕 기사작위 Commanderie du Bontemps de Medoc et des Graves’가 수여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보르도에 정착한 이방인, 불과 십여 년 만에 유서 깊은 보르도 와인들을 제치고 더 비싼 값에 팔리는 와인을 만든 '가라지스트Garagsite', 보르도 등급 체계 내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안주하는 샤토들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보르도의 Bad boy’ 뛰느뱅. 그는 기존의 전통과 권위에 의존해 명성을 유지해 오던 보르도의 정상급 샤토들에게는 반항아 또는 도전자와 다름없었다. “그(뛰느뱅)는 우리를 잠에서 깨게 했고 보르도에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뛰느뱅에게 봉탕 기사작위가 수여되던 당시 기사단 중 가장 높은 서열에 있던 장 미셸 꺄즈(샤토 린치 바쥬의 대표)가 했던 말이다.

샤토 발랑드로의 탄생
자크 티엔퐁의 '르 팽 Le Pin’이나 프랑소아 미트자벨의 '테르트르 로트뵈프 Le Tertre Roteboeuf’같은 와인들이 가라쥬 와인의 예고편이었다면, 장 뤽 뛰느뱅의 '샤토 발랑드로 Ch. Valandraud’는 가라쥬 와인의 완성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의 커다란 차이점은, 전자는 이미 잘 알려진 와인양조가문에 의해 만들어졌고, 후자는 당시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와인을 양조한 경험조차 없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Decanter.com 2007.06)
샤토 발랑드로 와인은 차고(garage)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뛰느뱅이 이웃에게서 빌린, 차고 모양의 오래된 술 저장고(chai)에서 만들어졌다. 첫 빈티지인 1991년 샤토 발랑드로 와인을 만들 때 (샤토 오존 Ch. Ausone의 총책임자가 되기 이전의) 알랭 보티에가 도움을 주었으며, 가진 돈이 없어 양조설비를 장만할 처지가 못되었던 뛰느뱅은 모든 과정을 단순화하고 직접 처리해야 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수확 전에 포도송이를 솎아내어 수확량을 줄였고, 포도를 수확하고 줄기를 제거하는 작업마저도 손으로 했다. 무엇보다도 타닌을 추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반드시 새 오크통을 사용해 와인을 숙성시켰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메를로 품종을 기반으로 한, 풍부하고 잘 익어 화려한 스타일을 지닌” 가라쥬 와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Decanter.com 2008. 04)
로버트 파커와 미셸 베탕 등 샤토 발랑드로를 발견한 와인평론가들은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곧와인의 가격은 치솟았고 뛰느뱅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이를 눈여겨본 보르도의 유명 샤토들 중 몇몇은 가라쥬 와인의 흐름에 합류하기도 했다. 샤토 캬농 라 가펠리에 Chateau Canon la Gaffeliere를 소유한 스테판 폰 나이퍽의 '라 몽도트 La Mondotte’, 그리고 샤토 보세주 베코 Chateau Beausejour-Becot의 베코 가문에서 만든 '라 고메리 La Gomerie’가 대표적이다.
이상주의자 장 뤽 뛰느뱅
샤토 발랑드로의 성공으로, 뛰느뱅은 보르도라는 무대에 다른 유명 샤토들과 함께 주연급으로 당당히 서게 되었다. 하지만 경쟁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구한 역사와 훌륭한 테루아에 뿌리 깊은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 보르도 특급 샤토들에게, 뛰느뱅의 성공은 일종의 변화를 알리는 경종(또는 경고)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또한 와인 산업에 적용되는 많은 (이로울 것 없는) 규율들, 보르도 정상급 와인들에 매겨지는 과다한 가격, 등급 체계에 속하지 못한 수많은 보르도 와인생산자들이 겪는 어려움 등에 대해 말할 때 뛰느뱅은 주저함이 없다. “내게는 뿌리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싸우는 거에요. (중략) 어렸을 때 나는 단지 살기 위해 애썼고 학교나 권위 같은 것을 증오했어요.” Wine Spectator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2012. 03)

프랑스 파리 태생인 뛰느뱅의 아버지는 알제리로 건너가 정착했다. 알제리는 1830년대부터 프랑스 식민지화되었던 곳으로, 이후 유럽계 이민자들이 건너와 아프리카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뛰느뱅은 1951년에 이곳에서 태어났으나, 1962년 마침내 알제리의 민족주의 운동이 무력해방을 성공시킴으로써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태어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알제리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역시 뛰느뱅의 진정한 고향은 아니었다. 16세가 되던 해 그는 집을 떠났고, 이후 벌목꾼, 클럽 DJ, 은행원을 거쳐 마침내 생테밀리옹에 작은 와인 바를 열기에 이르렀다. 1년 후 와인 숍까지 병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와인 판매에 뛰어들었고, 그의 비즈니스 감각은 이때부터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무일푼으로 생테밀리옹에 정착한 뛰느뱅은, 이후 와인생산자로써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사업가로 변신했다. 오늘날 그는 일곱 개의 포도원(또다른 하나는 공동소유)과 10개의 와인브랜드를 갖고 있으며, 연간 백만 달러가 넘는 이윤을 창출한다. “부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서 유일한 기쁨을 느낀다”고까지 말하는 그에게 이러한 경제적인 성공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년 시절의 방황과 정체성의 갈등에서 비롯된 우울함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뛰느뱅은 최근 샤토 발랑드로가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 클라세 B’로 승격되는 쾌거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네고시앙(포도나 와인을 구입한 후 자신의 양조장에서 양조 또는 병입하여 판매)과 컨설턴트로도 활약하는 등, 보르도의 메이저급 플레이어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이들의 챔피언 a champion of the little guy으로 남고 싶다"고 말하며(Wine Specator, 2012. 03) “(보르도 와인산업이) 관행으로부터 벗어나 혁신과 모험을 감행하고, 이를 위해 때로는 규칙을 깨는 것도 필요하다”는 쓴 소리를 여전히 아끼지 않는다.
이방인이라는 까닭으로 보르도 정상급 와인생산자들과 힘겨루기 아닌 힘겨루기를 해야 했던 장 뤽 뛰느뱅. 20여 년의 짧은 설립 역사가 보르도 정통 양조가문들의 유구한 역사에 비할 것은 없지만, 이 이방인에 의해 창조된 가라쥬 와인 샤토 발랑드로가 보르도의 값진 유산으로 남아 영원히 기억될 것임은 분명하다.


문의 _ WS통상(070. 7403. 2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