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과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포도송이가 복잡한 양조과정을 거처 와인 잔에 담기는 순간까지 과학의 여러 분야는 깊은 관여를 한다. 포도 뿌리가 생장하는 토양의 기원과 성분을 알려 주는 토양학, 이를 바탕으로 토양에 적절한 품종을 찾아가는 원예학이 있다. 습도와 온도를 측정하는 센서가 장착된 드론이 24시간 포도밭을 돌면서 모니터링한 자료를 포도 재배자가 분석할 때 최소한의 기상학 지식은 필수다.
또한, 양조장에 옮겨온 포도는 진공 상태에서 주스로 압착된 후 중력의 원리를 응용해 만든 파이프에 흘러들어 발효장치와 숙성 용기로 보내진다. 이 장치들은 중앙컴퓨터와 연결되어 한 틈의 실수 없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통제된다. 소믈리에나 와인 애호가들이 와인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다양한 용어들은 사실상 복잡한 화학 구조식으로 연결된 방향물질이 그들의 훈련된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된 아로마 성분일 뿐이다.
와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진보된 과학이 일부 와인생산자의 구전지식에 추월당하는 경우가 발생해 주목을 받고 있다. 다름아니라 이탈리아 북동 피에몬테주에 위치한 몬테로사(Monte Rosa, 정상 4634m) 알프스산맥 근교에서 3천만 년 전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자연현상과 관련이 있다.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La Reppublica 일간지, 2009년 9월 24일자 기사에 발표되었으며 기사의 일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3억 년 전 지구는 판게아라 불리는 하나의 거대한 초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재의 세시아 계곡(Valsesia)이 위치한 곳에서 초화산이 폭발했는데 이 분출로 인해 직경이 15km인 칼데라가 형성되었다. 이때 분출한 마그마 양이 500km3(2조 톤)에 달했으며 화산재와 먼지구름은 하늘을 가려 기후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 후 남미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대륙 쪽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하다가 3천만년 경 현재의 북이탈리아 부근에 충돌한다. 이 두 대륙이 부딪힌 지점은 충돌압력에 의해 솟아올라 알프스 산맥이 된다. 이때 3억년전에 초화산 폭팔 뒤 땅 속에 굳었던 마그마가 지표로 노출된다. 즉, 그동안 땅 밑 25km지점에 갇혀 있던 맨틀의 암석이 마치 버터를 컬러(curler)로 밀면 버터가 안으로 휘말리는 것처럼 땅의 속과 겉이 뒤집혔다. 그동안 활화산 밑에서 활동하는 마그마에 접근이 불가능해 마그마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불가능했는데 세시아 계곡의 마그마 암석 존재가 밝혀짐으로서 땅속의 신비를 밝힐 기회가 되었다."
위의 기사는 30년간 문제의 지역을 삿삿히 훑다시피해서 얻은 두 지리학자의 놀라운 연구결과지만, 사실상 몇 세기 전부터 세시아 계곡의 포도 재배농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이 과학을 통해 검증된 것에 불과하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토양을 제대로 알아야 적절한 포도를 심을 수 있었던 이유로 농부들은 열심히 문헌을 찾고 연구를 했었다. 나름대로 얻은 토양지식을 와인의 특성과 연결시켜 와인의 차별화를 이룰 수 있었으며 그 저변에는 와인판매를 늘일 수 있다는 타산도 깔려있었다.
<북피에몬테 와인지역의 화산암, 반암(porfidi)으로 불린다. 사진출처: https://www.vinoaltop.it/ALTO-PIEMONTE/Terreni >
토양의 기원이 태고시대와 연결되는 이 화산암 지역에는 북피에몬테(Alto Piemont) 와인 지역이 둥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는 세시아강에 의해 다시 좌안과 우안으로 나뉜다. 양쪽 모두 등급 와인지역으로 좌안에는 레쏘나(Lessona DOC), 브라마테라(Bramaterra DOC), 가티나라(Gattinara DOCG) , 코스테 델라 세시아(Coste della Sesia DOC) 와인이 생산된다. 우안은 보카(Boca DOC), 겜메(Ghemme DOCG), 시짜노(Sizzano DOC), 파라(Fara DOC), 콜리네 노바레시 (Colline Novaresi DOC) 와인의 본산지이다.
<북피에몬테 와인지역, 세시아(Sesia)강을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보카, 겜메, 시짜노, 파라, 가티나라, 레쏘나, 브라마테라 가 있다>
북피에몬테는 이곳 방언으로 스판나(Spanna)라 불리는 네비올로가 주된 품종이며 크로아티나, 우바 라라, 베스폴리나 품종을 50% 까지 혼합할 수 있다. 이 블렌딩 비율은 DOC등급 와인의 경우이며, DOCG 와인은 네비올로만 사용하는 게 추세다. DOCG와인은 최대 10~15% 선에서 앞에서 언급한 허용품종을 블렌딩 할 수 있지만, 생산자들은 베스폴리나 품종을 선호한다. 베스폴리나는 두드러지는 과일 향과 안토시아닌, 그리고 부드러운 타닌을 지니고 있으며 소량만 넣어도 네비올로의 향미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화룡정점 역할을 한다.
북피에몬테 네비올로 와인은 독특한 토양역사를 바탕으로 차별성을 구축해왔지만 같은 주의 남쪽에 위치한 랑게 네비올로 지역과는 따로 분리될 수 없는 한 몸 이다. 두 지역의 직선거리가 120km 내외의 근접성과 극소수의 고품질 네비올로 와인 지역이라는 점은 두 와인이 종종 비교의 도마에 오르는 걸 피할 수 없다. 북피에몬테 생산자들은 자신이 만든 와인이 랑게의 네비올로와 매우 다르다는 걸 증명 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랑게는 해양생물의 사체가 화학변화를 일으켜 수 천만 년간 퇴적되어 생긴 이회토이며 미솃, 람피아 계열의 네비올로 와인이지만 북피에몬테의 네비올로는 스판나로 불리는 토착 품종이다. 랑게 네비올로는 다른 품종을 함유하지 않지만 이곳은 일부docg와인을 제외하고는 블렌딩이 일반적이며 숙성스타일은 프랑스 배럴(225l)보다는 슬라보니아산 보테를 선호하는 보수적 경향이 짙다.
위도상으로 볼 때 랑게에 비해 북쪽에 있기 때문에 밤낮기온이 연평균 3~4도 낮고 알프스의 영향이 강한 산악기후다. 랑게에 비해 강우량이 높고 알프스 산을 타고 내려오는 찬바람은 낮은 구릉에 고여있는 습한 공기를 흩어지게 해 네비올로가 성숙하는 가을에는 안개가 끼지 않는다.
그러면 화산암은 네비올로의 개성에 얼마나 관여할까. 장미, 비올라 꽃과 검붉은색 과일, 향신료향 등 네비올로의 고유의 향기와 소량의 야채, 광물향, 바다의 비릿내 음이 더해진다. 차분한 알코올의 느낌과 두드러지는 산미, 타닌의 강도와 부드러움은 베스폴리나 품종 사용 여부에 따라 다르다.
<세시아강 좌안에서 생산되는 와인들:가티나라(Nervi 와이너리), 브라마테라(Le Pianelle와이너리), 레쏘나(Tenute Sella 와이너리)>
북피에몬테 지역중 보카, 브라마테라, 가티나라는 3천 년 경 알프스 대격변의 중앙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곳 와인은 철 ,칼륨, 마그네슘 등이 포함된 광물 개성이 두드러지며 마치 천연양념을 곁들인 것 같은 복합미가 느껴진다. 반면,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알프스 융기이후 일어난 기상과 기후의 결과로 형성된 토양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네비올로 품종 자체의 향기와 맛을 풍긴다.
<세시아강 우안에서 생산되는 와인들: 시짜노(Comero와이너리), 보카(Le Piane와이너리), 겜메(Ioppa 와이너리), 파라(Valle Roncati와이너리)>
세시아강 좌안의 극서쪽에 위치한 레쏘나는 화산암이 바다에 잠겨있을때 퇴적된 모래층이 알프스가 솟아오를 때 드러난 지역이다. 비교적 랑게의 토양역사와 비슷하며 루비색과 높은 산도, 우아함이 바르바레스코 와인과 닮았다. 우안 남쪽에 위치한 지역(겜메, 시짜노,파라)의 토양역사는 40만년전 빙하기와 닿아 있는데,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몬테로사 알프스의 빙하가 하 강할 때 평지로 실려 온 자갈, 모래등이 화산암 표면에 퇴적된 구릉지다. 체리, 말린 꽃 향기, 짭짤함과 잘어우러지는 산미, 묵직하면서도 질감이 부드러운 타닌이 도드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