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한 유명 와인 아카데미에서 “와인품평회와 심사”라는 제목으로 마스터클래스를 주최했다. 각종 와인품평회의 운영방법과 심사기준, 와인 평가 과정, 심사위원의 역할과 자질에 대해 다룬 3시간짜리 미니 강좌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품평회에 출품된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하면서 평가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고 한다.
이 강좌는 심사위원 경력이 있는 내노라하는 와인 전문가들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성황리에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마스터클래스의 성공은 와인 품평회에 대한 와인 종사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면서, 한편으로 제3자의 시각으로 와인 품평회를 평가하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주객이 바뀐 느낌도 없지 않아 들었다.
또한 세인의 관심사를 빠르게 알아채고 그것을 아카데미의 프로그램으로 연계시킨 순발력이 놀라웠다. 궁금한 게 생기면 신속하게 답을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심리가 와인업계에도 반영된 것인지, 와인품평회의 종주국인 유럽이나 미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한국적인 와인사랑의 단편처럼 보인다. 아무쪼록 이 강좌가 소믈리에나 와인업계로의 입문을 희망하는 예비 와인인들이 거쳐야 하는 필수 과목으로 변질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2월 중순, 콩떡에 단단히 박힌 콩처럼 평창 동계 올림픽 중계를 보느라 TV 앞을 전전하던 필자는 베를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뜻은 알 수 없지만 매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이젠 독일 오페라처럼 들리는 독일어 안내방송이 흘러 나오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이미 와인 향기가 배어 있는 베를린 와인 트로피 시음장 안에 가 있었다.
올해의 베를린 거리에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은 불지 않았다. 겨울이 춥지 않은 베를린은 마치 김 빠진 스파클링 와인을 목에 넘긴 뒤 혀에 남는 밋밋한 맛처럼 맥 빠진 느낌이다. 다행히 땅거미가 질 무렵 거리 모퉁이에 서 있는 가판대에서 구세주를 만났다. 베를린의 명물 군것질거리인 ‘커리 부어스트(카레 소시지)’를 먹을 때였는데, 한 입 깨물면 입 안에 굴러드는 뜨거움을 하얀 입김으로 후후 식혀가며 먹는 순간 베를린의 품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여기에 병맥주를 ‘꿀꺽’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마시면 베를린 소시지와는 더할나위 없는 궁합이다. 카레와 케첩 소스의 맛이 배어든 구강과 식도를 차가운 맥주가 훑고 내려갈 때 전신에 퍼지는 한기로 몸이 떨리면, 비로소 베를린의 냉혹한 본색과 마주한다.
< 베를린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커리 부어스트>
베를린에는 유럽에 그 흔한 몇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돔이나 고성은 없다. 150년 간 열심히 지었지만 폭격 한 방에 붕괴된 폐허로부터 다시 일군 베를린 돔, 그리고 1891년에 완성되었지만 전폭의 피해로 건물 하부가 마치 텅 빈 동굴 같은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베를린의 고층 건물 군락의 외로운 등대지기다.
베를린 역사지구를 관통하는 스푸레강 강변에 지어진 박물관 섬은 유럽에 흔치 않은 박물관 지구다. 다섯 군데의 박물관이 한 곳에 몰려 있어 박물관 섬이라 불리는 이곳은, 베를린이 종전 후 초고속으로 복원된 계획도시라는 선입관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하다. “박물관 섬에 가는 것은 페르가몬 박물관에 가는 것”이라 할 만큼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는 페르가몬 박물관에는 기원전 575년 바빌로니아의 네브갓네살 2세가 통치할 때 세워진 이슈타르 문과 행진의 길, 페르가몬 왕국(기원전 3세기 소아시아에 세워졌던 고대 왕국) 때 제우스 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대제단, 그리고 고대 터키에 존재하던 밀레토스 도시에 있던 야외 시장 입구가 보존돼 있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따라 복원된 생생함과 그 규모는 젊은 베를린에 역사의 무게감을 얹는다.
<페르가몬 박물관 1층 내부, 기원전 575년 바빌로니아의 네브갓네살 2세가 통치할 때 지어진 ‘행진의 길’의 일부>
이탈리아의 유명한 와인 중 원조 와인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DI’ 란 단어 앞뒤에 그 와인이 처음 생산된 마을 이름을 붙인다. 바롤로 디 바롤로(Barolo Di Barolo)나 가비 디 가비(Gavi Di Gavi) 와인이 그 예로, 바롤로 또는 가비 마을에서 동명 와인이 최초로 생산되었음은 물론 와인에도 엄연히 족보가 있음을 은밀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베를린의 원조는 어디일까? 베를린의 분단시절을 위트와 유머로 풀어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가 ‘베를린 Di 베를린’이 아닐까 싶다.
박물관 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프레 강과 평행으로 뻗어 있는 1.3 km 구간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105점의 벽화와 그래피티에서는 단절의 슬픔과 분노는 찾아볼 수 없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118명의 예술가가 그렸다곤 하지만, 일부 벽화는 초보자나 어린아이가 그렸다고 여겨질 만큼 천진난만하고 단순한 붓터치는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진다.
생생한 키스 장면을 보고 남사스럽다고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림 주위를 쉽게 떠날 수 없게 만드는 ‘형제의 키스’의 흡입력, 유명 메이커 신발을 신은 금발의 동독인이 장벽을 뛰어넘는 벽화는 그러한 행위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급박한 상황임을 위트로 넘기는 반전의 묘미가 있다.
< 디미트리 푸르벨작 ‘형제의 키스’(좌), 가브리엘 하임러 작 ‘장벽을 뛰어 넘은 사람’(우)>
동독인의 국민차인 왜소한 트라반트가 벽을 뚫고 나오는 비르깃 킨더(Birgit Kinder)의 그림은 다소 애니메이션 같지만, 운전자의 검은 형체는 자유에 대한 단호한 열망이 서려 있어 결코 가볍지 않다. 아래 사진은 Saar-Mosel-Winzersekt GmbH 와이너리에서 만든 젝트 와인(리슬링 100%)으로, 베를린의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비르깃 킨더가 그린 ‘남은 것을 시험하라’ 벽화를 레이블에 사용했다.
레드 와인 빛깔로 물든 입술 언저리와 치아가 드러나는 것에 괘념치 않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치아를 드러낸 채 사진을 찍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때가 되면 ‘베를린 와인트로피(Berlin Wine Trophy)’의 종료일이 다가온다. 일련의 와인 샘플을 평가할 때 팀원들 간의 점수가 일치하거나 차이가 있더라도 1~2점 내외로 근소할 때 전달되는 스릴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번 베를린 트로피에 참가하면서, 품평회의 명성이나 규모도 중요하지만 내가 속한 팀의 팀워크와 양보심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한번은, 리슬링 와인 심사 중 평가가 반으로 나뉘는 일이 있었다. 우리 팀에 속한 다섯 명의 심사위원 중 3명은 와인이 은메달(82~84점)에, 나머지 2명은 금메달(85~91점)에 입상할 자격이 있다고 의견을 서로 달리했다(참고로, OIV 국제 와인 기구의 규정에 따르면 심사위원들이 그랜드 골드, 금, 은 메달 후보를 먼저 결정하면 품평회 주최측이 메달 후보가 된 와인들을 취합하여 그 중 30% 이내에 드는 와인에만 점수 별로 그랜드 골드, 금, 은 메달을 수여한다).
전직 양조가 출신의 팀 리더는 와인이 은메달을 받을 만하다고, 독일인 양조가는 금메달을 받을 만하다고 결정했다. 즉, 최고 점수와 최저 점수를 제외한 나머지 점수의 평균이 최종 점수가 되는 와인품평회의 기본 규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와인을 다시 시음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우리는 팀 리더에게 결정권을 넘겼지만 그는 다시 독일인 양조가에게 의견을 구했고,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 팀 리더는 와인이 금메달 입상 자격이 있다는데 동의했다.
국제 와인 기구의 심사기준은 와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데 절대적이며 유용한 방편일 수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모든 상황과 그에 대한 적절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만능규정은 아니다. 규정대로 했으면 이 와인은 은메달을 수상했을 터였지만 팀 리더의 겸손과 팀원의 경험을 존중하는 사려 깊은 태도로 우리 팀은 한 와인의 운명을 달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