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고향 토스카나를 여행한다면 언제가 제일 좋을까. 와인을 역사의 귀중한 한 조각이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2월이 좋다. 매년 2월 한 주 동안 토스카나 와인의 향연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산지오베제를 좋아하는 이라면 특히 이 계절을 추천한다. 토스카나의 아름다움은 해바라기가 만발하는 계절에, 혹은 화려한 야생화들이 울긋불긋 반기는 계절에 더욱 화려하겠지만, 2월도 좋다. 대지에 내려진 빈티지의 축복이 액화되어 글라스에 담겨 나오기 때문이다.

 

매년 토스카나의 와인 조합들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와인 전시회, ‘토스카나 바이’를 전세계의 와인전문가, 저널리스트, 수입상들이 기다린다. 이 전시회에는 키안티, 키안티 클라시코,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베르나차 디 산지미냐노, 카르미냐노, 콜리 루케지 등의 조합들이 참가한다. 조합원들은 대부분 산지오베제를 주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지만, 예외가 하나 있다. 바로 베르나차 디 산지미냐노 화이트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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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빈티지에 대해서는 산지오베제의 품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이 총평이다. 전시회의 시음 경로는 산지오베제의 복합미가 크리센도로 흐르게 기획되었다. 매일 매일 균형미와 타닌의 구조감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행선지가 바뀐다. 피날레는 몬탈치노에서 맞이한다. 다만 위치상의 이유로 키안티 클라시코와 몬테풀치아노 사이에 산지미냐노를 하룻밤 들린다. 거기서 토스카나의 유일한 DOCG 화이트, 베르나차를 맛본다. 

 

최근 들어 키안티와 키안티 클라시코의 품질 향상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토스카나의 2015와 2016년 빈티지가 연달아 뛰어난 빈티지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와인은 섬세하고 향기가 좋은 스타일로 점점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포도 본연의 완숙한 아로마, 인위적이지 않은 타닌, 완벽하게 부드러운 조화 등이 지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방향으로 와인을 양조하려는 노력 덕분에, 평론가 로버트 파커같은 글로벌 파워를 이제는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한때 파커 점수에 영향을 받던 소비자와 생산자들이 자신의 입맛을 발견해 나가는 동안 파커는 그 영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실제로 수출 위주의 양조장들이 와인 설명서에 예닐곱개 이상의 평가기관 점수를 나열하고 있을 정도로, 특정 평론가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여러 군데의 평가 기관으로 그 힘이 분산되고 있다. 와인 평가기관에 와인을 아예 보내지 않는 양조장도 늘고 있다. 바야흐로 점수 만능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는 것일까. 주최측에서 행사가 성공했다고 자평하는 이유 역시 일반인 참가자들의 규모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지속되는 불황에도 불구하고 국제 저널리스트들의 참가도 늘었다.
 
올해에는 특히 키안티 클라시코의 품질 향상이 두드러졌다. 강한 산미를 제외하면, 산지오베제는 피노 누아와 흡사하다. 파워 보다는 밸런스, 바디감 보다는 섬세함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수준급의 키안티 클라시코는 몬테풀치아노나 몬탈치노만큼의 품질을 인정받는다. 그들간의 가격차이도 별로 없다. 그런 수준에 이르면 원산지의 우열도 의미가 별로 없는 것이다.

 

키안티 클라시코의 강점은 문헌이 확인해준 역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키안티 클라시코는 프랑스의 원산지 제도가 울고 갈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1716년 9월 24일, 토스카나 대공작은 키안티의 구획을 확정하고 그 이름을 구분해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는 1725년 프랑스 보르도의 ‘비노블 드 보르도’라 알려진 지역 구분보다 9년을 앞선 것이다. 프랑스 와인에 경도된 한국 시장에서 이런 사실이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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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의 역사를 무기삼은 키안티 클라시코 조합은, 올해 정유년 2017년을 불닭의 해로 선포하며 대 중국 마케팅에도 힘을 쏟고 있다. 2015년 키안티 클라시코는 톡 쏘는 듯한 제비꽃과 딸기 아로마가 매력적이며, 또한 유려하고 섬세한 질감을 선사한다. 산 주스토 아 렌텐나노, 아마, 리에치네, 몬테세콘도, 몬테라포니, 이솔레올레나 등이 특히 돋보인다. 또한 1982 몬산토는 산지오베제의 숙성력과 우아미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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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마을’로 알려진 산지미냐노는, 전성기였던 14세기에 탑의 수가 72개에 달할 만큼 번성했고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흑사병을 비롯한 내우외환이 겹치며 지금은 7개의 탑만이 남아 있다. 그래도 여전히 탑의 마을이란 칭호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는 길은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순례길 ‘비아 프란치제나’에 속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비아 프란치제나는 영국 켄터베리에서 로마 바티칸에 이르는 유서 깊은 순례길이다. 최근 국내 카톨릭교도들에 의해 그 길이 조금씩 한국에도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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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미냐노는 샤블리나 지브리처럼 먼 옛날 바다에 잠겨 있던 지형이 융기한 곳이다. 이러한 지형이 지닌 토양의 특징은 산지미냐노를 화이트 와인의 명산지로 만들었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살라 단테’(단테의 방)에서는 매년 이맘때 비교 시음회가 열리는데, 베르나차의 특성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산지미냐노처럼 한때 바다였던 지역에서 생산된 화이트 와인을 등장시키고 샤블리나 지브리의 와인과 비교 시음한다.

 

베르나차는 샤블리나 지브리의 와인처럼 씹히는 질감과 풍부한 미네랄이 느껴지는 스타일이다. 리슬링처럼 막 출시되었을 때에도 맛있고, 숙성되어도 맛있는 그런 화이트 와인이다. 몬테니돌리, 체자니, 콜롬바이오, 팔라지오네 등이 좋은 품질을 선보인다. 최근 출간된 아르만도 카스타뇨의 저서 <베르나차 디 산지미냐노>에는 산지미냐노의 역사, 문학, 예술, 와인이 잘 기술되어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또 한가지. 산지미냐노는 샤프란 재배로도 제법 정평이 나 있다. 

 

매년 기발한 아이디어로 저널리스트들을 즐겁게 하는 몬테풀치아노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와인조합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멋들어진 와인샵을 선보인 것이다. 몬테풀치아노 성 내부에 신설된 이 와인샵에서 지역의 모든 와인을 향토 음식과 함께 맛볼 수 있다. 방문객들은 이 지역에서 제일 맛있는 치즈 브랜드 ‘쿠구지’와 푸주한 파비오의 소시지를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 지난 십여 년간의 공사가 말끔하게 정리된 바닥에는 에트루리아, 로마, 중세의 유적물이 투명한 발판 아래에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몬테풀치아노의 깊은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다.

 

2014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2015 로쏘 디 몬테풀치아노, 그리고 2013 비노 노빌레 리제르바가 선보인 시음장에서는 내년에 있을 2015 비노 노빌레 시음을 기대하겠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사실 2014 비노 노빌레는 강력한 타닌과 산미가 제대로 균형을 이루지 못했고, 별 세 개 밖에 받지 못한 빈티지의 한계를 드러냈다. 몬테풀치아노는 이웃 마을 몬탈치노처럼. 매년 직전연도의 빈티지 수준을 별의 개수로 평가하여 발표한다. 별 다섯 개가 만점이니, 별 세 개를 받은 2014는 평균 이하인 셈이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들은 짐을 싸며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별 다섯 개 빈티지가 기다리는 몬탈치노로 이제 곧 이동하기 때문이다.

 

몬테풀치아노를 떠나기 전에 반드시 들리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의 커피 한잔은 정말 낭만적이다. 1764년에 문을 연 폴리차노 카페는 근엄하고 중후한 이탈리아 카페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여기 출신의 르네상스 시인 폴리차노는 카페에도 등장하고 와인에도 등장한다. 그 이름을 딴 양조장 폴리차노도 있다. 폴리차노 양조장의 오너인 카를렛티는 막 와인샵을 오픈했다며 대용량 샴페인의 마개를 열고 잔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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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장인 체자레를 만나는 것도 챙겨야 한다. 과연 그가 올해는 어떤 깜짝 쇼를 보여줄지 기대가 컸다. 체자레는 구리와 한평생을 같이 한 노장이지만, 방문객들에겐 소년처럼 장난치기를 좋아한다. 그는 나를 보더니 안경을 벗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제법 크고 육중한 구리 냄비뚜껑을 들고 망치로 세게 내리치더니 그 뚜껑을 곧장 내 머리에 씌우려 했다. 그 순간 울리던 소리가 따뜻한 열로 치환되어 정수리가 따끔했다. “앗 뜨거!” 진동이 열에너지를 잔뜩 발산했다. 체자레는 여러 제품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뉴욕, 시카고 등의 고급 식당에 자신의 제품이 많이 쓰인다고 한껏 자랑했다.

 

몸은 몬테풀치아노에 있지만, 마음은 다들 몬탈치노에 있는 것 같다. 오전의 몬테풀치아노 와인 시음을 끝내고 남은 시간 고전적인 구시가를 산책하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은 바빠진다. 몬탈치노 와인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최대한 일정을 앞당겨 몬탈치노로 향하고 싶은 것이다. 일정상으로는 저녁을 먹고 밤늦게 셔틀을 타고 이동하게 되어 있지만, 많은 이들이 일몰 전에 그곳에 당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시청 앞 피아차 그란데 광장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은 후에야, 유서 깊고 격조 있는 석조 건물들을 마주한 후에야 비로소 몬테풀치아노와 작별할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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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몬탈치노는 우리에게 별 다섯 개보다 훨씬 많은 별을 선물했다. 무려 별이 열 다섯 개나 된다. 직전연도 2016 빈티지의 별 다섯, 2012 브루넬로의 별 다섯, 그리고 2015 로쏘 디 몬탈치노의 별 다섯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음장은 열기가 가득했다. 이틀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수백 가지의 브루넬로를 시음하려면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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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음 주간의 토요일 아침은 모두 분주하다. 베일에 감춰져 있던 빈티지의 시각적 이미지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브루넬로 협회에서는 매년 빈티지 결과를 축하하는 차원에서 아티스트들의 작품 이미지를 타일로 만들어 마을 회관의 벽에다 붙이고 대대적으로 발표한다. 로베르토 까발리, 살바토레 페라가모 같은 패션 디자이너와 지역 화가들의 작품도 헌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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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올해는 어떤 화가가 주인공일까 긴장하고 있는 순간, 결과가 나오자 참가자들이 환호했다. 2016년 빈티지는 앞서 말한대로 별 다섯 개를 받았으며, 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미슐랭 가이드가 선정되었다(위 사진). 브루넬로의 우수성을 미슐랭과 접목시킨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친숙한 미슐랭의 붉은 색조가 벽 한쪽에 타일로 박혔다. 누군가 별 다섯 브루넬로를 겨우 별 셋의 미슐랭과 결합시키는 것은 좀 밑지는 장사라며 농을 부렸다. 우리 모두는 즐거워하며 2012 브루넬로를 시음했다. 2015 로쏘 디 몬탈치노와 함께 쿠파노, 파토이, 풀리니, 일 마로네토, 레 키우제, 레 라냐이에, 마스트로야니, 포데레 레 리피, 포지오 디 소토, 살비오니, 테누타 레 포타치네, 카판나 등이 돋보였다.

 

한때 최고의 브루넬로라고 평가받던 체르바이오나는 이제 주인이 바뀌었다. 수십 년을 동거했던 디에고와 노라는 노년에 갈라서서 딴 살림을 차렸다. 더 이상 체르바이오나에서는 두사람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과의 오랜 추억이 내가 소장한 올드 빈티지의 부케 속에서 되살아나길 기대할 뿐. 포지오 디 소토가 그랬듯이 체르바이오나도 이제 바통이 딴 곳으로 넘어갔다. 

 

내 친구 도메니코의 민박집으로 체크인하러 들어서면서 옆집으로 이사온 노라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의 쾌활한 목소리와 손짓에는 어딘가 모를 슬픔이 서려 있었다. 최근 도메니코의 안타까운 부음 소식을 접한 그녀는 몬탈치노로 다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나는 도메니코의 둘째 며느리 롯산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축하 이메일을 보냈다. 올해 8월의 팔리오에서는 온다 콘트라다가 또 우승했다고 한다. 누구는 가고 또 누구는 온다. 균형이 잘 잡힌 2012 브루넬로를 도메니코 가족들과 함께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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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_ 조정용
 
<프랑스와인여행자>, <올댓와인>외에 세 권의 와인서적을 출간한 와인 저널리스트이다. 
2013년부터는 큐리어스와인(주)을 설립하여, 유럽의 소규모 농부들이 생산하는 와인을 국내에 수입하여 주로 레스토랑에 유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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