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와인의 라벨에 “vieilles vignes”(영어로는 old vines) 라고 적혀 있다면 이 와인은 고령의 포도나무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뜻이다. 한때 국내의 와인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호주의 Two Hands 시리즈 중 "Gnaly"나 미국 와인의 "Old Vine Zinfandel" 역시 old vines가 지닌 특별함을 마케팅하기 위해 만들어진 와인이다.
슬로베니아의 자메토브카(Zametovka) 품종의 포도나무는 17세기에 심어져 4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출처_ Žametovka from Wikipedia). 딱히 그 기준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80~100년을 넘어가면 old vine으로 간주한다. 와인생산자들은 포도나무 수령이 오래되면 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포도밭의 꾸준한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령의 포도나무를 적정 수령의 포도나무로 대체한다.
보통 수요가 꾸준히 높은 유명한 와인산지의 포도나무는 80~100년이 되기 전에 포도밭에서 사라진다. 따라서 "old vine"이란 이름이 붙은 와인은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같은 기존의 와인 산지보다는 호주, 미국 같은 신세계 와인이거나,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즉 생산량이 덜 관리된) 원산지(AOC)나 샤토(Chateau)의 와인일 확률이 높다.
과일나무의 생산력은 수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들 들어 Oil palm(기름야자나무)의 경우 9년생이 될 때까지 생산력이 급증한 후 19년생일 때까지 왕성한 생산력을 보이다가 그 이후에는 고령이 되면서 생산력이 감소한다.
▲ 기름야자나무의 수령과 생산량 관계
(출처_ USDA REPORT, 2011 )
포도나무 역시 마찬가지로, 스페인 리오하 지역의 Bodegas Beronia의 와인메이커에 따르면 40년생 포도나무는 20년생 보다 생산량이 20% 적고, 80년생은 40년생보다 15% 생산량이 줄어든다고 한다(출처_"Old Vines", The World of Fine Wine, 2015년 10월호) 그래서 대부분의 와이너리는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을 30년~40년 수준으로 유지, 관리한다.
그렇다면 생산력이 떨어지는 고령의 포도나무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포도나무 뿌리와 관련이 있다. 나무는 땅 위에서 자라는 만큼 땅 아래에서도 같은 크기로 자라며, 이듬해 새 가지가 나는 비율만큼 가는 뿌리 역시 새로 자란다. 이 때 땅 속 수분은 대부분의 뿌리를 통해 흡수되지만 양분은 가는 뿌리를 통해 흡수된다. 해가 거듭되고 포도나무 수령이 더해지면서 가는 뿌리들이 자라 땅 속 깊이 파고 들며 뿌리 시스템이 확장되는데, 이로써 깊은 땅 속의 다양한 양분을 흡수할 수 있는 뿌리 시스템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 소사나무의 새 뿌리가 자라는 모양(좌), 포도나무 줄기와 뿌리 모양(우, 출처_Purple Liquid: a wine and food diary)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식견을 넓히고 이를 통해 젊은 사람보다는 더 지혜로운 결정과 행동을 하게 되듯, 오래된 포도나무는 뿌리를 뻗을수록 다양한 토양층의 양분을 흡수함으로써 어린 포도나무보다는 더 복합적인 와인의 풍미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령의 포도나무의 와인은 더 특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특별함이란 그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에서 자란 평균 수령의 포도나무의 와인이 제공하는 풍미보다 상대적으로 특별하다는 의미이지. 오래된 포도나무의 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품질이 좋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Two Hands의 "Gnaly Shyraz"는 같은 포도밭에서 자라는 평균 수령의 Shyraz보다는 특별할 수 있으며, Beringer의 "Old Vine Zinfandel" 역시 평균 수령의 Zinfandel 보다는 특별할 수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단, 특별한 양조방법과 숙성 방법에 따른 효과는 제외).
현대의 와인 생산 시스템 하에서 80년~100년 이상의 오래된 포도나무는 많이 찾아볼 수 없으며, 그래서 희귀할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와인의 풍미를 기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와인 라벨에 "vieilles vignes"나 "Old Vine"이 적혀 있다고 해서 그 의미 이상의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 글쓴이_ 이상철
경영학과 마케팅을 전공하고 통신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보르도 와인을 통해 와인의 매력을 느껴 와인을 공부하며 와인 애호가가 되었다.
중앙대 와인소믈리에 과정을 수료하고 WSET Advance Certificate LV 3 를 취득하였으며 와인 애호가로서 국내 소믈리에 대회에 출전하여 수상한 경력이 있다.
2004년 부터 현재까지 쵸리(chory)라는 필명으로 와인 블로그를 운영하며 개인 시음기와 와인 정보 및 분석적이 포스팅을 공유하며 생활 속의 와인 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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