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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인 안데스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아르헨티나는 인접해있는 칠레와 함께 신세계 와인생산국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그러나 세계 5위 규모의 와인생산량을 자랑하면서도 대부분의 와인이 자국에서 소비되기 때문에, 칠레나 미국 같은 다른 신세계 와인생산국에 비해 외부 세계에 덜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와인 전문가 캐런 맥닐은 아르헨티나를 “남아메리카의 와인생산국 가운데 가장 당혹스러운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자국의 와인소비량뿐만 아니라 와인의 품질, 여타 정치, 경제적인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아르헨티나 와인의 수출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한국으로의 수입량 역시 증가하는 추세다. 국내 와인 시장에서 아르헨티나 와인의 시장 점유율은 2%로 7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2012-2013 수출입 자료에 의하면 레드 와인뿐만 아니라 화이트 와인 매출 또한 성장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와인의 약 70% 이상이 생산되는 멘도자 지역은 해발 1,494m에 달하는 안데스 산맥의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어 세계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와인 생산지다. 사막을 떠올리게 하는 건조한 기후와 풍부한 일조량, 적은 강우량으로 필록세라(포도나무뿌리진디)를 비롯한 병충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

기자가 멘도자에 도착한 날도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방문한 보데가 와이너트(Bodega Weinert)에서는 소박하고 간결한 외관과는 사뭇 다른 시간과 깊이를 간직한 와인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백발의 인자한 와인양조가와 그의 와인은 아르헨티나 와인의 다양성과 잠재력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알타 비스타(Alta Vista)에서는, 프랑스식 양조 전통과 아르헨티나의 테루아(terroir, 포도가 재배되는 특정한 환경을 지칭)를 접목시켜 만든 잠재력이 풍부한 와인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멘도자 와인 산업의 중심에 있는 트리벤토(Trivento)와 트라피체(Trapiche)에서는 젊고 열정적인 와인양조가들이 선보이는 다채로운 스타일의 와인을 만날 수 있었고, 새로운 테루아와 품질 좋은 와인을 위한 끊임없는 실험의 현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카이켄(Kaiken) 와이너리에서는 칠레 와인 산업의 주역인 아우렐리오 몬테스의 아들 몬테스 주니어가 또 다른 신화를 쓰고 있었다.


오랜 시간과 정성이 만들어낸 깊고 진한 와인, 보데가 와이너트

보데가 와이너트(Bodega Weinert)는 소박하고 평온해 보이는 마을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70년대에 와이너트 가문이 정착해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이곳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데, 양조장 깊숙한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아우라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양조장 한 켠에는 직경이 4미터도 넘어 보이는 거대한 오크통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약 500년 수령의 나무로 만든 130년 된 오크통은 아직도 와인을 보관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와이너트의 레드 와인은 대부분 이 거대한 오크통에서 2~3년 이상 숙성된 후 병입된다.

거대한 오크통 터널을 지나면 지하 와인저장고로 가는 문을 만날 수 있는데 여기에 와이너트가 만든 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빈티지 와인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에서 기자가 시음한 1999년 빈티지의 메를로 와인은 영롱하고 맑은 루비빛을 띠며 은은하게 피어 오르는 과일 향과 함께 뛰어난 밸런스와 우아한 자태를 뽐냈는데, 와인메이커에 따르면 처음 만들 당시에는 실패작이라고 여겨졌으나 오크통에 6개월 정도 숙성시킨 후 전혀 다른 와인이 되었단다.

와이너트의 와인은 백발의 와인메이커가 들인 정성과 와인에 대한 철학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듯 시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깊이와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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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양조 기술과 아르헨티나 테루아의 만남, 알타 비스타

알타 비스타(Alta Vista)는 한때 프랑스의 샴페인 하우스 파이퍼 하이직(Piper-Heidsieck)을 소유했던 돌랑 가문의 후손인 패트릭 돌랑이 세운 와이너리다. 그리고 당시 누구도 테루아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던 때에 이곳에서 최초의 싱글 빈야드 와인(single vineyard wine, 특정 포도밭 한군데서 생산되는 와인)이 탄생했다.

이렇게 프랑스식 양조 기법과 아르헨티나의 테루아가 공존하는 알타 비스타에서 만드는 와인 중에는 토론테스 품종으로 만들어 신선하고 상큼한 과일과 꽃 향이 넘치는 화이트 와인을 만날 수 있는데, 14.5도의 높은 알코올 도수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밸런스가 뛰어나다. 사실 알타 비스타의 와인 대부분은 이처럼 밸런스가 뛰어나며 산도가 좋고 풍미가 은은하여 음식과 함께하기에 좋은 맛과 향을 지니고 있다. 한편 연간 약 9천 병 정도 밖에 생산하지 않는 알타 비스타의 아이콘 와인 알토(Alto)는 약 10~15년의 숙성 잠재력을 지닌 파워풀한 와인으로, 복합적인 아로마와 부드러운 타닌, 뛰어난 밸런스가 돋보인다. (레뱅드매일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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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젊고 감각적인 와이너리, 트리벤토

‘멘도자 지역에 불어오는 세 가지 바람’을 의미하는 트리벤토(Trivento)는 1996년에 콘차이 토로(Concha y Toro)가 설립한 와이너리로, 짧은 기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모던한 외관의 건물 내에는 양조 설비, 갤러리, 방문자 센터, 셀러 등이 모두 위치하고 있어 방문객들에게 와인을 만드는 과정뿐만 아니라 와인을 마시며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와인 수출 2위를 기록하며 전세계 100여 개국으로 와인을 수출하는 트리벤토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와인의 품질이다. 리저브 와인은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좋고, 골드 리저브급 와인 중에서는 가볍고 상쾌한 토론테스 와인과 진한 과일과 가죽 향이 조화로운 말벡 와인이 돋보이며,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신선한 과일 향, 무겁지 않은 타닌과 산뜻한 산도의 조화가 빼어나다. (길진인터내셔날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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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No.1 와이너리, 트라피체

전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 와인이자 국내 시장에 말벡 붐을 일으킨 장본인인 트라피체(Trapiche)는 1883년에 설립되어 오랜 역사를 지닌 와이너리다. 트라피체의 가장 큰 수출 시장은 미국과 캐나다이며,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내년에 출시 10주년을 맞이한다.

트라피체의 와인은 종류가 상당히 많고 사용하는 품종 또한 다채롭다. 샤르도네와 토론테스 와인의 경우 음식과 먹기에 좋은 산뜻한 화이트 와인이며,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으로 만드는 핀카 라스 팔마스(Finca Las Palmas) 와인은 농축된 과일, 향신료, 후추의 복합적인 풍미를 드러내고 부드러운 타닌과 산도의 밸런스가 뛰어나다. 한편, 세계적인 와인 양조 컨설턴트인 미셸 롤랑의 노하우로 탄생한 이스카이(ISCAY)는 그간 고수해 온 말벡과 카베르네 프랑 품종의 조합을 깨고 2010년 빈티지부터 시라와 비오니에의 블렌딩으로 새롭게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농축미가 돋보이고 꽃 향이 물씬 풍기는 와인으로 국내 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금양인터내셔날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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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스 주니어가 이끄는 열정적인 와이너리, 카이켄

칠레 와인 산업의 성공 신화인 몬테스를 떠올리며 카이켄(Kaiken)을 방문한다면, 그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에 적잖이 놀랄지도 모른다. 지속 가능한 친환경 농법을 바탕으로 와인을 만드는 이곳의 포도밭에는 오리 떼가 줄지어 다니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카이켄은 몬테스가 아르헨티나에 설립한 와이너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와인 양조와 와이너리 운영은 몬테스 주니어가 모두 담당하고 있다. 기자가 만난 몬테스 주니어는 경영자보다는 양조가로서의 삶이 더욱 재미있는 듯 포도밭, 와인, 와인양조가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양조가로서 그가 가장 주목하는 품종은 말벡과 카베르네 소비뇽이다. 말벡의 경우 수령이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더 좋은 포도를 얻을 수 있는데, 아이콘 와인인 마이(Mai)의 경우 100년이 넘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말벡 포도를 사용하며 부드럽고 비단 같은 질감의 타닌과 산도가 조화를 이룬다. 카이켄의 리제르바 말벡은 누구나 마시기 편한 가벼운 와인이며, 울트라 말벡은 각기 다른 세 지역에서 재배한 말벡을 블렌딩하여 만들어 농축미와 파워가 돋보이는 탄탄한 와인이다. (나라셀라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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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와인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멘도자 지역을 둘러본 뒤에도 아르헨티나 와인에 대한 갈증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멘도자의 품질 좋은 스파클링 와인, 말벡 와인보다 훨씬 뛰어난 맛을 보여준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와 토론테스로 만든 산뜻하고 경쾌한 화이트 와인들, 그리고 뜻밖에 만난 오래된 빈티지의 와인 등, 이들을 통해 발견한 아르헨티나 와인의 다양성과 잠재력 덕분에 한동안 아르헨티나 와인에 대한 갈증은 더 깊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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