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스놉이 되지 않는 길
"자연은 아무 말 없이 존재하는데, 과학은 자연을 자꾸 분석하려고 한다."
지난 2009년, 한 수입사에서 주최한 세미나를 통해 맷 크레이머(Matt Kramer)라는 와인 칼럼니스트를 처음으로 만났다. 물론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라는 유명한 와인 매체를 통해 그의 칼럼은 꾸준히 접해 오던 터여서 그와의 첫 대면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으나, 세계적인 와인 칼럼니스트를 이렇게 눈앞에서 만난다는 사실에 적잖이 흥분되기도 했다.
‘지적 경외감’. 기자를 흥분시켰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크레이머는 1976년부터 지금까지 30여년이 넘도록 꾸준히 음식 및 와인에 대한 칼럼을 써 온 베테랑 중에 베테랑이다. 그가 쓴 글을 읽다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의 지식의 깊이는 끝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게다가 그의 글은 지식 전달에만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의 기저에 깔려있는 문화, 예술, 역사, 철학적 배경들을 함께 고찰한다. 그리고 고민한다. 우리가 사물을 대하는 얄팍한 시선에 대해서.
Making Sense of Wine에는 맷 크레이머의 지식과 경험과 고민이 집대성되어 있다. 이 책은 1989년에 출간되어 전세계 와인업계를 한바탕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휴 존슨이 그를 ‘와인평론가들 중 지식인 게릴라’라고 불렀을 정도니, 이 책에서 알게 모르게 묘사된 유명 와인평론가들과 와인생산자들은 뒤통수가 따끔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 이 책(와인力)의 역자(이석우, NHN 재직)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책을 감히 번역할 생각을 한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이다. 해박한 지식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여,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매섭게 와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글을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까웠다.”
역자도 마찬가지였던 듯 하다.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는 Making Sense of Wine을 읽는 동안 ‘지적 유희’를 느꼈다고 했다. 처음 이 책을 손에 쥔 순간 단숨에 읽어버린 것도 모자라 세 번을 반복해 읽었고 이 책을 읽은 후 와인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Before & after를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청하자 역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과거의 나는, 내가 마시는 와인의 빈티지가 언제인지가 중요했고 생산 배경을 샅샅이 알아야 했으며 와인평론가들이나 매체들이 이 와인에 대해 어떤 평가(점수)를 매겼는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와인은 좋은 와인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나는 이 와인을 왜 좋아하는가’라는 보다 성숙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와인을 놓고 ‘좋거나 나쁘거나’를 따지기보다는 와인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유쾌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할 독자층이 반쯤은 확실히 정해진 셈이다. 와인을 마실 줄은 알지만 정작 왜 이 와인을 마시고 있는지는 고민해 보지 않은 이들, 그리고 위대한 와인이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이유(저자는 이를 ‘근원’이라고 표현한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빈티지 차트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들이 절반의 독자가 될 것이다.
나머지 독자층의 절반은, 다행히 이제 막 와인을 즐기기 시작하여, 지식으로 무장한 이들 앞에서 위축되고 어떤 와인을 대하더라도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경험 부족에서 기인한) 이들이 될 것이다.
맷 크레이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위대한 와인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으로,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이고, 여러 세대를 거치며 이해하게 된 가치다. 와인은 그 자체의 근원을 정교하게 표현한다. 와인은 땅이 속삭이는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즉 우리는 그런 소리로 이루어진 노래를 만드는 주체가 아니라 ‘청중’인 셈이다.
오늘날 와인을 바라보는 견해는 점차 기계론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와인을 마치 달리기 선수처럼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 이런 경향이 요즘에는 그냥 유행이 아니라 정말 타당한 기준처럼 여겨지고 있다.
비밀은 우리가 그 한가운데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수수께끼는 가까이에서 더 흐리게 보이는 법이다.”
와인을 마시는 개개인에게, 와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작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재 와인 세계를 휘두르는 (그다지 존재의 이유가 없어 보이는) 권력자들에게 우리의 미각마저 조종당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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