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먹방을 보다가 무너지는 순간은 떡볶이, 삼겹살, 치킨처럼 ‘아는 맛’이 나왔을 때다. 푸른 바다 앞에서 마시는 로제 와인의 청량함 또한 아는 맛이기에, 휴가철이 다가올수록 떠나지 못하는 나날이 야식을 참는 것처럼 괴롭다. 여행은커녕 모두가 거리를 두고 살아야만 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빠진 지 4개월째.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떠나고픈 마음을 아는 듯, SNS에는 연일 과거의 내가 올린 여행지에서의 사진을 보여준다. 2017년에는 칠레, 아르헨티나로 와이너리 투어를 떠났다. 2주간의 일정 중 가장 먼저 방문했던 곳은 미야후 밸리 Millahue Valley에 자리 잡은 프리미엄 와이너리 비냐 빅 Vina Vik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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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냐 빅은 최상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단 하나의 와인만 만든다는 점에서 보르도 그랑크뤼 와인과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총 12개의 미세 기후와 13가지 토양 타입을 지닌 곳에서 각각 다른 풍미를 지닌 포도를 생산한다. 바다와 안데스산맥에서부터 약 70km 떨어져 있는 말발굽 모양의 미야후 밸리는, 해발고도가 높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주변의 12개 계곡은 미세 기후를 조성해 더욱 완성도 높은 와인을 만들 수 있게 한다. 전체 부지는 무려 4,400ha. 이 중 326ha만 포도밭이고 나머지는 숲이다. 포도밭이 늘어나면 같은 비율로 숲 또한 늘어난다. 와이너리 앞에서 비냐 빅의 총괄 와인메이커 크리스티앙 발레호 Christian Vallejo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들은 놀라운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 드넓은 곳에 에어컨이나 전기시설조차 없는데, 그 이유는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고 중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진행되는 양조 시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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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은 프랑스 보르도 메독의 특등급 와인인 샤토 마고에서 와인 양조를 담당한 경력이 있다. 비냐 빅의 와인에서도 그가 추구하는 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시라,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는 물론이며 칠레의 토착 품종인 까르미네르를 그만의 방식으로 잘 다루어 우아하고 균형 잡힌 와인을 생산한다. 지금까지 비냐 빅은, 보르도 그랑크뤼 와이너리들이 그랑크뤼 와인과 그보다 낮은 단계의 세컨드/서드 와인을 만드는 것처럼, 플래그십 와인인 ‘비냐 빅’과 그보다 한단계 아래의 ‘밀라칼라’ 그리고 ‘라 피우 벨’의 세 가지 라인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여기에 카베르네 소비뇽 73%, 카베르네 프랑 19%에 쉬라가 8% 블랜딩된 로제 와인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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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피우 벨 로제>

 

 

일광욕을 즐기면서 마시기 좋은 와인, 신선하면서도 복합미가 넘치는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는 크리스티앙의 설명을 굳이 듣지 않아도, 로제 와인을 만드는 것 또한 보르도 그랑크뤼 와이너리들과 비슷한 행보이기에 쉽게 이해가 된다. 잘 만든 로제 와인은 더운 날씨엔 생필품과 같으니까. 

 

라 피우 벨 로제에 블렌딩된 카베르네 소비뇽은 잘 익은 레드 베리의 아로마와 미디엄 바디의 구조감을 담당한다. 카베르네 프랑은 라벤더와 바이올렛 꽃과 함께 미네랄 풍미를 선사한다. 여기에 소량 블렌딩된 시라는 와인에 살구, 패션 프루츠, 시트러스 등의 상큼한 과실향을 부여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와 숙성을 거쳐 신선함을 강조했지만, 그 중 7%의 와인은 재사용한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약 한 달간 숙성해 우아한 타닌감을 더 둥글고 균형감 있게 마무리했다. 신선한 산도와 가벼운 바디감은 시원한 여름밤, 휴가맛을 전달한다. 레몬즙을 가볍게 뿌린 연어 스테이크를 곁들이면 어떨까, 카프레제 샐러드와 같이 먹어도 맛있겠다. 아니 간단하게 아보카도를 으깨어 만든 과카몰리와 함께 하거나 감자튀김만 있어도 좋겠지. 역시 로제 와인은 화이트는 가볍고, 레드는 무거운 나날의 목마름을 채우기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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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3년 전 와이너리 방문 때 딱 하루 묵었던 비냐 빅의 7성급 호텔에서의 체류 시간은 아주 짧았다. 자유시간은 전혀 없던 출장이었고,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하면서 해 뜨는 풍경을 봤으니 잠깐 누웠다 일어난 침대가 얼마나 폭신했는지는 잊혀졌다. 그래도 불빛 하나 찾을 수 없던 완벽한 깜깜한 밤이 선사한 적막의 고요함, 건조한 칠레이지만 숲으로 둘러싸인 덕에 촉촉했던 바람의 결은 매끈한 와인의 질감만큼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한번도 이용해 보지 못했던 와인 스파와 마사지룸의 사진을 찍으며 여기는 휴가로 꼭 다시 방문해야지라는 다짐을 했었다. 그때의 다짐과 같이 오늘도 ‘언젠가 이곳에 꼭 휴가로 방문해 선베드에 누워 초록밖에 없는 숲을 바라보며 라 피우 벨 로제 와인을 마셔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핑크빛 와인은 핑크빛 상상을 하게 한다. 사회적 거리를 가깝게 할 수 있는 시기가 다시 오면 가야 할 여행지 리스트를 10개는 미리 작성해 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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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제이와인 (02-419-7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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