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올로, 열정과 인내를 말하다


 

글 조정용ㅣ 사진 조정용, 신동와인(위, Angelo Gaja)



알바(Alba,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의 소도시)에서 맛보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순수하고 단단한 포도 품종 네비올로Nebbiolo에 대한 이야기는 타닌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야기는 곧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타닌 이야기로 모양을 바꾼다.

<사진. 바롤로를 생산하는 마을 세라룽가 달바(Serralunga d’Alba)의 모습으로 이 마을 육백 명의 주민들 대부분이 양조장 관련 일을 하며 살아간다.>


알프스의 거친 지형학적 에너지는, 최고봉 몬테 비앙코(프랑스 쪽에서는 몽블랑이라 부름)를 솟게 한 것도 모자라 피에몬테의 랑게Langhe 지역에 수백 미터의 완만한 봉우리들을 잉태해 놓았다. 초봄에 눈이 먼저 녹는 봉우리마다 빼곡히 심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네비올로. 이 포도 이름은 봉우리에 끼는 안개nebbia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포도 수확 시에 끼는 가을 안개 덕에 붙여졌다는 설이 분분한데, 안개와 관계된 이름임은 분명하다.

네비올로는 강력한 타닌이 특징인 검은 포도로, 밭의 위치에 따라 로에로Roero나 바르바레스코Barbaresco 혹은 바롤로Barolo 와인으로 태어난다. 이 때 로에로에서 타닌의 강도가 피아노라면 바롤로에 이르러서는 르테시모로 확장된다.

초콜릿 세계 2위에 빛나는 페레로, 대구 육상 트랙 메이커 몬도, 그리고 이탈리아 패션의 강자 미롤리오가 튼튼하게 경제를 받쳐주는 알바에서는, 매년 5월이면 다채로운 타닌의 변모를 한 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이 때 미롤리오 회사의 1층이 양조가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아침 공기에는 페레로 공장에서 새어 나오는 초콜릿 향기가 가득하다. 알바 시민들을 다 불러모아 페레로나 미롤리오 공장에 다니지 않거나 양조업에 몸 담지 않은 이는 도대체 몇이나 되는지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사진. 알바(Alba)는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없는 게 없으며 특히 음식과 와인이 유명하여 일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사진은 알바의 중심 골목>

필자가 알바를 방문한 그 날도, 각자의 개성에 따라 각자의 밭에서 키워 저마다의 방식으로 발효하고 숙성시킨 수백 종류의 네비올로 와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특별히 이런 자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와인들도 출품되어 전문가와 수입상들은 잔뜩 기대한 모습이었다.

페데리코 체레토Federico Ceretto와 마우로 마스카렐로Mauro Mascarello의 참가는 와인 선택의 폭을 더욱 확대시켰다. “부르고뉴의 그랑 주르 같은 와인 행사처럼, 우리가 만든 네비올로 와인들을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는 이런 행사에 그간 참가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저의 탓입니다”라고 말하는 페데리코는, 이 행사가 자신의 여러 와인들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의미 깊은 자리라고 말했다. 지역 양조가 협회 알베이자Albeisa가 추진하는 ‘네비올로 프리마 Nebbiolo Prima’ 행사는 네비올로의 타닌의 깊이와 정도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라벨을 감추고 오직 잔 속에 담긴 맛으로 와인을 평가하는 이 행사는 매일 60여 가지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데, 와인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입술은 점점 타닌으로 무디어진다. 땡감을 한번만 씹어도 입천장에 섬유질이 두껍게 끼는데, 60여 가지의 타닌 많은 와인을 입에 넣고 맛을 본다고 생각해 보면 시음자의 처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가끔은 다문 입술이 열리지 않아 손가락으로 윗입술을 들어 올려야 하지 않을까 속으로 염려하며 잔을 들기도 한다.

<사진. 지역 생산자들을 만나는 곳은 패션의 강자, 미로리오(Miroglio) 사무실, 여기서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그리고 로에로의 양조장 주인들은 손님들을 맞는다.>


여러 나라에서 온 와인저널리스트들은 잔 속에 타닌만 있다면 다음 해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잔 속에는 네비올로의 향기와 매력이 숨어 있다. 장미와 타르로 표현되는 네비올로는 맑은 꽃향기 그것도 장미꽃잎 같은 순수한 향기가 있으며, 타르 같이 거칠고 진한 기운이 느껴진다. 물론 입천장에는 막대한 타닌이 낀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텁텁한 와인은 없을 것이다. 마치 잇몸에 마취 주사 정도의 탄력을 먹인 것 같다.

시음한 와인은 바롤로 2007년, 바르바레스코와 로에로는 2008년. 수 년이 지났는데도 시음회는 타닌의 향연 같다. 그러나 십 년이 넘게 흐르면, 와인은 마술에 걸린 것처럼 깊은 향기와 깔끔한 입맛을 주며 긴 여운을 남기는, 명상을 위한 와인으로 변한다. 시간은 타닌을 단아한 뒷맛으로 변모시킨다. 이것이 바로 네비올로의 묘력이다. 이렇게 이십 년 정도는 끄덕 없는 짱짱한 와인이 바로 네비올로로부터 태어난다.

네비올로 와인 중에 가장 오래 맛이 보존되는 것은 바롤로이다. 그래서 값도 가장 비싸다.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벌크 와인조차도, 바롤로 상표를 붙이면 한 때 6유로를 호가했을 정도로 바롤로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양조가 안젤로 가야(Angelo Gaja)는 “지금 바르바레스코의 인기가 전성기 때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다른 건 몰라도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에 관한 한 최악의 시기는 확실히 지났으며, 통계 수치들을 보면 2007년 전성기 때와 비슷해지고 있어 올 한해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네비올로 와인들에게도 경기침체는 차가운 계절이었다. 주요 수입처인 미국과 독일에서 2008-2010년 3년 동안 매출이 거의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롤로 2007년과 로에로, 바르바레스코 2008년 빈티지의 성공을 기대하는 양조가들은 수출물량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타닌의 육중함에 눌린 입천장처럼 납작 엎드렸던 경기는 이제 장미꽃 향기 넘실거리는 계절을 맞아 활짝 필 기세다.

좋은 갈비집에 자리잡아 생갈비를 구우면서 연기는 연통으로 뽑아내고, 네비올로로 만든 와인의향기는 큰 잔 안에 가득 가두는 순간, 북한산자락이 알프스 못지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TIP 1. 추천 와인

로에로 2008 추천와인
라비노, 네그로 안젤로, 조반니 알몬도

바르바레스코 2008 추천와인
안젤로 가야, 체레토 브리코 아질리 베르나도트, 비진 노에미, 네그로 안젤로 카쉬노타

바롤로 2007 추천와인
로베르토 보에르초 라 세라, 마우로 마스카렐로 몬프리바토, 보비오 잔프랑코 아르보리나, 프랑코 콘테르노 부시아 무니에, 피라 루이지 마르게리아, 마솔리노 비냐 리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