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유행이나 현대적인 관습도 따르지 않는 에미디오 페페의 와인은, 오늘날 가장 독특한 양조 철학을 담은 와인 중 하나다.
– 안토니오 갈로니(Antonio Gall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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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디오 페페의 와인은 우리에게 보증 수표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탈리아 아브루초 주의 컬트 와인”이라 불리는 에미디오 페페(Emidio PEPE) 와인을 국내에 수입하는 레드슈가 서희석 대표의 말이다. 그만큼 에미디오 페페라는 이름이 수입상의 명성과 입지를 높여주는 후광효과를 톡톡히 발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899년부터 아브루초에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페페 가문은 10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가족 구성원들이 힘을 합해 와인을 만들고 있다. 생산하는 와인의 가짓수는 몬테풀차노 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 한 종과 트레비아노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 한 종뿐인데, 평론가들과 수집가들 사이에서 점차 유명세를 타면서 지금은 컬트 와인에 가까운 명성을 누리고 있다.

에미디오 페페를 유명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수공예품을 제작하듯 와인을 만드는 양조 방식이다. 포도는 제초제나 살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포도밭에서 자라며, 손으로 수확된 후 양조장으로 옮겨져 (몬테풀차노는) 손으로 문지르거나 (트레비아노는) 발로 밟아 으깨는 과정을 거친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자칫 포도의 줄기나 씨를 건드렸다가 포도즙에 쓴 맛이 우러나오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1차 발효를 마친 와인은 오크통 대신 시멘트 탱크에서 일정 기간 숙성을 거치며 (따라서 에미디오 페페의 양조장에서는 오크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여과, 정제, 이산화황 주입 과정 없이 바로 병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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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높게 친 격자 울타리에 마치 차양처럼 포도나무를 걸어 재배하는 것을 Tendone 또는 Pergola 방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방식은 에미디오 페페 뿐만 아니라 아브루초 전역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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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트레비아노 포도를 발로 밟아 으깨고 즙을 짜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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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몬테풀차노 포도를 손으로 문질러 으깨고 즙을 짜내는 모습


에미디오 페페만의 독특한 양조 과정은 와인을 출시하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몬테풀차노 와인의 경우, 주문이 들어오면 병을 열고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 후 새 코르크로 와인을 막고(그러니, 코르크에 새겨진 코르크 제작연도를 와인 생산연도로 착각하지 않길 바란다.) 병입 번호를 기입한 레이블을 손으로 붙인다. 만약 에미디오 페페 와인인데 병입 번호가 없다면, 평범하거나 좋지 않은 해에 생산된 포도로 만든 것이며 주로 현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팔린다. 몬테풀차노와는 달리, 트레비아노 와인은 산화될 위험 때문에 출시 직전에 와인을 열어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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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와인의 풍미를 보존하기 위해 병입 전에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는 대신, 출시 직전에 디캔팅함으로써 침전물을 걸러낸다. 한편, 산화 방지용 이산화황을 전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와인의 이동이나 보관 시 세심한 주의가 요구되는데,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냉장 컨테이너를 사용하여 운송하는 것 등이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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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미디오 페페의 오래된 지하 와인 셀러에는 30-40년 정도 숙성된 와인이 40여 만병 가까이 저장되어 있다. 1964년 빈티지부터 최근에 생산된 와인까지 모두 보관하고 있는 이곳은 트레비아노와 몬테풀차노 와인의 역사를 맛으로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와이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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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디오 페페의 포도밭 토양은 무기질과 석회암으로 가득한데, 여기서 자란 포도는 와인에 빼어난 미네랄 풍미와 산도를 부여하고 오랜 세월 숙성이 가능하게 한다. 또한 거의 자연에 맡기다시피 하는 양조 과정 덕분에 와인은 놀랍도록 순수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다. 에미디오 페페의 와인을 흥미롭게 표현한 문장이 있어 옮겨본다.

“에미디오 페페의 와인은, 캘리포니아 레드 와인의 원초적인 힘과 바롤로의 우아한 향, 그리고 보르도 와인의 흙내음과 부르고뉴 그랑 크뤼 와인의 세련됨을 섞어놓은 듯한 독특함을 지닌다.”(Crush Wine & Spir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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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근 신사동의 아카데이 듀뱅에서 열린 에미디오 페페 와인 세미나. 2002년과 2007년 빈티지의 트레비아노 다브루초 그리고 1984년, 1994년, 2003년 빈티지의 몬테풀차노 다브루초가 등장했다.


에미디오 페페의 트레비아노 와인은 금빛을 띠고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견과류, 건초, 열대 과일, 미네랄 등의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다. 또한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질감은 마치 올리브 오일이나 크림처럼 매끄럽고 육중하다. 이런 와인은 실온에서 마실 때 그 풍미가 더욱 돋보인다.

몬테풀차노는 일반적으로 색감이 짙고 달콤한 타닌과 상대적으로 낮은 산도를 지니고 있으며 과일 향의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어 숙성 초기에 마시기에도 적합하다. 한편, 에미디오 페페처럼 잘 만들어진 몬테풀차노는 잉크처럼 깊은 자줏빛을 띠며 질감은 시럽과 비슷하고, 말린 체리, 블랙 베리, 흙, 감초, 야생 허브의 향이 짙다. 또한 오랜 세월 숙성시킨 후에도 몬테풀차노의 생생한 젊은 기운은 사라지지 않는다.

“에미디오 페페는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와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와인은 독창적이고 특별한 것을 원하는 소수의 와인애호가들을 위한 와인입니다. 이 때문에 에미디오 페페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와인 전문 바의 소믈리에에게 있어서 비장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만만치 않은 가격의, 그것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아브루초 지역의 컬트 와인을 소비자에게 어떻게 소개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물음에 서희석 대표는 위와 같이 대답한다.

에미디오 페페는 소수를 위한 고급 와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몬테풀차노나 트레비아노 와인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특히 소시지나 돼지고기 요리를 만들어 먹을 계획이라면, 게다가 마늘을 잔뜩 집어넣고 매콤하게 요리할 생각이라면 당장 마트로 달려가 몬테풀차노 와인을 집어 들기 바란다. 아브루초 지역은 돼지고기 요리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지역 특산품인 모르타델라 소시지는 매콤하고 마늘 향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몬테풀차노 와인은 부드러운 타닌 덕분에 음식과 충돌하는 일이 거의 없고, 달콤한 맛은 매운 맛을 진정시켜 주는 역할까지 한다. 이처럼, 입맛 까다롭고 식성 좋은 와인애호가들에게 몬테풀차노는 반가운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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