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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얼굴은 열 두 번이나 글씨를 써넣었다 지워버린 팰림프세스트이다.”
(※palimpsest, 양피지가 귀했던 시절에 원래 문장을 긁어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기를 반복한 것)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에 대해 한 말이다. 일주일의 여행을 통해 기자는 문호의 말처럼 그리스가 얼마나 천의 얼굴을 가진 나라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와인 애호가들에게 그리스 와인은 관심 밖에 있었다. 그리스의 이미지라면 뜨거운 태양 아래 푸르른 바다로 각인되어 이 더운 나라에서 고품질 와인이 나오는지에 대한 의심을 품게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리스가 서구 문명의 발상지인 동시에 현대 와인 문화의 발상지라는 점이다. 위대한 유산은 언제나 그렇듯이 현재 그리스 와인의 토대를 이루며 새롭고도 독특한 와인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고대 문명에서 발원한 포도재배와 와인 생산의 역사
 
그리스 와인 생산의 역사는 5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의 최초 문명, 크레테 섬의 미노아 문명에서 와인양조가 정착되었던 것으로 본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와인은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의 선물이었다. 이 선물은 당시 발달했던 해상 무역을 통해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호머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히포크라테스 등이 와인의 미덕과 유익한 영향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남성들은 와인을 마시면서 토론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것이 바로 심포지움(symposium)이다. ‘함께 술을 마신다’는 의미로 와인을 단순한 술이 아닌 지적인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로 인식했던 것이다.
 
당시 와인 양조와 문화는 이태리와 프랑스, 스페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그리스는 화려한 와인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힘든 여정을 겪어야만 했다. 비잔틴 제국의 일부였던 중세시대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와인을 생산했으나, 이후 오스만 투르크가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와인 생산은 암흑의 시대를 맞이했다. 보르도 같은 서유럽의 와인산업이 품질 향상과 상업적 성공을 이룬 반면, 그리스의 와인생산자들은 무거운 세금으로 인해 고통 받았다. 또한 유럽을 휩쓴 필록세라, 두 번의 세계 대전, 그리스 내전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리스 와인 산업은 거의 황폐화되고 말았다. 1960년대에도 대부분 와인생산자들은 와인을 오크통에 담아 통째 벌크 와인으로 팔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리스 와인산업은 고품질 와인의 생산 시대를 맞이하며 세계 시장에서 개성 넘치는 와인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현재 그리스 와인 산업을 이해하는 지표
 
그리스는 남유럽 발칸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4,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더구나 육지 면적의 70%가 산악지대로 넓은 평야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 포도밭의 면적도 113,000헥타르이며 2015년 기준으로 총 생산량은 2백 7십만 헥토리터이다. 보르도를 예를 들어 비교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보르도의 전체 포도밭은 123,000헥타르가 넘으며 연간 생산량이 약 6백만 헥토리터로 그리스의 와인 생산량은 프랑스 전체도 아닌 보르도의 1/2도 채 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리스 와인을 만나기 어려웠던 수수께끼가 풀린다. 게다가 자국 내 소비가 97%, 수출이 불과 3%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국경 밖에선 알기 힘든 미스터리 와인이었다. 그리스는 세계 17위의 와인 생산국이며 2014년 기준으로 와인 수출액은 6,270만 유로(원화로는 약 87억원)이다. 주요 5대 수출국은 독일, 미국, 프랑스, 캐나다, 사이프러스이며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와인 총 생산량에서 화이트 와인이 2/3, 레드 와인이 1/3을 차지하여 화이트 와인의 위치가 높다.
 
유럽 연합(EU)은 와인, 치즈, 올리브유 등 농산물의 원산지명을 법으로 보호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는데, 와인은 이 제도를 바탕으로 품질 와인(quality wine)에 해당하는 PDO(Protected Designations of Origin, 원산지 명칭 보호)와 테이블 와인(table wine)에 해당하는 PGI(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 지리적 보호) 두 개로 나눈다. 그리스는 프랑스의 AOC(원산지 통제 명칭)처럼 PDO와 PGI 두 카테고리를 와인에 적용했다. PDO 와인은 역사적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해온 지역의 와인으로 품종과 양조, 레이블 표기 등을 관리한다. PGI 와인은 PDO에 비해 좀더 넓은 개념으로 보면 된다. 그리스에서 PDO는 33개, PGI는 120개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현재 와이너리의 수는 718개로 10년 전의 300여 개에서 급격히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경제 위기를 겪은 젊은 세대들이 와인 산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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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의 최초 재배지
 
앞서 언급했듯이 그리스가 더운 나라라서 우수한 와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선입견이 낳은 오해일 뿐이다. 와인 생산에 있어서 기후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특수한 테루아에 맞는 품종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 피에몬테의 네비올로처럼 그리스도 테루아에 맞는 토착 품종이 긴 세월 동안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리스는 비티스 비니페라, 유럽 양조용 포도의 최초 재배지로 토착 품종 수가 300여 개가 넘고 그 중 50여 종을 재배하고 있다. 수요가 없어 사라지고 있는 품종들이 있긴 하지만, 몇몇 와인생산자들은 토착 품종을 고수하며 여전히 와인을 만들고 있다. 대표적으로 말라구시아(Malagousia), 비디아노(Vidiano)가 멸종 위기에서 벗어난 품종이다. 그리스 최초의 마스터 오브 와인, 콘스탄티노 라자라키스(Konstantino Lazarakis Mw) 씨는 “그리스는 ‘포도 품종의 쥐라기 공원’이라 할 만큼 다양하고 역사가 깊다”고 설명한다.
 
가 들려주는 새로운 토착 포도를 찾는 이야기는 고대 유적의 발굴작업이 연상될 정도로 흥미롭다. 150년 된 포도밭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면 백발백중 처음 보는 포도 품종을 발견하게 된다. 이름을 모르는 것은 당연해서 그 동네에서 불리던 이름으로 하던가, 최초 재배자 혹은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붙인다. 한편, 한때 토착 품종들이 많다는 것은 그리스 와인을 알리는데 단점으로 작용했으나 오늘날에는 큰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들어 샤르도네,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국제 품종을 재배하면서 종종 토착 품종과 블렌딩해서 매혹적인 와인을 만들어내곤 한다. 주요 백포도 품종은 아씨르티코(Assyrtiko), 아시리(Athiri), 로디티스(Roditis), 사바티아노(Savatiano), 모스코필레로(Moschofilero) 등이며, 주요 적포도 품종은 아기오르기티코(Agiorgitiko), 림니오(Limnio), 마브로다프네(Mavrodaphne), 마브로트라가노(Mavrotragano), 시노마브로(Xinomavro) 등이 있다.
 
 
고대 품종들과 완벽하게 짝을 이루는 지역
 
지중해성 기후를 띠고 경사가 완만한 비탈이나 높은 고원이 많아서 그리스는 포도를 재배하기에 적합하다. 여행하다 보면 의외로 덥지 않다고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겨울에도 푸르른 올리브 나무 때문에 따뜻해 보일 뿐 실제로는 상당히 춥고 비도 자주 내린다. 여름은 덥고 건조하지만 일교차가 커서 밤이 되면 서늘해진다. 이렇다 보니 그리스의 포도 재배자들은 충분히 포도가 익을 때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는 북부 그리스, 중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와 이오니안, 에게 해의 섬들 마지막으로 크레테 섬을 꼽는다.
 
에게 해의 섬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산토리니부터 살펴보자. 티라(Thira)섬이라고도 하는 산토리니는 하나의 큰 섬이었는데, 기원 전 1,500년대의 화산 폭발로 땅이 가라앉고 작은 화산 군도로 남았다. 이 화산 폭발의 위력은 남쪽의 크레테 섬의 미노아 문명을 하루 아침에 멸망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현재 산토리니의 화산암과 석회암 토양은 화산 폭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곡식을 키우기엔 너무 척박했다. 반면 포도 나무와 올리브 나무가 자라기엔 적당해서 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산토리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보다 쿨루랄(Kouloures) 방식으로 키우는 포도 나무들이다(아래 사진). 이 방법은 거센 바닷바람과 건조한 날씨로부터 포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는데 새로 나기 시작한 가지를 호스 말듯이 둥글게 돌돌 말아서 새 둥지처럼 만든다. 포도 송이는 가지 안 쪽으로 열리는 반면에 잎사귀는 둥지 바깥으로 뻗어서 강렬한 햇빛을 막아준다. 또한 겹겹이 두른 나무 가지가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고 바다 안개의 영향으로 생긴 습윤한 공기를 가둬 건조함 또한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언뜻 보면 포도 나무들이 왕관처럼 보여 멀리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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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산토리니는 유럽 포도밭을 황폐화시킨 필록세라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백포도 아씨르티코를 이렇게 재배한다. 고대 지중해 국가인 앗시리아에서 왔다는 의미를 지닌 아씨르티코는 레몬과 라임 같은 감귤류 향이 풍부하고 산도가 강하다. 테루아를 잘 드러내주는 품종으로 산토리니의 아씨르티코는 미네랄이 강한 반면에 내륙의 아씨르티코는 과실 느낌이 강하다. 아씨르티코의 강한 산도는 와인의 신선함을 유지하고 높은 알코올과 함께 장기 숙성을 가능하게 한다. 어릴 때는 상쾌하고 레몬과 미네랄의 풍미가 좋은 반면에 오래될수록 복숭아, 오렌지, 미네랄, 휘발성 향이 느껴지며 산미도 한결 부드러워 편안해진다. 에아 아씨르티코 2015(Gaia Thalassitis Assyritiko)는 레몬, 구스베리, 부싯돌 등의 아로마가 화려하고 산미가 강해서 침샘을 자극한다. 시갈라스 산토리니 2008(Sigalas Santorini)은 리슬링에서 느껴지는 패트롤 향이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지고 복숭아와 열대과실, 허브, 미네랄 향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산미가 약간 부드럽고 유질감도 느껴져 더 숙성시키면 어떨지 궁금해지는 와인이다.아씨르티코 와인에 풍미를 더하고 질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아시리(Athiri)와 아이다니(Aidani)를 소량 블렌딩하기도 하는데, 아르테미스 카라몰레고스 산토리니 2015(Artemis Karamolegos Santorini)는 레몬, 복숭아, 리치, 허브 향이 나면서 부드럽고 신선하며 상쾌한 느낌이라 아씨르티코보다 덜 공격적이다.
 
이태리의 스위트 와인인 ‘빈산토’와 헷갈릴 수 있는 그리스의 빈산토는, 수확한 포도를 약 2주 정도 건조시켜 당도를 높인 후 발효시키며(아래 사진) 그리스 와인법에 따라 오크통에서 최소 2년간 숙성시킨 후 출하한다. 와이너리에 따라 20년까지 숙성시키는 경우도 있다. 빈산토는 1200년대 산토리니를 지배했던 베네치아인들이 발굴한 와인이다. 그들은 빈산토가 달고 알코올도 강해 긴 항해 동안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주요 수출품으로 삼았고, 산토리니산 와인이란 뜻의 ‘비노 산토’에서 ‘빈산토’가 된 것이다. 20년 동안 오크에서 숙성시킨 아르기로스 빈산토 20년 배럴 에이지드 1992(Argyros Vinsanto 20 years barrel aged 1992)를 시음해보니 과일과 초콜릿의 풍미가 진하고 꿀처럼 달지만 산미가 워낙 강해서 단맛은 오래 남지 않아 그리스의 전통 디저트 바클라바(baklava, 호두를 넣고 꿀을 발라 구운 파이)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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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전 400년대에 일어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펠레폰네소스 반도, 이곳에서 유명한 와인 산지를 꼽으라면 화이트 와인 산지 만티니아(Mantinia)와 펠레폰네소스의 심장 네메아(Nemea)를 들 수 있다. 35km의 긴 계곡이 있고 해발 650미터의 고지대인 만티니아에서는 모스카토(Moscato)를 연상시키는 모스코필레로를 주로 재배한다. 서늘한 날씨 탓에 포도가 충분히 익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수확을 10월까지 미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품종의 껍질은 피노 그리지오처럼 분홍색이다. 드라이 타입의 스틸 와인을 주로 만들지만 스파클링 와인이나 로제 와인을 만들기도 한다. 산도가 높고 꽃 특히 장미 향 특징인 모스코필레로 와인은 가벼운 바디에 알코올이 낮아서 한 여름 밤에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 신선한 샐러드, 매콤한 요리, 해산물은 물론 초밥도 어울리는 그야말로 음식 친화적인 와인이다.
 
그리스 신화의 무대였던 네메아의 경우 ‘헤라클레스의 피’라는 뜻을 가진 아기오르기티코(Agiorgitiko)를 주로 재배한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의 12개 과업 중 첫 번째는 네메아의 식인사자를 죽이는 일이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사자를 죽인 후 헤라클레스는 승리를 자축하며 아기오르기티코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붉은 과실의 아로마와 타닌이 풍부하고 오크 친화력이 좋은 품종이다. 양조방법에 따라 오크 숙성을 하지 않고 일찍 출시하는 누보 스타일의 가벼운 레드 와인, 오크에서 최소 12개월 숙성시켜 풍미가 복합적이고 타닌이 강한 와인 등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 네메아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단일 레드 와인 원산지이기 때문에 ‘PDO 네메아’를 레이블에 표기하려면 아기오르기티코 100%의 레드 와인이어야 한다. 이 퓸종으로 로제와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면 레이블에 ‘PGI 펠로폰네소스’로 표기해야 한다. 이렇듯 아기오르기티코는 다양한 와인을 만들 수 있어 와인 생산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큰 사랑을 받는 품종이다. 네메아의 지형은 매우 복잡한데 보통 고도가 250~850미터나 되어서 이름 난 생산자의 포도밭을 찾아가려면 구비구비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야 한다. 아기오르기티코로 만든 크티마 드리오피 리저브 2013(Kitma Driopi Reserve)는 장미, 레드 베리와 검은 과실의 향이 나면서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타닌은 좀 강한 듯 하고 구조가 단단하다.
 
아테네가 위치한 중부 그리스의 중심은 아티카(Attica)이다. 하나만 기억하면 되는데, 백포도 사바티아노이다. 중부 그리스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덥고 건조하다. 고맙게도 이 품종은 열기와 건조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이 지역에선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스의 총 포도 생산량에서 80%나 차지하며 킹 오브 아티카(King of Attica) 혹은 킹 오브 센트럴 그리스(King of Central Greece)라고도 불린다. 사바티아노 와인의 첫 인상은 상큼한 과일 주스라고 느껴질 정도로 과실 풍미가 좋고 산도와 당도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또한 사바티아노는 전통적인 레치나(Retsina) 와인을 만드는 기본 품종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암포라(진흙 항아리, 아래 사진)에 와인을 담고 송진(Pine Resin)으로 밀봉 처리했는데, 이 때 송진의 풍미가 와인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엔 전통적인 의미로 생산하는 레치나 와인을 만들려면 알코올 발효 과정에서 송진을 첨가한다. 솔잎, 허브, 소금 맛이 나는데, 풍미가 강한 음식일수록 잘 어울린다. 엔초비, 와사비가 들어간 스시, 마늘이 많이 들어간 요리 등 와인과는 맞지 않을 것 같은 음식들과 오히려 잘 맞는다니, 우리 나라의 삭힌 홍어와 매칭해보는 것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생길 수밖에 와인이지만 수천 년이 지났어도 레치나 와인의 인기는 여전해서 그리스 테이블 와인의 30%를 차지한다. 현대적으로 만든 테트라미토스(Tetramythos)의 레치나 와인을 시음해보니 정말로 솔 향기가 은은하게 나며 목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다른 레치나 와인에 비해 상당히 세련되었다는 인상을 주는데, 한해 생산하는 17,000병의 와인을 모두 수출한다니 모던한 레치나 와인의 세계적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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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소개할 북부 그리스는 알아주는 고급 레드 와인 생산지이다. 토착 품종 일색인 그리스 내에서 국제 품종을 활발하게 재배하는 곳이다. 특히 나우사(Naoussa)와 아민데온(Amyndeon) 지역이 유명한데, 그리스에서도 내로라하는 이 지역의 와인을 시음해보면 그리스 와인을 다시 보게 된다. 북부 그리스의 맹주는 당연히 시노마브로로 검은 산(black acid)이란 뜻이다. 시노마브로 와인의 색상은 이름처럼 진하지는 않다. 대신 타닌과 산도가 모두 강하고 구조적으로 매우 단단하다. 숙성 초기에는 과실, 토마토, 올리브 등의 아로마가 나며 오크 숙성을 통해 향신료, 담배, 견과류, 가죽향 등이 복합적이고 풍부한 와인으로 발전한다. 이태리의 네비올로(Nebbiolo)와 상당히 비슷한 스타일이라 “그리스의 네비올로”라고 불릴 정도지만, 또 다른 일각에선 아직 품종의 잠재력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태리 네비올로라고 하는 것은 다소 성급하다는 의견이다. 시노마브로 와인을 출시하려면 최소 2년 동안 오크와 병에서 숙성시켜야 하고 빈티지에서 보통 10년 이상 숙성시켜야 정점에 도달한다. 나우사는 시노마브로를 생산하는 최고의 지역 중 하나인데, 1971년에 그리스의 첫 번째 와인 원산지로 지정되어 그리스 와인 산업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나우사 시노마브로 와인은 전통적인 바롤로를 복사한 것 같은 풍미와 깊이, 복합성 그리고 긴 숙성 잠재력을 자랑한다.
 
대부분의 포도원은 베르미오 산(Mt Vermio)의 고도 150~450미터 경사면에 위치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건조하다. 나우사에서 서쪽에 위치한 암인데온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야심 찬 와이너리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알파 에스테이트(Alpha Esatate)는 암인데온 와인산업의 선두두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적인 설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시노마브로 뿐만 아니라 프랑스 품종으로 상당한 수준의 와인을 생산한다. 대륙성 기후를 띠는 암인데온은 그리스에서도 에피루스(Epirus)의 짓사(Zitsa)와 함께 가장 추운 지역으로 여름에도 서늘한 편이다. 포도밭은 호수 가까이에 위치하고 고도 570-750미터의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의 시노마브로는 과실 캐릭터와 여성스러운 꽃 향기, 우아한 타닌이 특징이다. 또한 암인데온은 그리스에서 흔하지 않은 로제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으로 원산지 등급을 획득한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북부 그리스에서 주목해야 할 지역은 세 개의 손가락 모양으로 뻗어 나온 할키디키(Halkidiki)이다. 특히 두 번째 손가락에 해당하는 시소니아(Sithonia) 반도에 그리스 현대 와인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해온 포르토 카라스(Porto Carras)가 1965년부터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양조학자 에밀 페노(Emile Peynaud)의 컨설팅을 받아 설립되었고 그리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가장 넓은 유기농 생산지를 소유하고 있다. 북부 그리스 와인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에반겔로스 게로바실리우(Evangelis Gerovassiliou)는 전세계적으로 그리스 와인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주인공이다. 보르도 대학에서 와인 양조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포르토 카라스(Porto Carras)의 양조 책임자로 일하다 고향인 에파노미(Epanomi)로 돌아와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멸종 위기의 말라구시아를 구해내 “말라구시아의 아버지”란 별명을 가졌다. 덕분에 말라구시아는 현재 그리스 전역에서 재배되고 있다. 또한 그리스 최초로 아씨르티코와 말라구시아를 블렌딩한 와인으로 성공을 거뒀고 이는 그리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되었다.
 
 
 
참신하고 개성 넘치는 맛을 찾는 와인 애호가에게 그리스 와인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선택이다. 흥미진진한 그리스 신화에 얽힌 토착 품종들과 직설적으로 테루아를 반영하면서 개성이 더해진 와인이기 때문이다. 마스터 오브 와인, 콘스탄티노 라자라키스씨의 의견을 들어보자.
 
“소비자들은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프랑스처럼 수출 지향적인 국가에서 생산하는 천편일률적인 와인들에 점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새로운 와인을 발견하려는 이들의 호기심은 그리스 와인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현재 그리스 와인은 유럽을 중심으로 각광받고 있다.”
 
양조기술의 발달 덕분인지 유통 중인 와인의 품질 수준은 상향 평준화를 이루며 엇비슷해지고 있다. 또한 소비자의 입맛에 따라 대규모로 생산된 와인들이 대형 마트의 와인 코너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와인들은 품질이 떨어지진 않지만 그렇다고 분명한 개성도 드러내지 않아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20년 전만 해도 너무 많은 수의 토착품종은 그리스 와인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했으나, 지금은 이들의 개성 넘치는 와인들이 지루해져 가는 와인 세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리스 와인의 또 다른 장점은 12.5~13%의 낮은 알코올이다. 세계적인 와인 소비국인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서는 지나치게 볼륨감 있고 알코올이 강한 와인을 기피하는 추세이다.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저도주의 영향도 한 몫을 하긴 한다. 알코올이 강한 와인은 음식과 조화를 이루기 힘들다. 목이 타는 듯한 알코올의 열기 때문에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높은 산도와 낮은 알코올 도수를 가진 그리스 와인은 어떤 음식과도 좋은 조합을 이루며 음식을 돋보이게 해준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이나 Wine Spectator 같은 와인 전문 매체가 꾸준히 그리스 와인의 다양한 와인과 개성에 주목하는 이유도 그리스 와인의 무한한 가능성과 역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 와인은 떠오르는 다크 호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류 시장에서도 뒤지지 않을 완성도와 참신함 그리고 전통성을 갖춘 보기 드문 와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와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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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르 야니 아카키스 로제
Kir Yianni Akakies Rose
 
끼르 야니는 1997년에 북부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키 시장이었던 야니스 부따리(Yiannis Boutaris)가 설립한 톱 와이너리이다. 나우싸와 암인데온 두 군데에 와이너리가 있는데 모두 친환경적인 농법을 사용해서 환경을 보호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최초로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토착 품종뿐만 아니라 소비뇽 블랑과 메를로 등 국제 품종도 재배한다. 100% 시노마브로로 만드는 아카키스는 그리스어로 아카시아란 뜻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암인데온 농장 주변에 아카시아 나무가 많아서 붙인 이름이다. 프랑스 방돌 지방의 로제를 연상시키는 분홍색이 선명해서 매력적이다. 딸기와 크랜베리, 레몬 나무의 향이 나고 산미가 상쾌해서 한 여름에 마시기에 좋은 와인이다. (그리스 와인센터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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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갈라스 산토리니 아씨르티코
Sigalas Santorini Assyrtiko
 
시갈리스는 산토리니에서 손꼽히는 도멘으로 1991년에 설립된 후 현재까지 산토리니 와인 생산을 선도하고 있다. 오크 숙성을 시킨 아씨르티코와 세련된 빈산토, 무르베드르를 연상시키는 마브로트라가노를 생산하고 있다. 포도원은 산토리니의 북서쪽 이아(Oia)마을 부근에 위치하고 유기농 재배에 힘쓰고 있다. 오크통에서 발효시킨 후 효모 찌꺼기를 분리하지 않은 채 함께 숙성시키는 쉬르 리(Sur lies)로 6개월 숙성시킨다. 빈티지에서 7년이 지나야 음용 적기가 된다. 밝게 빛나는 금색을 띠고 레몬, 라임, 오렌지 같은 시트러스 계열의 과실 향과 바다 소금, 점판암의 맛, 미네랄이 느껴진다. 여운이 길고 산미는 약간 강한 편이지만 일반적인 아씨르티코처럼 강하진 않다. 훈제 연어 샐러드, 레몬을 듬뿍 뿌려 구운 생선 등과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리스 와인센터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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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따리 나우사 시노마브로
Boutari Naussa Xinomavro
 
1879년 나우사에서 설립된 부따리는 그리스에서 가장 역사 깊은 와이너리이자 세계적으로 그리스 와인의 대사 역할을 하고 있다. 나우사를 비롯해 산토리니, 펠레폰네소스, 크레테, 구멘시아, 아티카 그리고 남 프랑스 랑그독에도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 캐나다, 일본 등 세계 45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국제 와인대회에서도 지속적으로 메달을 수상하고 있다. 시노마브로의 클래식한 스타일로 12개월동안 사용했던 오크통에 숙성시켜 병 숙성이 필요한 와인이다. 깊은 붉은 색을 띠고 잘 익은 라즈베리, 블랙베리, 햇빛에 말린 토마토, 오크에서 온 것 같은 나무의 향이 난다. 타닌은 강하지만 산도와의 균형은 잘 잡혀 있고 구조적으로 단단하다. 여운도 긴 편인데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게 될 지 기대가 되는데 30년 이상 장기 숙성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스 와인센터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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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피스 만티니아
Troupis Mantineia
 
트루피스는 와이너리는 만티니아 중심에 위치한 고도 700m의 프테리(Fteri)라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1970년대부터 시작한 소규모의 가족 경영 와이너리로 포도를 재배해 판매하다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직접 소유한 모스코필레로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연한 노란색을 띄며 장미, 레몬, 흰 복숭아의 향이 난다. 가벼운 느낌이지만 풍미가 지속되면서 신선한 산미와 미네랄의 뉘앙스가 균형을 이룬다. 레몬 소스를 곁들인 닭고기, 오븐에 구운 생선, 바지락 파스타 같은 해산물 요리와 잘 어울린다. (헬레닉 와인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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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시노마브로 리저브
Alpha Xinomavro Reserve
 
유명한 프리미엄 와인 생산자 중 하나로 포도 재배자 마키스 마브리디스(Makis Mavridis)와 와인 양조학자 앙겔로스 라트리디스(Angelos Latridis)가 그리스 북서부 아민데온에 설립했다. 고도 620-710미터에 이르는 고원에 포도밭이 자리잡고 있으며 최첨단 양조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부따리의 나우사 시노마브로가 클래식한 스타일이라면 알파 시노마브로는 매우 모던한 스타일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연상시키는 선명하게 어두운 루비색이다. 와인 색상과 달리 햇빛에 말린 토마토, 딸기, 라즈베리, 허브와 향신료, 토스트 향 등 복합적이고 감촉은 부드럽지만 산도와 타닌은 매우 단단하다. 시노마브로 초보자도 좋아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육즙이 가득한 붉은 육류, 구운 양고기, 매운 소시지, 풀 바디 치즈와 잘 어울린다. (헬레닉 와인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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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로바실리우 아바톤
Gerovasileiou Avaton
 
유명한 에반겔로스 게로바실리우(Evangelis Gerovassiliou)가 1987년에 설립한 와이너리이다. 아씨르티코, 말라구시아,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비오니에, 메를로 등 토착 품종과 국제 품종을 광범위하게 재배한다. 아바톤은 세 개의 토착 품종, 림니오와 마브루디(Mavroudi), 마브로트라가노가 블렌딩 된 와인이다. 여기서 림니오는 기원전 5세기 희극 작가였던 아리스토파네스 (Aristophanes)의 림니아 암펠로스(Limnia Ampelos)에 언급되며 가장 오래된 그리스 토착 품종으로 밝혀졌다. 어두운 루비 색을 띠는데, 허브와 블랙 베리, 검은 과실의 향과 향신료가 복합적이다. 부드럽고 우아하며 타닌과 산도 모두 강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빈티지에서 20년이 지나면 음용 적기에 도달할 것이라 한다. 쇠고기 스튜, 짭짤한 음식, 각종 육류와 잘 어울린다. (헬레닉 와인 수입)
 
 
 
 
글_ WineOK.com 박지연 기자
사진_ National Interprofessional Organization of Vine and Wine of Greece
자료_Enterprise Greece (Data source ITC –International Trade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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