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메일함에 발신자가 “사르데냐 섬”인 초대장이 도착했다. 순간 내 마음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가 고래지식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녀 주위로 푸른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가 오버랩되듯, 내 마음에는 에메랄드빛 지중해가 찰랑대는 사르데냐의 흰모래사장이 펼쳐졌다. 발신자 주소를 검색하자 모래사장에서 1백 Km나 떨어진 마모이아다 산촌을 가리키고 있었다. 검색된 영상은 얄궃게도 마모이아다의 설봉사진도 보여주고 있어 지중해 섬은 모두 온화한 기후일 거란 나의 짧은 기상지식이 드러났다.
섬의 섬, 마모이아다 Mamoiada
사르데냐 섬은 제주도의 열 배나 크고 지중해에 떠있는 섬 중에서 면적이 두 번째로 넓다. 이탈리아 여름 휴양지 중 상위권을 점할 정도로 이탈리아인의 영원한 피서지다. 휴양섬인 특성상 사르데냐의 공항은 해양 리조트와 접근성이 좋은 해안도시를 따라 빙 둘러 지어졌다. 여행목적지가 마모이아다라면 일부러 해안 루트로 돌아가지 않는 한 바다 구경은 비행기 이착륙 때만 가능하다.
<마모이아다 마을을 걷다 보면 곳곳에 마무토네를 묘사한 벽화가 눈에 띈다>
마모이아다는 사르데냐 중동부를 아우르는 누오로 지방(군, Province)을 구성하는 열 군데 자치도시(코무네) 중 하나다. 누오로 지방은 로마 문화가 주류인 고대 이탈리아 문화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 로마가 자궁에 막 착상했을 무렵 사르데냐는 이미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돌멘, 암굴 묘지 같은 거석문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기원전 16세기에서 3세기 중반에 섬을 지배하던 부족은 누라기 문명을 낳았다. 누라기란 누라게nuraghe란 돌탑에서 온 것으로 누라게는 돌로 쌓아 만든 돔 모양의 성채다. 이런 누라기 군이 섬 전역에서 1만여 기가 발견되는데 3km마다 한 개 꼴로 누라기가 있는 셈이다. 누오로 지방은 누라기 문명의 본거지이며 누라기 계곡(Vale dei Nuraghi)으로 유명하다. 발견된 누라기 군이 30군데에 이르며 도무스 데 야나스(Domus De Jenas)라는 선사시대 암귤 묘가 3백여 개에 이른다.
<’요정의 집’이란 뜻의 도무스 데 야나스 암굴 묘는 누오로 지방에서 3백여 개나 발견된다>
마모이아다의 랜드마크
마모이아다는 1천 미터의 연봉이 둘러싼 분지에 자 리 잡고 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강풍은 산 병풍에 부딪혀 기세가 한풀 꺾인 채 분지 쪽으로 흘러 들어가 달궈진 대기를 식힌다. 마모이아다는 인구 대비 와인 가구 비율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인구가 2천5백 명인데 2백여 가구가 가내 양조시설을 구비하고 있어 와인 자급도가 높다. 여기에 병입 와인을 제조 및 판매하는 33군데의 와이너리까지 합하면 주민 10.8명 당 한 개 꼴로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다.
포도밭은 350여 헥타르로 해발이 7백에서 1천 미터의 산등성이에 흩어져 있다. 굽이치는 산등성이를 돌아가다 보면 지중해 관목, 코르크 나무, 올리브 , 목초지, 누라기 잔해, 포도밭이 스친다. 포도밭 가장자리는 코르크 나무 열이 울타리 구실을 한다. 20살이 넘는 코르크나무에서 벗겨낸 코르크는 장인의 솜씨를 만나 사르데냐의 토속 관광상품으로 변신한다. 코르크 채취 주기는 10년에 한 번인데 막 껍질이 떨어져 나간 부분은 상처를 입은 듯 빨간 속살을 드러낸다.
마을을 걷다 보면 마무토네 축제를 묘사한 벽화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마무토네의 본뜻은 ‘가면’ 또는 이 ‘가면을 쓰고 가무 하는 자’를 뜻하나 현재의 위상은 전통 축제로 올라섰다. 축제는 마을 수호성인인 산 안토니오를 기리는 1월 17일에 열리는데 이날 검은 탈과 양털 옷을 입은 마무토네 무리가 도심을 행진한다. 이들은 일정한 박자로 걷기와 신체를 흔드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몸을 흔들 때면 등에 달린 수십 개의 종이 일제히 울린다. 원시적인 복장과 무거운 발걸음은 누라기 탑을 쌓은 부족과 연관이 있어 보이나 사실 마무토네 출현 시기와 의미는 알려진 바 없다. 탈은 마모이아다 상징으로 정착해 지역 내 와인과 농산물 포장에는 탈 마크가 부착되어 있다 .
마모이아다의 드림 와인- 카노나우와 가르나짜
마모이아다는 젊은 층이 중장년 인구를 추월한다. 사르데냐 농촌을 피폐화하는 젊은 층의 농촌 탈출 위기는 여기서는 별나라 이야기다. 유수의 양조 대학이나 와이너리 수습을 마친 젊은 두뇌들이 귀향해서 배운 지식을 현지 와인산업에 접목시킨다. 포도 수확철의 흔한 풍경인, 고용된 농부들이 추수하는 장면을 마모이아다에서는 볼 수 없다. 생산자들끼리 팔을 걷어붙이고 돌아가면서 수확일을 거들기 때문이다.
<마모야 협회 Associazione Mamojà로고. 협회소속 와인은 본 로고가 부착되어 있다>
2천 년도에 마모야 협회(Associazione Mamojà)가 결성되었는데 그 배후는 다음과 같다. 사르데냐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은 카노나우cannonau 다. 섬의 와인산업이 막대한 비중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이 품종의 재배와 양조 과정을 규제하는 법은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Cannonau di Sardegna DOC) 원산지 규정이 유일하다.
포도밭의 95%를 카노나우가 차지하는 마모이아다는 거대한 규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이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진다. 이에 회원들은 보조 품종 허용 조항을 폐지하고 카노나우 함량을 100%까지 끌어올리는 자체 규정을 마련했다. 자연 효모만 사용하고 포도는 알베렐로 바쏘로 키우는 등 타 지역 카노나우와 차별화했다. 유기농 전문가에게 의뢰해 전체 포도밭에서 유기농 밭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 또한 협회 로고를 마무토네로 지정해 회원들에게 로고 부착을 의무화했다. 현재 마모이아다 와인은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DOC 외에 IGT(IGT Isola dei Nuraghi, IGT Barbagia, IGT Provincia di Nuoro) 규정에 따라 양조한다. 협회원들은 마모이아다 와인에만 효력이 미치는 등급이 신설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바다 말고도 마모이아다에 없는 것이 또 있다. 사르데냐가 자랑하는 화이트 와인의 정수, 베르멘티노가 그것이다. 대신 마모이아다에는 그라나짜(granazza)가 빈 공간을 채운다. 그라나짜와 카노나우는 유전자상으로 동일하나 자연의 불가항력에 의해 적포도와 청포도로 갈라졌다. 잎 모양이 똑같고 성장패턴도 비슷해 열매가 열려야 적포도인지 청포도인지 구분이 갔다. 이런 연유로 카노나우 와인은 그라나짜가 섞여 있기 마련인데 마모야 협회 창립 후 주품종에서 제외됐다.
무용지물 취급을 받던 그라나짜가 재기에 성공한 데는 주제페 세디레수 와이너리의 살바토레 역할이 크다. 그는 그라나짜만으로 양조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맛본다. 마모이아다에 어느 누구도 화이트 와인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드와인 양조법을 적용해 품종 테스트를 반복하는 동안 그라나짜가 장시간 침출 조건에 놓이게 되면 놀라운 진면목을 발휘함을 알게 된다. 즉, DNA에 잠재하던 레드와 화이트 속성이 침용을 통해 발현되면 오렌지 와인 덕후 기질을 얻게 된다는 거다. 타닌과 보디,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 오렌지 와인은 업계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작년에 새로 조성된 10헥타르 포도밭 중 3헥타르를 그라나짜가 차지할 만큼 인기가 높다. 오렌지 와인과 함께 화이트 와인도 선보이고 있다.
<Cantina Sannas의 Maria Abbranca 오렌지와인>
사르데냐는 백세가 넘는 노령인구가 2백여 명이나 되는 세계적인 장수섬이다. 이에 질세라 카노나우도 수령이 일흔 살은 보통이고 백 살이 넘는 고목이 흔하다. 고목들이 자라는 모습은 분재와 흡사하고, 이를 두고 키 작은 나무란 뜻의 알베렐로 바쏘(alberello basso)라 하는데 태양이 강렬하고 여름이 극도로 건조한 풍토가 낳은 재배법이다. 자란 나무가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물을 적게 빨아들이고 그루 당 결과율이 2kg 내외다.
< Giuseppe Sedilesu 주제페 세디레수 와이너리 소유의 포도밭. 알베렐로 바쏘는 경사가 급한 언덕에서 선호되는 재배법이다. 종종 멍에 진 황소가 밭을 가는 풍경도 목격된다. 황소 주인에 따르면 관리와 비용 측면에서 페라리 스포츠카 소유가 훨씬 경제적이라고 한다>
마모야다 비베스 Mamojàda VIVES
코로나로 인한 봉쇄 여파로 모든 대면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던 2020년 6월, 마모야다 협회는 마모야다 비베스 행사를 론칭했다. 첫회는 온라인 형식을 빌렸고 작년과 올해는 대면 행사로 열렸다. 비베스(Vives)는 사르데냐 방언으로 마시다(Bevi) ,거주하다(Abita), 생활하다(Vivi)를 뜻하는 다의어다. 즉, 마모이아다에서 와인과 음식을 즐기면서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와인&푸드 체험행사다.
이곳이 바다와 동떨어진 곳임은 음식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생선이나 해물, 보타르가 어란 대신 양고기, 페코리노 치즈, 프로슈토햄, 라구 파스타가 당신을 기다린다. 민트, 타임, 사루비아, 월계수 같은 지중해 허브를 듬뿍 넣어 익힌 양고기는 육즙에 짙은 향초 향이 배어있다. 토스카나의 명물 피엔자 페코리노 치즈는 토스카나로 이주한 사르데냐 목축인들이 낳은 양젖 치즈의 정수임을 잊지 말자. 음식과 와인이 있는 곳에는 종이처럼 얇고 바삭한 식감의 파네 카라사우 빵이 따라온다. 식당 메뉴에는 스파게티 면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 동전 크기만한 마하로네스 라도스와 쿠스쿠스와 생김새가 똑같은 프레골라가 대신한다. 후자(프레골라)는 국물이 자작한 라구 소스에 곁들인 맛이 그만이다.
<좌측 상단에서 시계방향으로 파네 카라사우 빵, 프레골라, 마하로네스 라도스, 미트 볼, 올리브 오일에 절인 소 혀 구이, 양고기찜>
마모야다 비베스 시음회에는 마모야 협회 소속 회원들이 만든 32종류의 와인이 선보였다. 이중 자연을 잘 반영하는 와인을 몇 종류 소개하고자 한다. 협회 와이너리와 와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된다.
[로제와인]
바르바자 IGT 2021(생산자_무센노레 와이너리)
엷은 핑크색이 돌며 라즈베리, 장미, 향신료 향을 퍼트린다. 쌉쌀한 미네랄 풍미와 산뜻한 산도가 잘 어우러지며 베리 아로마의 여운이 향긋하다.
바르바자 IGT 비네라 2021(생산자_안토니오 메레 와이너리)
매혹적인 핑크색을 띠며 라즈베리, 석류, 감귤, 송진, 복숭아의 달콤함이 매력적이다. 산도와 미네랄 풍미의 깔끔한 조화와 적당한 무게감도 보여준다.
바르바자 로자토 IGT Tziu Simone 2021(생산자_ 프란체스코 카디누 와이너리)
풋풋한 라즈베리, 타임, 향초, 체리 아로마가 향연을 벌인다. 깔끔한 산도, 미네랄, 보디가 결합하여 완벽한 밸런스를 이룬다.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이스티마우 DOC 2020(생산자_몬티시 핏지자이 와이너리)
청량감을 발하는 연어색에서 해조, 바이올렛, 복숭아, 레몬향이 스며 나온다. 드라이한 맛이 깔끔한 인상을 주며 생동감 있는 산미와 조화를 이룬다. 목넘김이 부드럽고 향신료 여운이 화사하다.
[레드와인]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DOC Mertzeoro 2020(생산자_ 소두 마리아 와이너리)
흑자두, 카카오, 장미, 라즈베리 향이 농염함을 뽐낸다. 개운한 산도와 타닌의 섬세함이 부드러운 질감을 선사한다.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바카루 DOC 2020(생산자_ 잔피에로 트라마로니 와이너리)
향신료, 블랙베리, 홍차, 바이올렛, 키나, 라즈베리, 송진, 바다내음의 복합미가 어우러진다. 향신료의 잔향이 퍼지는 가운데 타닌의 강건함이 혀에 와 닿는다.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마르티스 세로 DOC 2020(생산자_비냐이올리 카디누 와이너리)
바닐라, 발삼, 후추, 말린 토마토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묵직한 보디에서 힘이 느껴지고 타닌의 섬세함과 대조를 이룬다.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DOC 기라다 구르구루오 2019(생산자_비케비케 와이너리)
전체 분위기가 피노 누아를 연상시킨다. 타닌이 부드럽고 섬세한 구조는 파워를 발산한다. 딸기, 바이올렛, 산미에서 체리의 향긋함이 전해진다.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DOC 카르네발레 2019(생산자_ 주제페 세디레수 와이너리)
민트, 감초, 흙, 라즈베리, 허브향이 피어난다. 타닌의 촘촘한 구조는 응집도를 높인다. 바다내음과 어우러진 베리의 잔향이 매혹적이다.
카노나우 디 사르데냐 DOC 기라다 마라르타나2019(생산자_프란체스코 무라르주 와이너리)
타바코, 풀, 숲, 라즈베리, 체리, 흑자두 향이 풍성하다. 경쾌한 산미, 풀보디와 매끄러운 타닌은 풍만함을 자랑한다.
[오렌지 와인]
IGT Barbagia 그라나짜 술레 부체 2020(생산자_주제페 세디레수 와이너리)
짙은 갈색을 띤다. 복숭아, 바이올렛, 견과류, 송진, 용담의 쌉싸름한 향이 난다. 타닌이 순하고 미네랄이 입안에 개운함을 준다. 알코올, 산미, 타닌의 밸런스가 뛰어나다.
IGT Barbagia 그라나짜 Maria Abbranca(생산자_산나스 와이너리)
투명한 오렌지 색을 발한다. 꿀에 절인 과일, 바다내음, 견과류, 쉐리, 향신료 등의 풍미가 복합미를 자랑한다. 목넘김이 편안하고 엄격한 보디를 지녔으며 다채로운 맛성분이 조화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