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 하기에 늦은 감이 있고 여름은 이른 감이 있는 요즘. 어느 계절에 장단을 맞춰 옷 코디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용기백배하여 반팔과 무릎 선에 찰랑대는 반바지 외출을 감행한다. 대담한 자신이 기특해 보이는 것도 잠시. 지는 해를 보면서 긴팔이나 코트를 챙겨 오지 않은 경솔함에 후회막급이다.
와인도 계절을 탄다. 우연이지만 옷 코디에 여자들의 신경이 곧추서 있을 때 온다. 차가운 몸을 덥히던 알코올이 부담스럽고, 마르지 않는 샘물 같던 와인 아로마가 갑자기 거추장스러워진다. 환절기에 짧은 옷을 로망하는 여심처럼 가볍고 청량감 있는 와인이 땡긴다. 하지만 차가운 와인으로 일순간 갈아타면 얇은 옷 때문에 덜덜 떨던 밤이 반복될까 걱정이 앞선다. 봄과 여름 사이에 끼인 계절을 위해 트렌치 코트가 존재하듯 완충 와인이 필요하다.
프로세코 로제는 환절기에 추천할 만한 와인 코디다. 본색은 스파클링 와인이지만 효모의 진득한 맛이 덜하고 파도 포말처럼 쏴 하고 버블이 인다. 지난겨울 몸에 쌓여있던 타닌 때가 버블에 씻겨나가는 개운함도 있다. 또한 핑크빛은 겨울의 붉은색에서 시원한 여름을 상징하는 흰색의 중간색이 아닌가.
프로세코를 노란빛으로만 알고 있던 이들에게 로제빛 프로세코는 놀라울 수 있다. 2020년도가 프로세코 로제의 원년 빈티지라 당연하다. 로제빛의 주인공은 피노 누아다. 사실, 프로세코는 항상 피노누아를 사용해왔다. 주품종인 글레라의 향미를 보강하거나 향미를 끌어올리는 화룡점정 역할을 맡아하던 10개의 보조 품종 형태로 말이다. 작년부터는 보조 품종에서 피노누아만 남기고 블랜딩 허용량을 최대 15%까지 높였다.
주스티 와인의 로사리아 프로세코 로제(Giusti Wine Prosecco DOC Rosè Rosalia)는 핑크빛 잔 안에 버블 방울들이 유영하고 있다. 이리저리 떠도는 방울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딸기, 라즈베리, 자몽, 체리, 이리스, 레몬 향기를 터트린다. 버블이 터질 때 톡 쏘는 산미가 상큼하며 짭짤한 맛은 적당한 바디감도 준다. 프로세코와 바디감은 안 어울릴 것 같으나 실제로 우아한 캐릭터를 낸다. 산도와 어우러진 12그램의 잔당은 새콤달콤한 맛을 낸다.
로사리아는 글레라와 피노 누아 포도밭인데 북이탈리아 동 베네토 몬텔로(Montello) 언덕의 낮은 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덕 자락을 휘감아 흐르는 피아베 강(Fiume Piave)이 쌓아 놓은 모래 땅에 자갈이 듬성듬성 섞여있다. 피노 누아 밭은 라즈베리와 이리스 풍미가 잘 발현되는 클론을 선별해서 식재했다. 9월 중순에 완숙한 글레라를 착즙해서 얻은 포도즙에 저온 알코올 발효를 일으켰다. 발효가 끝나도 탱크 안에 놔두면서 와인이 복합미를 얻을 때까지 기다렸다. 글레라 와인에, 비슷한 절차로 만들고 젖산 발효까지 한 피노 누아 와인을 9대 1로 혼합했다. 블랜딩 한 와인을 압력탱크에 채운 뒤 30일 보관하면서 자가 발생한 탄산가스가 녹아들길 기다렸다.
<작년에 완공한 주스티 와인 본사. 친환경 소재로 지었으며 부드러운 지붕은 몬텔로 능선을 본 따 지었다. 5층 건물에 테라스는 글레라를 심었다.>
주스티 와인은 내년이면 20주년을 맞는 청년 와이너리다. 나이에 비해 거둔 성공의 덩치를 보고 혹자는 급성장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20년은 빙산의 일각이고 물 밑에는 곱절의 세월이 헤엄치고 있다.
때는 21세기 초, 이탈리아가 두뇌 해외유출로 생긴 빈자리를 봉합하기에 급급하던 시절에 에르메네질도 주스티(Ermenegildo Giusti) 사장은 이때야 말로 귀향을 단행할 적기라고 여긴다. 그는 청년 때 혈혈단신으로 캐나다에 이민을 떠났고, 현지의 건축붐을 타고 건축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성공을 거듭할수록 그의 마음은 향수로 채워졌다. 그러던 2002년에 20헥타르의 밭을 인수하게 되었고 여기에 부모가 경작하던 포도밭을 더해 주스티 와이너리를 설립한다.
대부분의 밭과 양조장 시설은 초승달 모양의 몬텔로 언덕이 감싸 안고 있으며 동쪽 끝에 피아베 강이 흐른다. 점토와 산화철로 된 테라로사 층이 프로세코의 과일 아로마를 풍성하게 한다는 토양이다. 그는 토착품종에 집중하는 한편 카베르네, 메를로 등 보르도 블랜딩 와인으로 라인업을 늘려갔다. 최근에는 프로세코 외에 발폴리첼라, 몬텔로 와인을 추가했으며 밭 면적도 120헥타르로 불어났다.
초창기 부터 주스티 사장은 지속 가능한 포도 농법에 올인했다. 지금은 유기농법이 유행이지만 그가 귀향했을 무렵만해도 병충해 방지책으로 농약, 유황, 구리 살포가 당연시되었다. 그는 성혼란 호르몬을 발산시켜 해충이 알을 낳는 걸 방지했고 밭에 천적을 풀어 해충의 접근을 막았다. 사물인터넷 기술과 센서를 연결한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밭의 곤충 개체수 변화를 추적한다.
주스티 와인의 친환경 농법의 정상은 PIWI품종 프로젝트다. PIWI는 해충에 내성이 강한 품종으로 PIWI가 좀더 일반화되면 농약과 화학제품 사용량을 85%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비티스 비니페라와 유전자 가위 기술을 사용에 해충에 내성이 있는 품종(비티스 리파리아, 비티스 아무렌시스)의 유전자를 적출해 교배시켜 얻었다. 현재 이탈리아 자국 내 재배가 승인된 PIWI 품종은 10여 개에 이른다. 주스티 와인은 6헥타르의 밭을 뚝 잘라내어 Merlot Khorus, Cabernet Volos, Sauvignon Nepis, Sauvignon Rithos, Souvignire Gris 를 실험재배 하고 있다.
18세기 까지만 해도 몬텔로 언덕에서 레칸티나(Recantina) 포도밭은 눈에 자주 띄었다.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면적이 줄어들다가 20년 전에는 몇 그루만 생존하기에 이른다. 주스티 사장은 레칸티나 복원계획을 추진했고 2017년에는 첫 빈티지를 시판했다. 이 스토리는 오랫동안 타향에 떠돌다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레칸티나 와인>
‘와이너리(Cantina)의 왕(Re)’이란 뜻을 지닌 레칸티나는 밤나무와 오크 숲 속에 빈터를 개간한 테누타 에밀리에서 자란다. 10월 초에 거둔 포도를 슬라보니아산 오크통에서 14개월 숙성했다. 흑자두, 블랙체리, 라즈베리 풍미가 폭발하며 후추, 허브, 초코릿, 가죽, 타바코 향이 짙게 깔린다. 풀보디의 에너지가 충만하며 매끄러움이 혀를 감싼다. 싱그러운 산미와 이와 결합한 타닌의 밸런스도 볼만 하다. 수확한 해로부터 5~6년 내에 마시는 레칸티나는 타닌 감이 다소 약하다. 이럴 때 산도의역할이 중요한데 중후한 맛에 가려진 타닌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풀보디임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느낌을 살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