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녀의 다정한 한 때. 잔피에로 마로네 사장(좌)과 세레나 마로네(우)>
몇 해 전 필자는 프랑스 요리 아카데미 서울 분교의 초청으로 이탈리아 와인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아카데미 측에서 준비한 이탈리아 와인들은 품종의 개성과 지역특성이 잘 안배되어 준비한 이의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와인 중에는 마로네 와이너리가 만드는 피케메이(Pichemei)와 라판타레라( La Pantalera)가 있었다. 순간 피에몬테 주가 고향이거나 연고가 있는 이들에게만 통할 법한 방언을 와인의 애칭으로 고른 생산자의 두둑한 배짱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와인병 뒷 라벨의 설명을 읽은 후 이해가 된 ‘그 중 최고’란 뜻의 피케메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통 구기종목인 라판타레라를 외국인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참고로, 라판타레라는 본래 긴 나무 조각을 연결시켜 만든 나무판자(가로 2m X 세로 80 cm)를 가리킨다. 선수가 공을 라판타레라에 던지면 그 반동으로 튀어 오르는 공을 손목으로 패스하는 경기로, 원뜻이 구기종목으로 확장되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런 식으로 별명을 얻게 된 와인이 4종이나 더 있었다.
이후, 배짱 두둑한 와인을 다시 만났다. 시가가 수십 억원대인 라모라, 세라룬가 달바, 바롤로 포도밭이 치마폭처럼 둘러싸인 마로네 본사에서다. 필자의 행운이 내 품 안에도 굴러들어 오길 바란다면 나비에게 의지해 보시길. 꽃 찾아다니는 나비가 아니다. 우연한 스침을 먼 훗날 지구 반대쪽의 만남으로 이어주는 신통력을 가진 나비효과의 그 나비다.
마로네 가족은 19세기 말, 현 오너의 조부 때부터 와인업에 뛰어들었지만 잔 피에로가 사업을 맡으면서 급성장한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라모라에 포도밭이 있었지만 잔 피에로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려는 야망을 품었고 이 꿈은 마돈나 디 코모(Madonna di Como) 구릉지에서 펼쳐진다. 마돈나 디 코모 언덕은 마로네 본사가 있는 아눈지아타 마을로부터 20km 거리에 있다. 바롤로 생산허가 경계선 밖이지만 서늘한 기후, 점토와 모래가 혼합된 석회석 토양은 바롤로와 흡사하다. 규정이 엄격하지 않은 적포도 품종과 아르네이스, 파보리타, 모스카토 품종은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새 풍토와 맞았다. 총 19종의 와인 중 12종의 와인이 여기에서 나올 정도로 마로네 가족의 꿈의 포도밭이다.
마로네 와인 세계는 크게 세 축으로 움직인다. 시음실과 오크 숙성실이 있는 라모라 아눈지아타 본사, 병입 시설과 발효시설을 갖춘 카스틸리오네 팔레토 양조장, 마돈나 디 코모의 14.5 헥타르 면적의 포도밭이 그것이다. 본사 주위 라모라 포도밭과 카스틸리오네 팔레토, 몬포르테 달바에 걸쳐있는 3.5헥타르의 포도밭에서 마로네의 모태 와인이자 앰버서더인 바롤로가 나온다.
<라모라 아눈지아타 본사 내부의 숙성실>
잔 피에로 사장의 일생일대 투자는 바로 세 딸이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른 분야를 전공했지만 결국 가족의 화두인 와인으로 하나가 된다. 만일 잔 피에로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딸들과 조율해 가면서 가족사업을 이끌어 가는 자식농사에 성공한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 거다. 장녀 데니세는 랑게 와이너리 투어 전문 에이전시를 운영하며, 차녀인 세레나는 영업과 사무를, 양조학을 전공한 막내 발렌티나는 와이너리의 중추인 와인 양조와 품질관리를 맡고 있다.
7 종류의 토착품종과 품종별로 양조 공정을 정할 때 마로네 가족이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산화방지다. 산화는 포도의 아로마를 파괴하는 적이란 경험을 바탕으로, 산화에 취약한 세 단계 공정을 찾아 다음의 하이엔드 양조기술로 보강했다.
수확 후 양조장으로 운반할 때: 손 수확한 포도는 25kg 상자에 담아 슬래드 트랙터에 실려 양조장으로 운송된다. 슬래드 트랙터는 커브길과 비포장 길을 달릴 때 상자 안의 포도송이가 파쇄되는 것을 줄여주는 장비다. 앞은 트랙터지만 바퀴 자리에는 기다란 스키 날이 달려있어 마치 눈길을 미끄러지 듯 달린다.
랙킹(racking, 와인을 옮겨 담을) 때: 발효가 끝나거나 숙성 중인 오크통 바닥에 가라앉는 침전물을 제거할 때 질소 랙킹을 실시한다. 질소를 오크통에 주입하면 그 압력 증감에 따라 와인이 밖으로 흘러나온다. 모터로 움직이는 펌프로 할 때보다 산화의 위험이 제로에 가깝고 아로마 분자 수는 일정하다.
와인을 병입 하기 전: 병 안에 남은 미량의 산소는 산화의 원인이 되므로 병에 질소샤워를 해서 완전 진공상태로 만든 후 와인을 주입한다.
<마로네 와인은 피에몬테 전통음식과 잘 어울린다. 시계방향으로, 살라메, 플랑, 브루스케타와 비텔로 토나토, 타야린>
Langhe Favorita 2018
마돈나 디 코모 해발 410m , 산탄토니 포도밭에서 재배한 파보리타 포도로 만들었다. 슬래드 트랙터에 실려온 포도는 영상 6도가 유지되는 저온창고에 2~3일 놔둔다. 부드럽게 압착한 포도즙을 4시간 저온침용 후 발효한다. 스테인리스 용기에서 5개월 간 효모 앙금과 와인을 접촉시키는 Sur Lie 숙성을거친다. 숙성 중 와인과 효모가 분리되지 않게 스틱으로 자주 휘젓는다(바토나주 기법).
옅은 노란색이 은은하며 달콤한 시트론, 복숭아, 헤이즐넛 향이 상큼하다. 날카로운 산미는 와인의 다채로운 맛과 어우러지며 뒷맛이 깔끔하다.
Langhe Arneis Tre Fie 2018
Tre Fie는 딸 셋을 뜻하는 피에몬테 방언. 서늘한 마돈나 디 코모에서 40년 수령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아르네이스로 만들었다. 아르네이스가 익는 정도에 따라 두 번 수확했다. 저온 창고에서 3일간 아로마를 농축한 뒤 부드럽게 압착한 포도즙을 6~8시간 저온침용 했다. 15~17도로 맞추어진 발효조에서 7개월 효모 앙금과 함께 숙성시켰다.
짙은 노란색은 잘 익은 포도의 지표다. 복숭아, 헤이즐넛, 흰 꽃 향이 감미롭다. 경쾌한 산미는 식욕을 일으킨다. 아몬드의 쌉쌀한 듯 고소한 맛이 입안 전체를 감싼다.
Langhe Chardonnay Memundis 2016
점토와 석영이 혼합된 석회석 토양에서 자란 40년 수령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샤르도네로 양조했다. 알코올과 젖산 발효는 불에 굽지 않은 오스트리아산, 프랑스산 바리크에서 했다. 16개월 바리크 숙성 동안 첫 5개월은 일주일에 세 번씩, 후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바토나주 했다. 질소샤워 병입 후 12개월 병 숙성 했다.
황금색에 영롱한 빛이 반짝인다. 꿀, 샤프론, 바나나, 버터에 구운 빵 등의 구수한 향과 레몬, 허브의 상큼한 향이 어우러진다. 보리차와 찐 옥수수 향기도 살짝 올라온다. 매끄러운 질감과 예리한 산미가 뒷 맛을 상큼하게 정돈해 준다.
Barbera D’Alba Superiore La Pantalera 2017
65년 수령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바르베라를 부드럽게 압착한 뒤 28도의 온도에 맞춘 스테인리스 발효조에서 20일 발효와 침용을 했다. 5백 리터 오크통에서 젖산발효한 후 18개월 오크 숙성 했다. 숙성 첫 7개월은 바토나주 횟수를 늘려가며 효모 앙금과 함께 숙성했다.
블랙베리, 자두의 농축된 향이 감초, 발삼 향으로 이어진다. 15도의 알코올이 주는 단 맛과 유질감을 산미가 누그러뜨린다. 밸벳 촉감의 타닌과 농축미는 단단한 구조감을 선사한다.
Barbaresco 2016
바르바레스코의 4군데 마을 중 기온이 차가운 트레이소 마을에서 재배한 네비올로로 양조했다. 28~30도로 온도를 맞춘 스테인리스 발효조에서 25일 침용과 발효를 했다. 후에 70%의 와인은 3천 리터 오크에서, 30%의 와인은 225리터 바리크에서 젖산 발효했다. 바토나주 오크통 숙성 8개월 , 병 숙성 6개월 했다.
눈을 감고 마시면 바롤로라 여겨질 정도로 강건한 바르바레스코다. 검붉은 빛이 영롱하다. 장미, 제비꽃, 자두, 감초향과 메를로 느낌의 스파이시한 향을 풍긴다. 부드럽게 입안을 조이는 타닌과 날카로운 산미는 15도의 알코올이 주는 열기를 차분히 가라앉힌다.
Barolo Pichmej 2015
잔 피에로의 부친은 풍미가 뛰어난 바롤로가 담긴 오크통을 발견하면 “피케마이!”를 외치곤 했다. ‘그 중 최고’란 뜻으로 마로네 가족의 주력 바롤로다. 라모라와 몽포르테 달바의 포도밭에서 온 40년 이상 수령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네비올로를 블렌딩 했다. 30도로 맞춘 발효조에서 30일 발효와 침용을 한 후 3천 리터 오크통에서 젖산 발효를 했다. 오크 숙성 30개월 후 병 숙성 6개월을 추가했다. 오크 숙성기간 중 10개월은 효모 앙금과 함께 숙성시켜 복합미를 더했다.
짙은 벽돌빛이 돌며 잔을 돌리면 투명한 루비색이 비친다. 유칼립투스, 민트, 장미, 자두 향 등 젊은 네비올로의 매력이 풍부하다. 잘 익은 타닌이 입안을 살포시 조이며 경쾌한 산미와 여러 풍미의 밸런스가 뛰어나다.
Barolo Bussia 2014
마로네의 유일한 싱글빈야드 바롤로다. 부시아 포도밭에서 재배한 수령 60년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네비올로의 에센스를 담아 놨다. 발효와 침용을 28도의 온도에서 35일 한 것만 제외하고 Pichmej바롤로와 숙성방법은 같다.
처음에는 향기를 가두었다가 페인트, 스모키, 감초, 가죽 향을 풀어놓는다. 네비올로의 아로마는 복합적인 부케로 모습을 바꾸는 중이다. 농축미에서 오는 집중력, 매끄러운 질감에서 타닌의 힘이 솟는다.